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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Jan 09. 2021

니체의 눈으로 보라. 31.

30. 전쟁

몇 년 전, 정확하게 말해, ‘미투’로 인해 강단이 무서워지기 전까지는, 해마다 신입생들에게, “엄마와 불화하라”고 가르치곤 했다. 물론, 물리적인 불화나 불효가 아니고, 정신적으로 독립해라는 말뜻임을 충분히 설명을 한다. 엄마는 엄마 세대의 사고방식으로 살아 온 전통의 산물인데, 너희들은 그 시대와 다른 새로운 판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충분히 한다. 공부도 중요하고, 4년제 대학 졸업장도 중요하지만, 그것조차도 스스로 그 필요성을 인정할 때 전력을 다하는 것이지, 본인의 뜻이 다르면, 그것을 관철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 책임은 너희들이 져야 하고, 그 결실도 너희들의 것이라고 한다. 그러려면 판에 박힌 삶보다 기존의 삶에 저항하고, 그 위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러 나아가는데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모두 니체로부터 배운 것이다.     


니체는 생의 철학자이고, 그 삶을 위해 ‘긍정’을 제1의 태도로 삼는 철학자다.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철학자다. 그렇게 사는 과정 중에 피할 수 없는 것이 전쟁이라 했다. 심지어는 노동보다 전쟁을 선호한다고 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노동하는 것은 하지 말고, 삶을 즐기는 놀이로 삼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신분, 종족, 직업, 교육 등에서 펼쳐지는 모든 종류의 불합리한 요소들과 전쟁을 감행한다. 실로 고단한 일이지만, 지치지 않고 몰아붙인다. 그 전쟁을 통해 삶의 질이 올라가느냐, 떨어지느냐가 결정 된다고 했다.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한 데서 필요한 모든 장애물들을 처치하기 위해 처절한 복수를 하라고 했다. 그 수단으로 정직하거나, 바르거나, 타의 모범이 되는 삶의 태도를 버리라 했다. 양심의 가책 같은 것도 전혀 개의치 마라고 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소산이 아니고 위로부터 내려온 전통이 짠 무의미한 틀에 의한 나와는 관련 없는 객체적인 것이어서 그런 것이니 부인하라고 했다. 니체는 모든 존중되고, 섬기고, 숭배하는 것들이 내리는 명령에 절대로 거역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을 두고 전쟁을 하라고 했다.     


니체가 전쟁을 역설했지만, 그것은 보통 말하는 전쟁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다. 니체 전문가들은 그를 평화주의자로 본다. 그것은 그가 말하는 전쟁이란 것이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국가와 국가 혹은 그와 유사한 차원의 집단들끼리 하는 물리적인 충돌의 의미가 아니고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자주 사용하는 내적 싸움의 비유인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일한 논리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칼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모든 말이든 글이든 생각이든 읽는 사람이 이해하는 방식의 해석이 있는 반면,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그 뜻대로 보여주는 해석도 있다. 니체나 예수가 말하는 ‘전쟁’은 후자의 방식으로 읽어야 함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니체가 말하는 ‘전쟁’의 의미를 이렇듯 개인의 내적 문제로 국한하지 않고, 그 일차적 의미인 국가와 국가 간의 물리적 싸움의 차원으로 가져가서도 그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후자인 ‘화약 냄새 나는 전쟁’을 니체는 저급한 전재이라 했고, 여러 가치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향기 나는 전쟁’이 고급스러운 전쟁이라고 했다. 그 어떤 형태의 전쟁이라도, 적극적으로 그것을 치러야 하는 이유는 낡은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찾아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힌두교에서 최고의 주(主) 쉬바가 파괴의 역할과 생산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신이라는 것, 즉 파괴가 생산이고, 생산이 곧 파괴라는 것을 자기 철학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러면 니체는 어떻게 전쟁을 치러야 승리한다고 하는가? 우선 그는 명분을 앞세우지 마라고 한다. 흔히 정치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명분이라는 것이 전쟁을 신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잘 싸우는 전쟁이 모든 명분을 신성하게 만든다고 했다. 제대로 싸워서 이기는 전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전쟁은 어떤 전쟁인가? 자기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삶을 사랑해야 자신을 둘러싸는 모든 틀을 깨부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싸우라 했는가? 죽여 없애야 하는 그 어떤 상대를 정하고, 지하로, 땅속으로 즉 그 근본까지 파고 들어가 그 뿌리 채 흔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내적 사유의 전쟁이니, 바로 거짓과 우상과의 전쟁이다. 그 점에서 바로 사람들은 니체를 망치를 들고 우상을 깨는 혹은 다이너마이트 철학자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적 사유의 전쟁을 니체가 제시하는 철학적 관점에서 해석해 보자. 그것은 우선 선(先)판단에 따르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독립하는 개별적 판단을 수행하라는 것이다. 건축물로 치면 개별 건축물이 아니라 그 건축물이 세워진 공통의 지반에 대한 비판을 먼저 가하라는 것이다. 니체는 이런 전쟁을 가치의 가치를 묻는 것이라 했다. 그러니 니체가 하고자 한 것은 기독교 같은 종교를 단순히 데카르트 이후 근대성에서 크게 가치를 부여 받은 이성이나 생각 혹은 의심이나 합리 등은 물론이고 체계나 구조 혹은 법 같은 것 등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토대의 토대, 그 토대의 토대를 흔들어야 하는데, 지평만 흔든 경우를 아주 못마땅해 했다.      


니체는 그 좋은 예를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찾았다. 니체가 보기에 루터는 교황과 그 하수들에 의해 왜곡된 기독교를 개혁해 순수성을 찾아 개인에게 귀속하고자 하였을 뿐, 종교의 근본을 뿌리 채 흔들고자 하지는 않았다. 기독교의 진리 자체에 전쟁을 거는 것 대신 교회가 가진 권력에 대해 전쟁을 걸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배 체제를 흔들기 위해 농민들을 동원하였고, 그것은 결국 개신교라는 새로운 종교 권력을 만들어냈다는 지적이다. 이를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루터는 기독교라는 괴물을 보기 위해 심연을 들여다보다가 자기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기독교의 지하의 지하를 깊게 살펴보지 못하고 어설픈 전쟁을 걸어 어설프게 이겼기 때문에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대들은 자신의 적을 찾아내어 자신의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그대들의 사상을 위해! 그리고 그대들의 사상이 패배할지라도 그대들의 정직함만은 패배를 넘어 승리를 외쳐야 한다! 그대들은 평화를 사랑하되, 새로운 전쟁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오랜 평화보다는 잠시 동안의 평화를 택해야 한다. 그대들에게 나는 노동이 아닌 투쟁을, 평화가 아닌 승리를 권한다. 그대들의 노동이 투쟁이고 그대들의 평화가 승리이기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과 전사들에 대하여



갇혀 있는가? 전쟁을 벌이라.

죽었는가? 전쟁을 벌이라.

전쟁하지 않고 어떻게 자유와 삶을 얻으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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