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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Jan 07. 2021

니체의 눈으로 보라. 26.

25. 위계

인도의 카스트 사회를 분석한 프랑스 사회학자 루이 뒤몽Louis Dumont의 Homo이 쓴  Hierarchichus 《위계인》를 보면 인도인은 유럽에서의 사회 계급이나 계층 차원이 아니고 기본적으로 인간 속성으로서 위계적 본능을 지녔다고 한다. 그것이 카스트 체계로 나타난 것이라는 말인데, 우주 만물 모든 것을 사중 위계로 분류하는 사고 체계를 뼛속 깊이 갖는 인도의 카스트 사회 문화에 대한 분석으로, 역사적 관점으로 시대 변화를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고 주로 경전을 놓고 정태적인 분석을 하였지만, 이 분야에서 가장 널리 인정받는 저술 가운데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본능으로서의 위계, 이것이 인도 사회에서만 나타나는 특장점인지 인류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특장점인지에 대해서는 나는 잘 모른다. 다만, 니체는 이에 대해 위대한 정치가 지상에서 이루어질 때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위계질서가 그것도 엄청나게 긴 사다리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예의 정신적 차원에서의 위계로 해석해야 옳은지 실질적인 반(反)민주적인 사회적 질서를 인정하는 위계인지도 난, 잘 모른다. 다만,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니체는 철학자로서 그 분야에 대해 하는 말은 귀담아 들어야 하겠지만, 그것을 사회 체계로 구체화 시키는 데는 전문가가 아니니, 구체적인 사회 현상에 관한 주장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니체가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우와 열이 있음을 인정하는 니체의 입장에 동의한다. 단, 비정치사회적 의미로서만 받아들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위계질서가 세워진 이후에만 행복할 수 있다는 등 그가 남긴 반(反)민주제에 해당하는 말들을 난, 모두 정신적 위계질서에 관한 언명으로 해석한다.       


니체가 의미 하는 바 ‘카스트’는 단순히 태어날 때부터 출신에 따라 이루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개체가 입증하는 여러 가지 능력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누구나 다 알 듯, 인도에는 카스트가 있고, 그 카스트 체계는 다른 나라에서와는 달리 아직도 없어지지 않은 채 여전히 주요 사회 체계로 기능하고 있다. 다만 헌법에 의거하여 불가촉천민과 카스트로 인한 차별만 금지되어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붓다와 간디는 카스트 그 자체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혈통으로 내려오는 그 카스트가 바람직하지 못하고, 그것으로 남을 차별한 것이 문제지, 누가 얼마나 바른 생각을 하고, 얼마나 바른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고, 그렇더라도 그 사람들은 사회에서 계급으로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를 말하였을 뿐이다. 붓다는 그 카스트가 첨예하게 갈리고 그 위에서 높은 카스트가 낮은 카스트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사회 밖에 세상을 버리고 나온 사람들을 모아 느슨한 공동체를 만들었다. 거기는 카스트 구별과 차별이 없는 사회다. 간디도 비슷하다. 현실에서 카스트 간의 지배와 착취 관계를 버리고 신화에 나오는 서로 다른 카스트가 존중하고 화합하는 이상 사회를 향해 가자고 했다.      


이 둘이 추구하는 사회는, 둘 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분명히 현대의 민주제 체제와 비슷하다. 그들을 인간 사이의 차별을 묵인하고 조장하는 반민주 봉건주의자로 폄훼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니체의 민주제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가는 사회는 인간 개체의 독립성을 해치는 것이고 그것은 어떤 신화와 이념에 종속되는 것이라고 봤다. 그것은 사회 제도에 관한 언설이 아니다. 인간 계발에 관한 것이다. 분명하게 말하자. 인간에게 차이는 있다. 주어진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자기 자신을 계발하여, 어떤 능력을 만들어, 어떤 미래를 만들어 가는지에 대한 차이는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고 나를 봉건주의자나 반민주제 옹호자라고 비판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      


그러니 결국 니체에게서 위계란 정신적 위계다. 그가 자주 쓴 노예, 귀족, 주인 등과 같은 용어 또한 정신에 관한 것이지 사회나 정치에 관한 의미는 아니다. 그는 주인이 될 수 있는 자격으로 오로지 정신력과 그것의 실천을 말했다. 거기에 정신의 힘이란 가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구분조차도 가변적이라고 했다. 주인 의식을 가지고 주인적인 삶을 살면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철저히 철학적인 언명일 뿐이다. 그러니 니체의 위계에 대한 이해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오로지 개체로서 자기 자신이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니체에 의하면 이 본질적인 인간 능력의 차이가 기독교의 ‘신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개념 때문에 병약해지고, 그 후 평균적인 어떤 종으로 사육되었다는 것이다. 즉 각자의 능력으로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데, 그것을 어떤 대의명분과 도덕에 의해 억지로 같아지게 만들었으니, 그 기독교에 의해 인간 고유 본성인 ‘힘’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 안에서 사랑과 희생을 베푼 사람들은 그런 평균화의 체계를 더욱 굳힌 그래서 인간의 ‘위계’의 힘을 약화시키는 잘못된 사람이다. 그 소위 평등주의자들은 인간 본능에 의한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고 존재할 수 없는 환상을 사람들에게 주입함으로써 시민을 대중이라는 카테고리로 하향 우민화 시킨다는 것이다. 민주제가 그런 시스템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니체가 정신적인 문제를 말하고자 하면서 꾸준히 사회정치 제도에 대해 언급을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역시 철학자 니체답게 사회 시스템을 비롯한 모든 사회적인 문제는 궁극적으로 철학의 문제라고 본 것이다. 그가 바란 것은 서로 다른 유형들이 공존하는 사회의 전체적인 고양이다. 그런데 그 사회의 고양에서 어떤 가치를 결정하고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일에 뛰어난 소수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과 서로 다른 유형들이 전체적인 유기성 속에서 본질적으로, 마치 자연에서 나타나듯,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을 때 사회가 더 건강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그러니 ‘소수’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를 반(反)민주제 옹호자로 비판하는 것은 사실 억설이다. 전체가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 하고 그 과정에서 소수가 이끌어나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 건강한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실이다. 그것은 분명 민주제와 모순되지 않는다. 니체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니체는 위대함을 긍정했지만, 그것을 숭배하지는 않았다. 사랑은 하되 맹목적인 사랑은 하지 않는다, 라는 말로 바꿔 보면 훨씬 더 현실적 차원에서 그의 ‘위계’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현실 세계에서 위대한 정치 사회 문화적 지도자를 바라고, 그를 존경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를 숭배하는 것은 아니다. 니체가 말하는 바를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그의 혈통과 환경, 신분과 지위 또는 지배적인 시대의 견해를 근거로 그에게서 예상할 수 있는 것과 다르게 사유하는 사람의 정신을 자유정신이라고 부른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25.

평등한 세상은

자연에 있고,

자연은 원(圓)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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