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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의 시간과 1000만 원 3편

탈출, 그리고 새로운 시작

by 언디 UnD

(같은 제목 2편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면접 이후, 이 건 잊고 지내야지 하며 지내던 중, ‘그 공고 게시판’에 새 글이 떴다.

<콜럼버스 프로젝트 선발 결과 발표>


뜨학..(이라고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또 심장 박동수가 비정상적으로 치솟기 시작.

이러면 안 돼. 난 안됐을 거야. 안 될 수도 있는 거야. 안돼도 난 괜찮...

어어? 그런데 내 이름 석자와 프로젝트 이름인 ‘목욕, 어디까지 해봤니? -세계 목욕문화 탐방-’과 나란히 진심 어린 명조체로 합격자 목록에 쓰여있는 것 아닌가.

끼얏호!!!! 난 쾌재를 불렀다. 실제로 소리도 질렀던 것 같다. 그 날 마침 휴가로 출근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가장 친한 회사 동기 언니가 소식을 전해주어 결과를 실시간으로 알게 되었는데, 오히려 회사 밖에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그냥 왠지 어느 누구의 방해 없이, 눈치 보지 않고 혼자서만 충분히 이 승리감을 맛보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진짜 됐구나!!!! 됐어! 믿기지 않으면서도 기분이 너무 좋았다.

결과에 대한 인과관계는 정확히 파악해낼 수 없으니, '내가 어떻게 된 거지?' 그저 얼떨떨하기만 하고, 이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회사 사람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뿌듯했다. 이 정도면 팀 사람들도 나를 함부로 보거나 쉽게 대하진 않겠지?라는 생각이 동시에 밀려들어왔다. 회사의 공식적인 프로그램에서 선발자가 되는 것이 그나마 내 개인의 능력 하나는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그때는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시점의 나는 입사한 지 고작 1년 반 정도 된, 그럴듯한 '연구원'이라는 이름을 단 초년생으로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더 잘할 수 있는지, 어떤 역량을 가지고 발전할 수 있는지, 이런 것에는 회사가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처절히 깨닫고 욕구불만인 상태였다. 아무도 쳐놓지 않은 덫에 걸린 기분이랄까, 내가 선택한 길이었고, 입사를 간절히 원했지만, 입사 이후는 내가 원하는 그런 삶이 아니었다. 나의 내면은 출근 후 일과 중에는 옴싹 달싹도 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보통의 직장인처럼 출근하면 퇴근을 기다리고, 보통의 직장인처럼 월급의 수치를 통해 내 가치를 가끔 확인하고, 그마저도 공급받는 입장이 되어 모든 일에 수동적으로 에너지를 사용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 나는 스스로가 숨이 막히고 역겨웠다. 가장 혐오했던,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삶의 모습에 내가 완벽히 적응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 다 그래."라고 누군가 나에게 말할 때 나는 언제든 "나는 안 그렇다는 거, 보여줄 거야."라고 대꾸해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더 충격적인 건, 회사의 동료나 선배들은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는 똑똑한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문제로 인식하지 않기로 결심해야만 직장 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는 점이다.

1. 대충 다니면서, 딴 데서 재미를 찾든가 (철저한 개인주의적 워라밸, 일과 삶의 분리)

2. 여기만 한 데가 없다고 생각하고 할 수 있는 만큼 내 일을 최대치로 하든가 (일에 미쳐 사는 삶, 진급 바라기)

3. 퇴사하든가. (근데 아마 딴 회사는 여기보다 더 나빴음 나빴지, 낫기 어려울걸? - 아마도 칼퇴 문화, 사람 안 자르는 문화, 사람 안 쪼는 문화, 여성 중심적인 문화와 각종 효도에 도움되는 혜택들을 이야기하는 것일 거다.)


그리고 본인들은 잠정적으로 1번 길을 선택했다고 했다. 1년 선배든, 2년 선배든, 3년 선배든.. 어쩌면 그 이상이 되면 이런 질문을 더 이상 던지지도 않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느낌이 소름 끼치게 두려웠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나의 고민, 고뇌는 나를 불행하게 하는 씨앗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 같은 사람이 지금까지 3번을 택하지 않아서 의아하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서 더 씁쓸해지곤 했던 대화 주제들이다.


당시 내 리더는 토끼 같이 소심한 사람이었다. 성품 자체는 악의가 없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윗 사람들의 압박에는 민감했고, 아랫사람 혹은 후배들을 트레이닝하는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혼자 무난히 회사 생활을 잘 해온 사람이었다. 그를 욕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회사 생활에서의 가치관 자체가 다르다 보니 그의 방식으로는 아랫사람들이 동기 부여가 잘 되지 않았고, 그의 도움을 받기에는 조직에서 우리 팀의 업무에 부여한 권한이 너무 적었고, 리더로서의 그의 영향력도 안팎으로 너무 미약했다.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들어오기 전전 기수(입사 2-3년 차 정도 되는 급)의 모든 선배들은 퇴사한 히스토리가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모든 배경과 상황이 의아했으나, 이런 상황들에 대한 그의 태도가 한결같았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는 우리가 원하는 걸 해줄 수 없다는 것에 솔직했고, 본인 스스로 상황이나 조직에서의 팀의 위치를 바꿀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종래에는 필요를 느끼지도 않았던 게 아닐까 싶다. 적당히, 잘, 추궁당하지 않을 정도로만 하면 되는 것. 그게 그의 오랜 회사 생활의 비결이었을까. (그는 입사 15년 차에 모든 주택대출 자금을 갚았다고 했다. 그 날은 그가 우리 모두에게 커피를 한잔씩 돌린 날이었다. 아마, 이런 커피 턱은 지금껏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정말 교만스럽게도, 그리고 발칙하게도, 그들과 나는 다르다고 처음부터 느꼈고, 굳게 다짐했다. 나는 나 다움을 잃지 않을 거야, 다른 사람들에게 물들지 않을 거야, 내 생각을 잊어버리지 않을 거야.

이런 마음을 자주 되뇌고 성찰하고 또 때때로 되새겨야만 했다. 많이 지쳐있었다. 그렇게 안간힘을 쓰고 매몰되지 않으려던 나에게, 공식적인 탈출의 시간이 주어진 것이었다.


나는 숨 막히는 회색 상자를 어떤 명분으로든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고, 그런 기회가 주어져서 정말 다행이었다. 내 눈은 회사 사무실 업무 공간이 아니라, 언제나 더 넓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하나님은 그런 불쌍한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목욕 어디까지 해봤니, 세계 목욕문화 탐방> 3개월의 장정을 시작할 첫 나라는 “일본”이었다. 당장 떠날 것처럼 벳푸행 비행기 티켓부터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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