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원인
‘사회과학’이라는 개념이 있다. 근대에 생긴 개념인데, 현재로서는 이 세계의 압도적인 지배 담론의 위치에 올랐다. 사회를 과학으로 본다는 것인데, 어떻게 사람이 사는 세상을 과학으로 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처음 그 생각을 한 사람들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도 생물처럼 시간이 지나가면 늙고, 환경에 따라 진화하듯 변한다, 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생물을 다루듯, 사회 또한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검증하고 실험을 해 데이터로 만들고 통계로 처리하여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평균’이나 ‘다수’라는 개념이 생겼고 ‘발전’이나 ‘쇠퇴’라는 말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람 사는 사회에서 일어난 여러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을 하는데 특히 그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분석하는 일이 잦아졌다. 심지어는 사회과학의 직계가 아닌 역사학에서도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과학적 역사관이 그 영향력을 키우면서 어떤 역사적 현상에 대한 인과 관계를 분석하는 것을 필수 작업으로 간주하였다. 그 안에서 생산과 소유의 단일 요소에 따라 칼로 무 자르듯 명쾌하게 역사를 분석하는 일이 대세를 이루곤 했다. 그런데 과연 역사가 그렇게 인과 관계가 명쾌하게 들어나도록 분석이 가능하던가? 어린 아이에게 물어봐도 누구든 알 수 있을 정도의 물음을 역사학자들이 갖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그것을 허물어버리면 역사학이라는 학문 그 자체가 허물어져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니체는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과학에 의한 인과의 분석은 세계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라고 하면서, 과학은 단지 세계를 표상 가능하게 만들 뿐이라고 했다. 즉 물리적 힘은 기술이고 해석이지 어떤 현상이 생기게 되는 궁극적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과학적으로 만유인력의 존재를 증명한다면, 그와 비슷한 개념으로 모든 현상의 주체로서 어떤 근본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것도 없는 일 아닐까? 기독교에서는 그 근본적 원인을 ‘말씀’(로고스)으로 보았고, 불교에서는 그것을 유정(有情)으로 보았다. 이와 비슷한 차원으로 니체는 그것을 ‘힘’으로 본 것이다.
니체는 인력이든 척력이든 그런 힘들은 현상이고 작용이며 파생물이지, 그것이 어떤 현상을 독립적으로 있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우리가 보는 현상들의 궁극적 원인은 어떤 사건이 내부에서 발생한 징후로 나타나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 힘에 대한 의지가 없으면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 눈에는 변화처럼 보이는 것이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이 제 아무리 많이 일어나도 결국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안에서 이 세계를 운영하는 어떤 법칙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 안에 우연의 요소가 작동하는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고, 그 ‘힘’이라는 것이 방향이나 정도가 일정하지도 않은데다가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그러니 사회과학자 마르크스가 말하는 법칙이라는 것은 고려해 볼 여지가 전혀 없이 철저히 부정 당한다. 니체가 바라본 힘에의 의지로서의 이 세계에는 그래서 일목요연하게 운항하는 질서라는 게 없고, 다양한 힘이 전개되고 분화되어 나가면서 끊임없이 생멸이 반복되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자. 그 모든 일들이 어떤 원인과 결과가 필연적으로 상통하는 차원에서 일어났던가? 아니면 자신이 비록 파악하지 못하는 어떤 우연이라는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였던가? 후자를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학문하는 사람들은 후자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학문이라는 것 자체가 전자 즉 과학성이라는 근대성을 전제로 하여 성립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내가 대학교수로 부산에 있는 한 작은 대학에서 있게 된 것은 우연의 요소가 많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감사하지도 않지만, 불만도 하지 않는다. 내가 관여할 수 없었던 영역이니, 그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될 일이다. 우연이 없는 필연의 세계, 결정론으로 분석이 가능한 세계, 그런 세계는 없다. 그런 게 만약 있다면 내가 사는 세계를 나는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예측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다. 다만 그런 것처럼 사회과학이 과거를 법칙적으로 결과를 짜 맞춰 이해할 뿐이다. 그러니, 엄밀히 그런 과거는 실제로 있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니체가 기독교를 강력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원인’이라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과는 달리 불규칙적이고, 체계적이지 않다는, 그래서 그 인과관계가 일목요연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개념이 성립될 수 없다. 우연의 세계는 신의 로고스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세계기 때문이다. 바로 이 반(反) 인과론으로 인해 우리는 신에게 저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못했다. 기독교의 이성 중심의 이분법에 따른 절대 존재로서의 신의 섭리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다시 그 기독교의 계보를 따라 근대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 신은 과학의 논리까지 대동하여 그 절대 권한이 더욱 막강해졌다. 그 아래에서 과학과 이성의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더 막강해진 새로운 신에 종속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원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근대화 되지 못한 혹은 합리적이지 못한 혹은 사회에 속할 수 없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규정되었다. 사람 사는 다양과 이질의 복합적 세계를 배제시키고 죽여 버린 것이다.
기독교가 업그레이드 된 버전인 근대성 안에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고 지구의 주인의 위치에 오른다. 그 안에서 모든 사물의 존재 가치는 인간의 의도나 목적에 따라 결정되고, 그 모든 것들이 움직이는 것은 질서와 체계에 따라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된다. 그것은 신의 뜻이고, 과학이 증명해준다. 그러한 세계관 안에서 인간은 어떤 일에서도 개체로서 존재할 수가 없다. 개별적으로 진리를 파악하려는 것은 광기일 뿐이고, 그 광기는 사회의 질서와 다수의 이익을 위해 격리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불교에서 말하는 인드라망(網) 같은 사고는 찾아 볼 수 없다. 오로지 하나의 눈, 하나의 세계만 존재해야 할 뿐이다.
오히려 한 그루의 나무가 열매를 맺는 필연성으로, 우리의 사상과 가치, 우리의 긍정과 부정, 가정(假定)과 의문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 모두 서로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하나의 의지, 하나의 건강, 하나의 토양, 하나의 태양을 증언하고 있다. ― 이러한 우리의 열매들이 그대들의 입맛에 맞을는지? ― 그러나 이것이 나무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우리와, 우리 철학자들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도덕의 계보》 서문 2.
무엇에 갇혀 있는가?
무엇에 압도당하는가?
그 원(原)은 무엇이고 인(因)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