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잖아요 산타클로스도 아니고

500일의 썸머 (500) days of summer, 2009

by 김하지

스포일러와 글쓴이의 주관적인 의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모두 관람한 뒤에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운명적 사랑을 기다리는 남자 _ 톰

그는 특별한 한 사람을 만나는 날까지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고 믿었다.


톰은 운명을 믿는 사람이다. 사랑이 왔을 때 느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숨기지 않는다. 또한 그는 작은 것에 행복해할 줄 아는 사람이다. 고민 끝에 썸머에게 지금 관계에 대해 질문했을 때 썸머의 대답이 명쾌하지 않았지만 썸머가 즐거워하니 톰 역시 즐거워했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톰은 사랑에 서툰 사람이다. 말도 안 되는 어쭙잖은 신호들로 썸머에게 기회를 준거라고 말하는 장면이나 자신을 친구로서 좋아하냐는 썸머의 질문에 우린 친구여야죠 라며 우물쭈물 거리는 모습 그리고 어린 동생에게 진지하게 조언을 구하는 여러 장면들이 그 증거이다.


톰이 결혼한 썸머에게 자신이 믿었던 것들이 모두 말도 안 되는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는 걸 깨달았다고, 썸머 네가 옳았다고 말하는 부분은 톰이 썸머와 헤어지고 얼마나 지난한 시간을 보냈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웃으며 그런 게 아니라고 내가 틀리고 톰 네가 옳은 거였다고 말하는 썸머. 그런 썸머를 바라보는 톰의 표정은 온갖 감정이 섞여있어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저며오게 한다. 굳건했던 한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복잡함이 얼굴에 그대로 떠오른다.


톰은 어쩌면 너무 순진하고 착하고 서툰 사람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투명함은 누군가를 바꾸기에 충분했고, 그 누군가는 다시 그를 바뀌게 했다. 그의 눈빛은 매 순간이 진실됐던 청춘의 순간에 있었기에 더욱 빛날 수 있었을 것이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을 맞이한 한 사람의 성장통이, 이 영화를 볼 많은 이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길 바란다.




구속받기 싫어하는 자유로운 여자 _ 썸머

사랑 같은 건 없어요, 환상이죠.


썸머는 직관적인 사람이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 사람의 헤드폰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이 들려오면 좋아한다고 표현하고, 누군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 사람에게 자신을 좋아하냐고 되묻는 사람이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고 매력적인 이 사람은 사랑을 믿지 않는다.


아무도 링고 스타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링고 스타를 좋아한다는 썸머는 괄약근녀라는 별명을 거리낌 없이 뱉어내고 초인이 되어 땅에 닿을 듯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 작은 말들이 썸머라는 사람이 되어 톰의 머릿속을 뛰어다녔을 것이다. 척 보기에도 특이하고 눈길을 끄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끝까지 알아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썸머다.


왜 이사를 왔냐는 질문에 새롭고 재밌는 걸 해보고 싶어서 라고 대답하고 진지하게 만나는 상대가 있음에도 왜 결혼식에서 자신과 춤을 췄냐는 톰의 질문에 그러고 싶어서 라고 말하는 장면들은, 썸머가 얼마나 감정적인 사람인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순간의 감정을 오롯이 느끼고 행동하는 모습. 아마 이 점이 톰과 썸머를 끌어당겼을 것이다.


솔직하고 엉뚱하며 감정적인 썸머는 그 모습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이 모습들은 모두 톰의 눈으로 바라본 썸머의 단면일 테니까. 하지만 타자화된 썸머는 타자화되었기에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이 아닐까. 전부를 알 수 없어 마음 앓고, 전부를 줄 수 없어 애달픈 불꽃과도 같은 사랑. 썸머는 그저 꾸미지 않은 모습 그대로 존재했을 뿐이다. 그녀를 탓할 수도 그녀를 욕하기에도 뭐한, 그건 너무 사적인 사랑이다.




각본가 / 감독 _ 스콧 뉴스타드터와 마이클 H 웨버 / 마크 웹


사실 이 영화는 마크 웹 감독의 데뷔작이긴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각본가들에게 더 큰 공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시나리오에는 영화의 거의 모든 영상이 묘사되어있다. 탁월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


시나리오 첫 장에 기술되는 문장들은 토시 하나 빼지 않고 영화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NOTE : THE FOLLOWING IS A WORK OF FICTION. ANY RESEMBLANCE TO PERSONS LIVING OR DEAD IS PURELY COINCIDENTAL.
본 영화는 허구이므로, 생존 혹은 사망한 사람과 어떤 유사점이 있어도 순전히 우연입니다.

ESPECIALLY YOU JENNY BECKMAN.
특히 너 제니 벡맨.

BITCH.
나쁜 X.

위의 나온 도입부 자막뿐만 아니라 따라 이어지는 오프닝 시퀀스 역시, 영상으로 표현될 형태가 잘 제시되어있다.

OPENING CREDIT SEQUENCE :
오프닝 시퀀스

SPLITSCREEN OF TOM AND SUMMER AS CHILDREN GROWING UP IN THEIR OWN SEPARATE WORLDS, DISCONNECTED AND YET SOMEHOW... NOT.
각자의 서로 다른 세계에서 커가는 톰과 썸머의 어린 시절 분할화면, 연결되지 않지만 왠지... 아닌.

For example...
예를 들어
On the left, Young Tom blows bubbles in a field.
왼쪽에는 어린 톰이 잔디에 비눗방울을 분다.
On the right,
오른쪽에는
Summer runs through a field of dandelions, flying in the wind all around her. It should look like the dandelions originated with Tom's breath.
썸머가 민들레 정원 속을 뛴다. 바람을 타고 떠다니는 민들레가 그녀 주위에 가득하다.
마치 민들레가 톰의 숨에서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
That sort of thing. Anyway...
그런 종류의 것.

이밖에도 톰의 군무 장면에 나오는 작은 2D 캐릭터 새의 등장이나, 이상과 현실을 두 개의 분할된 화면으로 보여줬던 장면 역시 모두 시나리오에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이처럼 작가는 영화에서 영상화될 장면들을 알아보기 쉽게 표현해 놓았고 그 글들은 마크 웹의 손길을 거쳐 스크린 위에 그려졌다.


마크 웹 감독은 <500일의 썸머> 이후로 앤드류 가필드와 엠마 스톤이 주연한 <어메이징 스파이더 맨> 시리즈 두 편을 연출했고 이어 <어메이징 메리>, <리빙보이 인 뉴욕>을 완성했다. <500일의 썸머>의 각본가 스콧과 마이클은 이 영화 이후로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두 편의 영화 <안녕, 헤이즐>과 <미 비포 유>의 각본을 썼다.


그들의 서로 다른 행보는 그들의 강점을 잘 표현해준다. 마크 웹은 <500일의 썸머>로 인정받은 재기 넘치고 센스 있는 연출로 사랑받았고, 스콧과 마이클은 탁월한 영상화 능력과 특유의 씁쓸한 코미디를 잘 표현해내는 각본으로 줄곧 작품을 이어오고 있다. 이들의 시작을 함께 한 이 영화가 그들을 든든히 받쳐주는 디딤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관객 _ 민감한 고슴도치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이토록 잠깐이다. 단순히 같은 음악을 좋아한다는 우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부풀어서 이내 사랑이 되어버리는 짧은 착각이다. 우연이 계속돼 운명으로 느껴지는 순간, 사랑이 된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톰에게 이입해서 봐서 그런지 썸머가 미웠다. 인터넷에 떠도는 '썸머는 썅년'이라는 말이 참 맞다 싶었다. 그런데 다시 이 영화를 곱씹어 보게 되니, 그 생각이 뒤집힐 수 밖에 없었다.

이번엔 저절로 썸머에게 마음이 갔다. 그래서 썸머의 마음으로 이 영화를 다시 봤다. 도입부 내레이션에서 소개되듯이 이 영화는 '소년이 소녀를 만나는 이야기'이다. 그 때문에 톰의 시점이 중심이 됐지만, 톰의 눈을 통해 본 썸머도 충분히 이입이 될 만큼의 감정 묘사가 있었다. 썸머는 여느 평범한 여자였고,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어딘가 본 적 있을 것 같은 그 보편성이 왠지 측은하고 안쓰럽기까지 했다.


위의 장면은 서로가 처음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되는 장면이다.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한 "사랑이잖아요, 산타클로스도 아니고."가 나온 부분이다. 이 대사를 듣고 나는 한참 '그래, 사랑은 산타가 아니지. 근데 왜 믿기 힘든 걸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영화 <클로저>에서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한 엘리스의 대사가 떠올랐다.


사랑이 어딨어?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어.
물론 말 몇 마디는 들리지만 네 그 공허한 말로는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서로를 사랑한다는 건 곁에 있어주고 보여주고 느끼게 해 주려 노력하는 시간이자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가 버리는 것이어서 묶어두거나 간직할 수 없어서, 더 헤아리기 어렵고 더 믿기 힘든 것이 아닐까.


나는 썸머와 톰 사이의 틈이 벌어진 가장 큰 계기는 위의 3개의 스틸샷이 나오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작은 것에 대한 해석이 다를 때, 그 차이를 좁히는 것을 포기할 때, 그래서 기어코 멀어져 버리고 말 때. 그런 때는 어떤 이기심에서 또는 무지함에서 시작될 수 있다. 수많은 헤어진 연인들이 지나간 시간을 곱씹으며 불길함의 징조를 찾고, 다른 핑곗거리를 찾아 시나리오를 써가는 이유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자기 방어일 것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꾸짖을 수는 없지만 조금 더 싸워봐도 좋지 않을까. 더 간절히 더 욕심껏 보이지 않는 사랑을 쟁취해야겠다.


감독과 각본가 소개에서 미리 언급했지만, 이 영화는 시나리오가 정말 탁월하다. 영상이 그려지고 캐릭터가 튀어나오는 보기 드문 잘 쓰인 글이다. 운명을 믿는 사람과 사랑은 환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둘 다 보기 좋은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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