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보리 Feb 20. 2024

내가 사랑했던 작은 사람들

나는 원래 아이를 예뻐하지는 않는 편이지만, 가끔 어떤 아이들은 예뻐해주고 사랑해주었던 순간들이 있다. 아마도 그 아이의 내면을 보게 되었을 때인 것 같다.


한 사람을 깊이 알게 되면 그 사람의 외모나 성격, 장단점 또는 나와 얼마나 잘 맞는지 따위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 사람을 알게된 깊이만큼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한 아이를 한 사람으로써 알게 되었을 때, 사랑이라는 것이 자라나기 시작하고 지금 위치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마냥 좋은 그런 감정적인 것도 아니고, 그 사람과 평생 적극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그런 거창한 것도 아니다. 그저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잠시 닿았던 인연일지라도 그 순간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고, 더 성실히 좋아하고, 응원해주고, 마음을 나누는 그런 것이다. 혹 시간이 지나 각자의 삶을 사느라 만나지 못할 때에도 한때 우리가 나눴던 마음들이 떠오를 때마다 멀리서 응원하고 그리워하게 되는. 그런 것이다. 어쩌면 어린왕자에 나오는 '길들이기'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랑으로 시작하여 그리움으로 남는 그런 것.


그런 의미에서, 내가 사랑했던 아주 작은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아이가 있는데, 교회학교 초등부에서 만난 그 아이는 장난꾸러기인데다가 선생님들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남자아이였다. 선생님들은 그 아이를 감당하기 힘들어 했고, 피하고 싶어 했다. 그 아이가 5학년이 되던 해에 나는 그 아이가 있는 반의 담당교사가 되었다.


우연은 아니었다. 멀리서 지켜보면서 늘 대화해 보고 싶었고, 그 아이의 선생님이 되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과연 이 아이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어줄 수 있을까 용기가 나지 않아 머뭇거리던 참에,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 마음을 모르는 선생님들은 나를 걱정했지만 사실 걱정이 되면서도 기대했던 일이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첫 분반수업 날, 그 아이에게서 편지 한 장을 받았다. A4용지를 정성스럽게 접어 만든 그 편지를 펼쳐보고 깜짝 놀랐다. 그 아이도 내가 선생님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조금은 삐뚤지만 단정하게 적혀있는 '왠지 선생님이라면 제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았어요'라는 글씨를 보고 눈물이 났다. 아마 그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된 것이. 편지 한 장으로 그 아이의 내면을 보게 된 것이다.


나는 편지를 읽은 후, 앞으로 교사로써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한 끝에 '하지마', '조용히 해', '가만히 있어' 등등 나를 위한 통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러한 말들은 그 아이가 평소에 수없이 많이 듣는 말들이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우리는 금새 친해졌다. 우리의 편지는 마치 교환일기처럼 서로 답장을 주고 받으며 계속되었다. 수업시간에 함께 장난을 치다가 선생님께 경고를 받기도 했지만, 우리는 그마저도 즐거웠다. 내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하고, 오히려 나보다 아는 것이 많은 그 아이에게 먼저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우리는 친구처럼 진지한 생각들을 나누고, 아이처럼 같이 뛰어 놀기도 하면서 매주 일요일에 서로를 볼때마다 무척 반가워했다.


그렇게 밝고 장난꾸러기였던 아이가 어느 날은 잘못을 해서 다른 선생님께 혼나고 풀이 죽어있길래 가서 조용히 안아주며 위로해주었다. 아이를 혼냈던 선생님이 그 모습을 보고는 다가오더니 "아이가 잘못해서 혼이 난건데, 그렇게 감싸주면 버릇 나빠져요."라고 아이가 보는 앞에서 말하길래 나도 한마디 했다. "잘못해서 혼났고, 벌도 받았잖아요. 그럼 다 끝났으니 이제는 안아줘도 되잖아요." 아이가 잘못을 하고 혼이 났다고 해서 그날 하루종일 눈치를 보며 풀이 죽어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미 벌을 받았다면, 이제는 다시 나가서 뛰어 놀아도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아이를 생각하면서 남자아이를 대하는 방법이나 유대인 교육에 관한 책들을 사서 읽고, 영상을 찾아보며 관심을 갖고 공부를 했다. 비록 일주일에 한 번 보는 사이이지만 아이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올바른 소통을 하고 싶었다. 한 사람의 성장과정에서 정말 중요한 시기에 도움을 주고 싶었고,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또 언젠가는 엄마가 될 나에게도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노력과 진심은 아이에게 닿은 듯 했다.


그로부터 2년 후 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고 결혼식 당일에도 아이에게서 색종이를 꾸며 만든 편지를 받았다. 이보다 더 큰 감동은 우리의 첫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우리는 결혼 후 제주도로 한달살이를 오게 되었고, 많은 고민 끝에 이주를 결심하고 집을 구하게 되었다. 결혼을 하자 마자 곧바로 제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다. 그 아이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고, 우리는 서로의 기억 속에만 추억으로 남은 듯 했다. 그런데 첫번째 결혼기념일 날, 아이에게 문자가 온 것이다.


"선생님, 저 ㅇㅇ이에요. 결혼기념일 축하드려요."


그 문자를 받고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나를 잊은 줄 알았는데, 그보다 우리의 결혼기념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 큰 감동을 받아서 믿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 이 문자 한 통은 나에게 자랑거리였다. 아니, 여전히 너무 뿌듯하고 자랑스러워서 지금 이렇게 글로써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 후로도 가끔 카톡이나 문자로 짧은 안부를 주고 받았다.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었던 처음 그 순간부터, 여전히 나를 기억해주는 그 아이에게 너무 고마웠다.


교회학교에서 교사로써의 짧은 경험이 나의 인생에 소중한 한 페이지를 차지할 만큼 아주 큰 의미가 되었다.특히 그 아이의 교사로써 함께 했던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그 아이를 통해, 그리고 그 아이에게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 아이를 아이답게 대하고 동시에 개인의 인격체로써 존중해준다. 아이를 아이답게 대한다는 것은 '아직 아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좀 더 마음을 열고 하나씩 천천히 알려주는 것이다.

- 나의 순간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아이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을 고민해본다. 이것이 혼낼 일인지, 알려주어야 하는 일인지를 구분해야한다.

- 아이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을 먼저 물어봐준다. 아이가 좋아하는 주제의 이야기를 꺼내고, 아이가 자랑하고 싶어 한다면 즐겁게 자랑할 수 있도록 오히려 먼저 물어봐주었다.

- 대화할 때 정답을 알려주기 보다는 생각을 묻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도와준다. 그래서 나는 늘 무언가를 일방적으로 가르쳐주지 않고, 오히려 질문을 던져서 스스로 생각해보고 자신만의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했다.

- 나의 계획과는 다른 행동을 하더라도 자유롭게 지금 하고 싶은 것과 이 순간의 행복을 느끼도록 해준다. 아이에게는 지금 배움보다는 사랑이 필요하다.

- 나를 위한 통제와 강요는 하지 않아야겠다. 내가 무언가 통제하려 할 때마다 이것이 아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편하기 위해 하는 것인지 생각해본다.

- 진심으로 대하고, 귀기울여 들어준다. 아이도 이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대하는지, 내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은 어른인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한다.


요즘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보니, 그냥 자연스레 그때 그 아이가 떠올랐다. 그 아이와 나누었던 마음과, 그로 인해 내가 변하고 깨닫게 된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는 우리 사랑의 결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