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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민 May 18. 2020

이상(異常)의 이상(理想)

에세이#2

 나에겐 하나의 징크스가 있고, 그 징크스는 오늘처럼 이상한 날에야 비로소 일어난다.


 이상한 날이었다. 야간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아침 8시가 되어서야 집에 왔지만, 이상하게 피곤하지 않았다. 이상한 날이었다, 아침마다 과민 대장 증후군으로 밥 먹는 일에 어려움을 겪던 내가 편하게 아침밥을 먹고 소화까지 시킬 수 있었다. 정말 이상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지난달에 친한 언니인 J 언니의 생일이 있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간단한 생일 축하 메시지 정도만 보내고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었다. 물론 선물과 편지는 전해주지 못한 채. 그러다 마침 J 언니가 우리 동네에 왔다는 연락을 받았고, 나는 일전에 사두었던 선물을 주기 위해 밖으로 발걸음을 나섰다. 그런데 왠지, 오늘만은 평소에 걷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 걷고 싶다는 약간의 충동이 들었고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좁은 골목골목을 누비며 걸어갔다.

 걸어가는 길목은 이상했다. 겨울로 인해 나뭇잎 하나 없이 푸석푸석한 느낌으로 죽어있던 나무들은 완연한 봄을 맞이해 초록빛의 나뭇잎을 소생시켰고, 비록 마스크를 썼지만 많은 사람이 그 나무의 냄새를 느끼며 걸었다.


 나무 길을 걸어 다닐 때 즈음, 동네의 작은 벤치를 발견했고 그 위에는 책이 나열되어 있었다. “책 무료 나눔!”이라는 메모와 함께. 마치 큰 서점에서 책을 막 들여와 정리하려고 쌓아둔 것처럼 책은 작가나 출판사 등의 소분류에 연연하지 않은 채 마구잡이에 꽂혀있었고 나는 그 모습이 동네 벤치와, 좁은 길목과 초록빛을 뽐내는 나무들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 책들 사이에는 평소에 눈독 들였던 책이 몇 권 있었고, 난 그 책들을 집어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런 다음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책이 즐비한 벤치 옆에 작은 벤치가 하나 더 있었고 그곳에는 킥보드를 타다가 잠깐 쉬려고 내려 앉아있는, 초등학생 정도로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벤치 위로는 나무가 한 그루 버티고 있었고, 그 나무는 남자아이에게 시원한 그늘을 선물했다. 남자아이는 이미 다 헤져버린 동화책 한 권을 집어 들고 읽고 있었고 그 옆으로 약간의 ─사람 한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있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서서, 하나의 풍경으로 보이는 그 모습을 잠깐 눈에 담았다.


 J 언니에게 선물과 편지를 전해준 후 바로 집으로 향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무료 책 나눔!”이 있었던 길로 갔지만 그 자리에 있던 책들과 “무료 책 나눔!”이 적힌 메모는 누가 다 가져간 것인지, 아니면 아무도 가져가지 않아서 내놨었던 주인이 다 치운 것인지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옆에 앉아있었던 남자아이도.


 나는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잠시, 짧은 시간 동안 여름의 냄새를 맡았다. 초록빛의 나뭇잎 냄새를, 오래되어 누렇게 바랬던 책들의 냄새를, 땀을 흘리며 헤진 동화책을 읽던 남자아이의 냄새를.


 오늘은 정말 이상(異常)한 날이었다. 하루의 시작이 ‘이상(異常)’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이상(理想)적’이었다. 나는 그런 나의 이상(理想)을 하나의 루틴, 나만의 징크스가 아닌가 생각했다.


 나에겐 징크스가 있다. 이상(異常)한 날에 연속으로 이어지는 이상(理想)한 징크스. 오늘은 징크스가 있는 날. 나쁜 징크스가 아닌 좋은 징크스.

 새로운 마음으로 돌아간 길에는 뜻하지 않았던 여름의 냄새와 작은 행복이 있었고, 나는 그 행복을 고작 반나절에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상(異常)한 날, 이상(理想)한 하루. 하루의 시작이 상쾌하면 상쾌함으로 이어져 상쾌함으로 끝나는 징크스.



* 理想 :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완전하다고 여겨지는 상태.

* 異常 : 정상적인 상태와 다름. 의심스럽거나 알 수 없는 데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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