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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의 시간과 1000만 원 2편

나는 내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 했다.

by 언디 UnD

(프롤로그의 내용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거의 1년 만에 다시 꺼낸, 즉 1년 전 미리 야심 차게 써두었던 프로젝트 지원서는 크게 의미가 없었다. 이미 회사의 외부적인 상황과 내가 맡은 업무의 범위도, 나 스스로의 판단력이나 생각도 많이 변해 있었다. 그때만 가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감성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것이 돼버렸다. 그렇지만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 지원서 양식은 토씨 하나, 폰트까지도 바뀌지 않았으니 남들보다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해본 내가 더 유리할 것이라는 낙천적인 마음을 쥐어짜서 지원서를 지금 상황에 맞게 다시 써보기로 했다.


지원서를 작성하면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내가 이 프로젝트를 해야만 하는 이유’ [개인적 이유]는 어찌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데 왜 ‘회사가 여러 사람 중에서 나를 지원해야만 하는지’[모두가 납득할 명분]를 주장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은 대부분의 지원과 선발 과정에서 나타나는 구도가 아닐까 싶은데, (거칠게 말하면) 뽑혀야만 하는 “을”의 입장에서는, 그저 뽑히고 싶은 마음이 크지, 제한된 인원을 선택해야 하는 “갑”의 입장에 대해서 깊이 고려하고 파악하기가 쉽지는 않은 게 현실이다. 아마 유사한 상황에서 선발된 경험이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해본다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프롤로그에서 언급한 선배에게 슬쩍 대화를 걸어보았을 때에는 어차피 잘 모르겠는 거 ...진짜 하고 싶은 걸로 주제를 잡아 내거나, 회사가 나를 뽑고 싶을 만한 점이 분명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타인의 성품이나 경험,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 가치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나와 같을 순 없으므로 일차원적으로 공통점을 찾아내거나, 흉내를 낼 수는 없기에 더욱 답답한 것이 이 “을”의 입장이다.


고민한 끝에, 나는 명분을 더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원래 생각했던 훨씬 더 큰 그림(?..이라고 해도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에서 조금 깎아내린 타협을 했다. 내가 당시 담당하고 있던 업무는 샴푸, 바디워시 같은 헤어 케어/바디 케어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들을 인터뷰. 관찰 등으로 연구하는 일이었는데, 프로젝트를 마치고 돌아와서도 이 업무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연관성relevance”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했고, 프로젝트 주제는 이 영역 안에서 논의되어야만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해외 국가에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먹힐 수 있는 어떤 포인트가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람의 의식주 및 생활 습관과 관련된 대부분의 것은 조금씩 다르긴 해도 세계 만국 공통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때까지 대중목욕탕이 우리나라의 고유한 문화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모두가 깨끗하게 씻고 싶고, 몸을 편안하게 하고 싶었을 텐데 말이다. 리서치를 조금 해보니, 생각 이상으로 무구한 역사와 전통을 보여주는 것이 세계 각국의 목욕 문화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영국, 일본, 독일, 체코, 터키, 아이슬란드, 러시아, 핀란드... 안 가볼 나라가 없었다.

나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거다.


지원서를 작성하면서 1000만 원을 넘지 않도록 예산 초안도 함께 제출했어야 했기에, 비행기 삯을 알아보고, 숙소 평균 가격을 알아보는 등 아주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프로젝트 수행에 필요한 실질적인 것들을 조사하면서 나는 마치 내가 이 프로젝트에 선발되어 갈 수 있을 것 같은 환상과 기대로 흥분했다. 동시에,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자’, ‘안되면 어쩔 수 없는 거지’를 연신 되뇌었고, 앞서가고 있는 내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애쓰기도 했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즐거움을 지원 과정에서 느낄 수 있어 진심으로, 너무 좋았다. 프로젝트의 선발 담당자가 마침 입사 신입 교육 담당자였던 분이라,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있었고 안면이 꽤 있었기 때문에 문의 사항이 있을 때에 편하게 소통할 수 있었던 점도 자신감을 확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회사에서 인사를 잘해야 하고 좋은 첫인상을 남기는 게 중요하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은 꼰대질이 아니고, ‘실제로 도움이 되어서’라는 것을 회사 생활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뭔가를 물어보는 것과, 이미 아는 사람에게 하는 것은 정말 차원이 다르고, 그 효과와 결과도 전혀 다르다.


고민을 담아 작성한 지원서는 통과가 되었고, 지원자들이 각자의 프로젝트 주제를 가지고 발표 및 질의응답하는 2차 면접 과정을 치르게 되었다. 글보다는 대면 면접에 더 강한 편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긴장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당일 날 아침 면접장에 들어서니 정말, 많이, 긴장이 되었다. 애써 긴장하지 않으려고 대기하는 지원자들과 가볍게 대화도 나누어보고, 물도 여러 잔 마셨지만, 아무래도 너무 선발되고자 하는 욕심이 컸던지 쉽사리 심장 박동수가 내려가지 않았다. 지원자들은 평균 업무 경력이 5-10년 정도 되는 시니어급들이었다. 지원자 2명과 함께 3명이서 동시에 3명의 C-레벨들과 면접실에 들어갔는데, 세 분 다 한 번도 만나 뵌 적 없는, 내가 소속한 사업부와는 무관한 본사 분들이었다. (여담이지만,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막상 소속된 그룹 내에서는 별로 실감하지 않지만, 한 발짝이라도 외부로 나가게 되면 같은 소속의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주는 힘이 엄청나다. 반대로 그런 존재가 없으면 뭔가 위축되는(?!) 느낌도 있다. 비빌 언덕이 있으면 좋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완전히 불리한 것처럼 느껴졌다. 쭈굴.)

한 명은 남성 디자이너, 한 명은 여성이자 나와 같은 연구소 소속이었고, 두 사람 모두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를 가지고 지원했다는 것을 이야기를 들으며 알 수 있었다. 나는 세 명중 마지막 순서로 발언을 하게 되었다. 내용을 전부 외울 자신이 없어서 그냥 지원서를 프린트해서 들어갔었고, 1분 자기소개 및 프로젝트 소개 때는 그냥 보고 읽었다. 어쩌겠는가, 어설프게 외우는 거보다는 확실한 게 낫지.

면접관들은 으레 껏 모두 너무 좋은 주제들이고 흥미롭다고 말했다. 하지만 역시 내가 지원서를 작성할 때 조금 덜 신경 쓴 부분이나 간과했던 부분을 질문으로 받았고, 진땀이 났지만.. 그 부분을 보완하겠다고 이야기하며 (진짜 보완해야겠다고 생각은 들었던 부분이다.) 향후 가능한 영역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약간은 내가 과장하거나 사기를 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양심의 가책과는 상관없이, 옆 지원자는 ‘아프리카 비건 화장품’을 주제로, 옆 옆 지원자는 이미 미국에서 급부상한 ‘코인 세탁 체인’ 산업과 관련한 아주 선명한 프로젝트 계획을 잘 발표했으므로 왠지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옆 지원자는 개성 뿜 뿜, 열정 뿜 뿜 하는 발랄한 신입 새내기였고(아마 내가 1년 전 지원했다면 이런 모습이었으려나), 옆 옆 지원자는 내공 가득한, 게다가 결과물을 시각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디자이너(회사 관점에서 진짜 관심 있는 영역을 잘 발굴했네)였다. 내 강점은 빛을 발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아니 다른 더 강한 빛들에 의해 보이지 않겠구나 하면서 마음을 비우게 되었던 면접날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좋은 경험이었다.’ 그날,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응원이자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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