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 나는 지방에서 살다가 작은 아이가 아프면서 서울로 다시 돌아왔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아이들 키우며 정신없이 살았다. 부모님과는 기껏 명절이나 아버지 생신 또는 기타 몇 가지 이유로 일 년에 두어 번 얼굴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젊었고 바빴고 바쁘다고 핑계를 댔고 부모보다 더 중요하고 어렵고 책임져야 하며 때론 자잘한 일들에 매여 있었다. 그러는 사이 30년이 지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늙고 병드셨다. 연로한 어머니는 지병으로 자주 편찮으셨고 더 늦기 전에 어머니를 돌봐드려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오랜 기간 일하던 학원 강사를 그만두었다.
그런데 어머니를 자주 찾아뵈면서 당황스러운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부모 자식이 어디 가겠냐고 하겠지만 우리가 함께 지냈던 오래전 기억을 빼면 일상을 공유하지 않는 관계는 부모 자식 간이라 해도 서로에 대해 모르는 관계가 되고 만다. 더러 모른 척하는 것이 편했던 과거에 비해 서로를 모르는 현실은 매우 불편했고 갈등을 유발했고 자주 마음이 상했다. 더 심한 것은 자식의 보살핌에 익숙하지 않은 어머니의 태도였다. 편찮으신 어머니가 오히려 나를 위하려 했고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조심할수록 우리는 더 삐걱거렸다. 시간이 필요했다.
어머니가 입원하고 계신 병원의 식사로 고등어가 나왔을 때였다. 어머니는 자꾸 내게 당신의 몫으로 나온 고등어를 먹으라고 하셨다. 안 먹는다고 했지만 막무가내로 내 밥 위에 고등어를 얹어 놓았다. 조금 짜증이 나기도 하고 실망이 되기도 한 나는 고등어를 못 먹는다고 했더니 어머니는 당신을 위해 양보하는 줄 알고 입에 넣어주려고 하셨다. 고등어의 비린내가 비위를 건드리면서 속이 울렁거렸고 급기야 식사를 중단하고 말았다.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그냥 주면 먹지 뭘 그렇게까지 거부하냐며 서운해하셨다.
먹지 못하는 고등어구이
어머니는 내가 고등어 알레르기가 있어서 먹지 못한다는 걸 모르고 계셨다. 고등어를 먹으면 두드러기가 나고 피부가 붉게 부어 올라 주사를 맞아야 한다니까 매우 놀라셨다. 놀란 건 내 쪽이었다. 어떻게 딸이 고등어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있을까. 서운해하며 말하는 내게 어머니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 미안해. 기억이 안 나. "
"어떻게 기억이 안 나? 어려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고등어 때문인지도 모르고 계속 고등어를 먹어서 결석도 자주 했는데, 엄마가 학교 선생님께 결석계도 써 주셨잖아요."
" 그러게. "
" 좀 서운하네 "
" 미안해. 근데 말이야. 니가 결혼하고 함께 살지 않은 것이 30년이야. 자식이래도 잘 몰라. 내가 아는 너는 어렸을 때의 너라서 잘 몰랐어. 자식인데 자식이래도 그저 한 사람인 거야. 자식이래도...."
" 그러게. 나도 그러네. 사실은 나도 엄마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
" 나는 니가 니 아부지 닮아서 성격이 급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너는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이야. 니가 밤늦게까지 수업하고 고생한다 생각했는데, 아니야. 넌 열심히 살아온 거야. 너 애썼어. 지금 나는 니가 자랑스러워. 해 준 것도 없는데. "
" 해 준 게 왜 없어요. "
" 에이, 해 준 게 없지. 이렇게 아파서 너 귀찮게 하고. 근데 똑똑하게 애들 잘 키우고 살림 잘하고. 생각 똑바르고. 고마워. 나는 그렇게 못했을 거야."
'넌 열심히 산 거야.' 라는 어머니 말씀이 화살처럼 꽂혔다. 순간 마음이 뭉클해졌다. 당신이 날 귀찮게 한다는 말에 뭐라 반박하려 했으나 목이 메어 말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니 병원 창 밖으로 차들이 빠르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