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멜 혜은 Jan 19. 2022

네 돈의 정체를 남편에게도 알리지 마라

가난한 신혼부부 코스프레


 다른 사람의 조언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무엇보다 내가 중심이 서야 한다. 스스로 중심을 잡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조언도 잡음일 뿐이다. 내 결정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2009년 9월, 엄마가 돌아가셨다. 내 결혼식을 불과 10개월 남짓 앞둔 시점이었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죽음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잘할 수 있을까? 나 혼자?

몇 번이고 스스로 물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이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유산상속 절차를 모두 마친 어느 날, 언니와 오빠가 나를 붙잡고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잘 들어. 지금 네가 상속받은 유산은 결혼과 아무 상관없어. 네 남편 될 사람에게 유산의 존재에 대해 알릴 의무는 없어. 이건 네 돈이야. 네 이름으로 네가 관리해, "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너도 돈이 필요한 순간이 올 거야. 그때를 위해서 이 돈은 비밀로 남겨둬."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이 돈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래! 유산의 사용처는 '지금' 이 아닌 '미래'에 고민하자.'

이렇게 결정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이는 진짜 결정이 아니었다. 단지 결정을 미루는 결정을 했을 뿐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마음먹었기에 나는 '네 돈의 정체를 남편에게도 알라지 말라'는 언니 오빠의 미션을 충실히 따를 수 있었다.









내가 믿는 것이 '진짜'가 된다



거짓말을 하면 단박에 들켜버리는 내가 5년 가까이 남편을 속일 수 있었던 것은, 유산을 정말로 '없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이 돈은 없는 돈이야.

너무 빨리 내게 온 거야.

지금 이 돈에 의지해서는 안 돼.'


혹여 잊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주문을 외웠다. '없다'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없는 것이 된다.


 결혼 전, 나는 사치의 여왕이었다. 명품이 아니면 거들떠보지 않았고, 무조건 최고급 브랜드의 옷만 입었다. 돈은 내게 단순히 소비를 위한 도구였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람은 과거 자신의 모습에서 현재를 추측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과거에 돈을 물 쓰듯 썼으니 앞으로도 그럴 거야.'라고 나는 나 자신에게 꼬리표를 붙였다. 스스로 돈을 관리할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대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단정적인 말로 나를 표현하는 것은 내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나는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한 셈이었다.



'나는 유산을 지킬 능력이 없어.'

'돈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속받은 유상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리는 일 뿐이야.'

 이 말을 수도 없이 자신에게 주입했다. 덕분에 나를 속이고, 남편을 속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믿음은 우리 부부가 충분히 쓸 수 있는 범위의 소비조차 할 수 없게 나를 조이고 억압했다.


 문제는 신혼집을 구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첫 단추를 완전히 잘못 끼운 셈이었다. 춘천에서 오랫동안 공직 생황을 해 오신 시아버지는 서울의 집값을 보고 깜짝 놀라셨다. 남편은 결혼 전 보증금 5,000만 원짜리 작은 원룸에 살고 있었는데, 여기에 2,000만 원을 더해 신혼집 비용으로 마련해주셨다. 당시 7,000만 원이면 춘천을 기준으로 20평대 아파트를 사는 것도 가능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오래된 구축 아파트 전세도 구하기 어려웠다.

 나는 시댁에서 마련해주신 7,000만 원에 2,000만 원을 보태기로 마음먹었다. 실제로는 유산으로 받은 6억 원이 있었는데도 겨우 9,000만 원에 맞춰 신혼집을 구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남편과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지역에서는 우리 예산에 맞는 전셋집을 찾기가 무척 힘들었다. 예산에 맞추다 보니 점점 변두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오래된 아파트 혹은 골목 안의 빌라나 다세대쯤이 우리가 구할 수 있는 한계였다.



 부동산 문턱을 처음으로 넘어본 우리 부부에게 신혼집 구하는 과정은 돈의 위력을 실감한 첫 경험이었다. 예산에 맞는 집을 확일 할 때면 우리 능력을 확인하는 것 같아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가진 돈의 액수가 곧 나의 능력이구나.'

위축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유산을 털어 집을 사는데 쓰고 싶지 않았다. 대출이라는 제도를 활용할 수 있었지만 우리 부부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첫째,  나는 굳이 대출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돈이 있는데 왜 대출을 받아.'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자를 내면서까지 '남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둘째,  2010년 내가 결혼할 당시, 하우스푸어라는 말이 유행했다. 대출을 받으면 하우스 푸어로 전락해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막연한 두려움은 말 그대로 근거 없는 두려움이었다. 우리와 전혀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을 비교대상으로 삼았으니 기준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 당시 나는 우리의 거주비용을 객관적으로 따져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최소한 이 정도 질문은 해봤어야 했다.


-우리 부부의 소득으로 받을 수 있는 대출 한도는 얼마인가?
-최대 대출 한도에서 상환 가능 금액은 얼마인가?
-대출 이자는 얼마인가? 대출을 받고 집을 사는 것이 이득인가? 대출 없이 전세로 사는 것이 유리한가? 아니면 월세는 어떤가?

사실, 이런 계산 없이도 우리가 대출을 상환하지 못해 하우스 푸어가 될 확률은 제로였다. (상속받은 유산이 있었으니까) 몇 가지 질문만 던졌어도 내가 가지고 있던 대출에 대한 두려움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계산을 하지 못했다.






가난한 신혼부부 코스프레


 신혼집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껏 흥분된 목소리였다.

"분당에 우리 예산에 맞는 집이 있대."

"정말? 말도 안 돼, 정말 분당에 있다고?"

분당이라면 나도 한 번쯤 살아보고 싶었던 동네였다.


"정말 있다니까, 디자인 팀 Y 있지? 지금 분당에 사는데, 이번에 8,000만 원에 전세 계약을 했대."

"알았어, 오늘 당장 가볼게."

포털 사이트에서 매물을 확인하고 부동산 사무실과 약속을 잡았다. 정말 우리 예산에 맞는 집이 있었다. 방 하나에 거실 하나뿐인 작은 아파트였지만 우리에게는 감지덕지였다.  게다가 광역버스 노선이 잘 발달한 분당은 강남으로 출퇴근하는 우리 부부에게 안성맞춤인 곳이 아닌가?

 퇴근과 동시에 분당으로 달려가 전세 계약을 하고 돌아왔다. 그토록 고민하던 신혼집 문제가 비교적 쉽게 해결된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아무 연고도 없는 분당에서 첫 살림살이를 시작했다.




 지은 지 20년이 훌쩍 지난 18평짜리 아파트, 방 하나, 현관과 거실을 잇는 아담한 주방이 전부인 작은 집이었지만 그간 우리가 봐왔던 집들이 서울 변두리의 낡은 빌라였으니 아파트에서 신혼을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뻤다.

당시 같은 아파트 동일한 구조의 집을 더 구경했는데, 모든 집이 거실을 침실로, 작은 방을 옷방으로 쓰고 있었다. (방 하나는 너무 작아 다들 '방'으로 쓰기를 포기한 듯했다.)

나는 거실과 침실은 구분하고 싶었다. 집이 작을수록 공간의 구획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빨리 잠자리에 들기를 원하고, 또 누군가는 게임이나 TV 시청을 좀 더 하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 방은 포기한다면 이 모든 것을 '함께' 해야 한다. 아무리 신혼이지만 끔찍했다.


 '무조건 거실과 작은 방 모두 확보하리라!'

작지만 큰 목표가 생겼다. 목표가 생기니 행동의 방향이 정해졌다. 포기할 것과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구분되었다. 나는 침실을 확보하기 위해 가구의 디자인은 포기했다. 무조건 집의 크기에 맞춰 가구를 맞췄다. 브랜드고 색상이고 디자인이고 모두 후순위로 밀려났다. 오직 사이즈와 용도만이 가구를 고르는 첫 번째 기준이었다.

 나는 눈에 불을 켜고 우리 집 크기에 꼭 맞는 가구들을 찾기 시작했다. 집의 도면과 필요한 가구들을 같은 비율로 축소해 그린 다음,  도면 위에 색종이로 자른 가전과 가구들을 이리저리 시뮬레이션하며 집의 레이아웃을 잡아갔다. 비록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내가 원하는 용도와 우리 집에 꼭 맞는 크기의 가구를 발견할 때면 희영을 느꼈다. 마치 테트리스 게임하듯이 공간을 채워나갔다.

 이때 처음으로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선택하는 연습을 했다. 그전까지 나는 늘 원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빠듯한 예산으로 신혼집을 구하고 작은 공간에 가구를 채워 넣어야만 했다. 모자라지만 내가 원하는 가치에 온전히 집중하며 필요한 것을 찾아냈다. 내게 주어진 것을 활용하여 최선의 만족을 만들어내는 법을 이때 처음으로 배웠다.


 작지만 예산에 맞는 집도 구했고, 약간의 노력 덕분에 방과 거실이 온전히 갖추어진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계획대로 차곡차곡 저축하며 야무진 신혼을 보내고 있었고 무엇보다 '있어도 없는 척하기'라는 내가 정한 각본에 충실히 따르며 살았다.

그땐 알지 못했다. 내가 일을 그만둘지도, 우리가 얼마나 많은 기회를 놓쳤는지도, 은행에 넣어둔 유산이 계속 마이너스를 기록 중인 것도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른한 살, PB센터 고객이 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