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임울림>
여행을 할 때 그 나라의 땅을 밟는 순간 직관적으로 느껴진다. 바야흐로 2018년 유럽 배낭여행. 센 강에서 맥주를 홀짝이면서 '파리는 굉장히 매혹적이어서 위험한 도시'라고 되뇌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파리를 기억할 때 오래된 연인 같은 감정을 느낀다. 파리에서 오스트리아 빈으로 넘어가기로 돼 있던 날, LCC 부엘링 항공기가 기체결함으로 연착돼 하루를 더 묵었던 일이 생각난다. 샤를드골공항 바로 앞 노보텔에서 맥시멈 40유로짜리 식사를 할 수 있었고, 룸 컨디션은 최고였다. 나는 이 에피소드를 놓고 파리를 비유할 때, 옷소매를 놓지 않는 여인으로 비유하곤 했다.
런던을 비유할 때는, 유년시절 유학을 떠났다 돌아온 베스트 프렌드라고 말한다. 오스트리아 빈은 차가운 얼굴로 손님을 내쫓는 상점 상인, 일주일 내내 비만 오던 로마는 제 고집을 부리느라 흙탕물에서 나뒹구는 우는 어린아이, 포르투는 아기자기한 골동품을 보여주며 따뜻하게 담요를 덮어주는 할아버지.
여행할 때 발 딛는 도시에 대해 직관적으로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다. 모든 것은 튀르키예의 인상을 말하기 위한 밑밥. 지난 PART.1 이야기에서는 최강 빌런 개밥맨에 대해 이야기했다. 추억은 가시가 사라진 장미라고 그랬지. 개밥맨은 나의 무료한, 일상이라는 캔버스 위에 없어선 안될 한 점의 그림처럼 기억된다. 그가 있었기에 누군가에게 튀르키예 이야기를 맛깔나게 해 줄 수 있으니 말이다.
튀르키예가 나와 오래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는 건 확실했다.
첫날, 원래 일정대로라면 이스탄불에서 묵게 돼 있었으나 그날 열린 자전거 대회 때문에 투어버스는 행선지를 거꾸로 돌게 됐다. 도착한 숙소는 마니사의 한 호텔(?)이었는데, 그날 그 호텔에서는 늦은 결혼식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투어팀은 모두 1층 숙소를 배정받았는데 굉장히 습했다. 이유인즉슨 수영장이 가까이 있었고, 정원이 조성돼 있는 탓이었다. 벽지는 곰팡이가 피어있었고, 냉장고는 작동하지 않았다. 새벽까지 스피커에서 퍼지는 둔탁한 베이스 소리, 그리고 이슬람 EDM. 잠을 잘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진드기도 물렸다.
새벽 2시에 선잠을 자다가 차라리 일어나 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씻고 나와 앉아 있는데, 창문너머로 들리는 경전 읊는 소리. 군대 기상나팔보다 싫었다.
하루에 다섯 번, 방송으로 읊는 코란. 땡볕에 쓰는 히잡. 그 억압된 욕망들은 어디로 갈까. 규율이 엄격해지고, 눌려있던 욕망이 과격해진다면? 나는 인간이 가진 가장 큰 능력을 손꼽을 때 개개인이 가진 잠재성과 가능성을 최우선으로 두는데, 이와 같은 강압적인 방식은 집단의 부속물로써 인간을 획일화하는 듯 느껴졌다. 내게 여행이란 여유가 맞물려야 진가를 발휘하는 것인데, 굉장히 답답하게 느꼈다.
4일 차였던가? 숙소 도착 전에 가이드님은 말했다. 메인 스트릿 외에 골목은 우범지대니 들어가지 말라고. 호텔에서 수영을 한창 즐기고 나와서 룸메이트와 맥주 사러 나갔다가, 하필 룸메이트가 골목 편의점을 찍어서 무심코 골목으로 들어갔다. 스산했다. 중학생 정도 되는 아이들에게 맥주를 파는 곳을 물으니, 다짜고짜 한 아이가 자기 손을 잡을 어린아이를 가리키며 입에 음식을 넣는 시늉을 했다. 아마 먹을 것 좀 사게 돈을 달라는 이야기 같았다. 튀르키예가 개발도상국인 것도 처음 알았고, 대학을 나와서 받는 월급이 한화로 약 50만 원 정도라는 것에도 놀랐다. 보편적으로 어느 나라든 비슷하겠지만,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 생소한 풍경들.
물론, 석회붕으로 이루어진 파묵칼레에서 흐르는 물에 발을 담갔던 순간이나 카파도키아에서 탄 열기구 위에서 본 일출은 정말 끝내주게 좋았다. 그리스/로마의 유적들이 남아 있었던 켈수스 도서관 곁에 울창하게 심어진 나무 그늘 아래를 거니던 기억도 참 좋았지.
그러나 좋았다는 말 이외에 어떤 말도 쓸 수 없는 건 세월이 흐른 탓일까? 아니면 그 정도로 인상에 남지 못한 탓일까. 아니면 내게도 여행의 스타일이라는 게 생겨버린 걸까? 여행의 스타일이라는 게 어쩌면 '안정'과 '편의'가 되어버린 걸까? 작년에 갔던 시드니는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만족스러웠는데, 튀르키예에 대해서는 '이번 한 번으로 족하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튀르키예는 내게 두 가지 얼굴을 가진, 강박적인 과학 선생님 정도로 기억될 것 같다.
튀르키예에 다녀온 이후, 나는 어느덧 만성이 되어버린 알레르기를 심하게 앓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허리에 통증주사도 맞게 됐다. 한동안 잠 못 드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 내가 내 나이로 삶을 산다는 건 불편한 것들을 견뎌내는 것. 젊음은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기에 오히려 아름다운 것. 불안정과 그 떨리는 마음이 아직 내게 남아 있다는 건 무수한 가능성이 내재돼 있다는 말의 동의어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나는 9월에 몽골 고비사막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불편함과 불안정함을 견뎌내는 연습과, 지쳤을 때 불어오는 바람이 내 마음을 움직이는 그 순간을 위해. 자각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는 걸 다시 상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