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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Jan 04. 2021

니체의 눈으로 보라. 21.

20. 일상

어젯밤 또 누군가와 혁명에 대해 이야기 했다. 나는, 당신들이 더 큰 노력을 했었더라도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었다고, 혁명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그를 비판했다. 내가 그런 혁명의 전선에 젊음을 바치지 않은 것은, 물론 비겁하기도 했지만, 함부로 희망을 갖지 않아서였다. 선(善)은 순간이고, 악(惡)은 영원이라는 시간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 당신들이 오직 마르크스-레닌을 외칠 때, 또 다른 당신들이 오직 예수를 외칠 때, 아무리 숭고하고 위대한 인류 해방의 역사가 달성되어도 그 순간만 지나면 삶은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고 역사를 통해 익히 봐왔기 때문이었다. 그들 덕에 세상이 많이 바뀐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그들 때문에 세상이 더 나빠진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우리는 지금 혁명을 이룰 수 없는 세상에 있다는 것이다. 혁명이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혁명이 이루어낸 목적은 시간이 가면서 다시 퇴락하고 새로워진 그것과 또 싸우는 투쟁은 다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영원히 이어지는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일상 안에 안주하게 되고 그러면서 근면과 권태라는 모순된 상태들이 다시 뒤섞여 또 일상을 새롭게 구조화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는 이러한 목표의 달성과 퇴락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진 구조 속에서 일상은 새로운 지배 관계로 연결된다는 사실에 있다. 전통 사회에서의 지배가 신분이나 생산의 착취와 같은 구체적인 관계로 이어진 것이라면, 현대 사회의 지배는 국가나 자본이 만들어낸 근면 속의 권태라는 일상의 지배에 연결된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생존을 위한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일단은 벗어나 있어서 그 지배자들이 제공하는 일상의 틀 안에서 사육된다. 평균과 획일이 주는 일상의 권태로부터 벗어나 니체가 말하는 고통을 스스로 창출해 맞닥뜨릴 생각을 하지 못한다. 니체가 말하는 낙타의 단계에 머무르면서 사자되기를 포기하는 것인데, 그게 근면과 권태의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속에서 힘으로 여는 미래를 기다리고 그것을 당겨오는 위버멘쉬를 만나기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미래를 당겨 오는 것은 끊임없는 현 질서에 대한 물음과 시도 속에서만 성립 가능하다. 묻고 시도하는 것을 반복하는 속에서 니체와 그 이후 많은 실존주의자들의 공통된 행위인 기다림이 나온다. 기다림과 상관없이 오는 것은 미래의 도래가 아니라 과거의 관성일 뿐이다. 그러니 그것은 사건의 발발이 아니고, 일상의 지속이다. 그래서 기다림이란 실천하는 것이고, 도래함을 맞으러 나가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는 그래서 기다려야 할 대상이 아니고 기다리면서 만들어가야 할 존재다. 그러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니체는 그것을 단번에, 성급하고 폭력적으로 성취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사소하고 작은 문제들을 무시하고 큰 것만 해결하는 지름길을 추구하는데, 그래서는 지속성이 없고, 그 지속성이 없이는 기다려 만들어갈 수 없다. 아무리 큰 혁명이라도 일상과 그 토대가 되는 근본을 바꾸지 않으면 다시 옛 상태로 되돌아가버린다. 한 번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기독교의 원리나 한 번 도를 깨우치면 더 이상 수행을 할 것이 없다는 불교의 돈오돈수와 같은 것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은 둘로 나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명이란 피투성이로 만든 임시 치료일 뿐이다.      


늘 그렇듯, 어제 무슨 엄청난 일이 일어났을지라도, 예수를 그리스도 주(主)로 영접해서 구원을 받았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얻었든, 남북통일을 이루었든, 오늘 시작하는 것은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고 일을 하러 가는 그저 그런 하루일뿐이다. 그런 하루를 맞이하기 위해 당신은 주어진 틀에 맞춰 근면으로 순종했고, 그것이 반복되면서 결국 권태로 이어진다. 그 속에서 벗어나 미래의 시간으로 탈주하지 않으면 결국 습관이 되고, 전통이 되며 그 니체가 비판한 틀 속에 갇히게 된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롭게 보고, 새롭게 느끼고,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부단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니체가 추구하는 관계 속에서 역동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상은 팽개치고 오로지 큰 진리 내지 정의 같은 것만을 만들어내려고만 한다. 그런데 사실 큰 것이란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끼리 쌓은 단일한 목적의 탑일 뿐이다. 그런 목적의 달성으로는 겉만 변할 뿐이다. 그리고 그 큰 구조 안에서 하나로 규정된 선입견들이 만들어지고, 그렇게 이루어진 혁명은 잘못되어가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속임수를 강화한다. 속임수는 항상 진리로 수렴된다. 혁명 안에서 근본적인 변화란 있을 수 없다. 이런 일은 오랜 인류의 역사에서 수없이 도돌이표로 반복되어 왔기 때문에 알 수 있다. 그러니 혁명 후 보여주는 그 이상은 니체의 말대로 우상인 것이고, 그것은 결국 속임수로 귀결될 뿐이다. 문제는 혁명이 인민을 속였는가, 인민이 스스로 혁명을 만들어 속았는가, 아닌가? 그 혁명이란 ‘가능성을 남기며 시간을 지연한 것’일 뿐이고, 그래서 혁명은 종교일 뿐이고, 결국 혁명은 아편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 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은 대의를 위한 희생대신 스스로의 변화를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싸움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에 의해 바보로 취급당해도 그 길을 가는 것이 옳다. 그것이 일상을 이기는 유일한 혁명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부분도 보지만 그것보다는 좀 더 큰 전체를 보기를 더 좋아한다. 미시보다는 거시를 분석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작은 흐름보다는 큰 구조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구조와 거시란 뭔가를 지향하는 전체성을 담보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체성이라는 게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것인가? 이런 의문들이 시나브로 모이면서 현대인은 이제 용기를 내어 자신이 전체와 다르다는 부분을 말하기 시작한다. 그 어떤 일이 벌어져도 어떤 전체성을 통째로 바꾸는 변혁 혹은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혹은 개인과 미시와 일상이 바뀌지 않는 한, ‘나’ 자신이 바뀌어 미래를 향해 싸우면서 나아가지 않는다면 세계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기 시작한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배경은 이쯤이다.      


"시도와 물음, 그것이 나의 모든 행로였다. 그리고 참으로 사람들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이것이 나의 미감이다. 그것은 좋은 미감도 나쁜 미감도 아니며, 내가 부끄러워하지도 숨기지도 않는 나의 미감이다. “이것이 지금 나의 길이다. 그대들의 길은 어디 있는가?”라고 나는 나에게 길을 물은 자들에게 대답했다. 말하자면 모두가 가야 할 그런 길을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력의 영(靈)에 대하여.

세상 그리 쉽고, 편하게

가는 길이 그리 분명하게

사는 삶도 있다고들 하드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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