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자기 색을 고를 수 없듯

스토커 Stoker, 2013

by 김하지

스포일러와 글쓴이의 주관적인 의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모두 관람한 뒤에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남이 손대는 걸 싫어하는 소녀 _ 인디아

All 'A'를 받는 우등생 디아 스토커는 아빠를 잘 따르는 딸이었다. 아빠와 함께 새 사냥에 나가면 아빠는 항상 인디아가 잡은 새들을 모두 박제했다. 그런 아빠가 인디아의 18살 생일날 돌아가신다. 엄마 이비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한다. 가정부들은 인디아가 엄마를 돌보면 돌봤지, 이비가 인디아를 돌보진 못할 거라고 말한다. 인디아는 이비가 자신의 몸에 손대는 것을 싫어한다. 이비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그렇다. 예민하고 경계심이 많다.


인디아의 생일날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 날, 불현듯 등장한 삼촌 찰리가 인디아는 불편하다.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찰리의 등장에 태도가 달라진 이비도 왠지 꼴 사나워 보인다. 인디아의 비꼼은 타고난 듯 자연스럽고 당당하다. 부러 상대가 기분 나쁠 말을 골라하고, 시위라도 하듯 더 화를 낸다. 돌려 말하지 않고 직언하고, 생각한 대로 행동에 옮길 줄 아는 행동력 있는 사람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버지를 추모하고, 달걀 껍질을 벗기는 모양새나, 이비와 찰리가 없을 때 이비의 침대에서 팔다리를 휘적이는 모습은 인디아에게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다는 낌새를 느끼게 한다.


원래도 똑똑한 집안인 스토커 집안에서 태어난 인디아는 아빠에게 배운 사냥으로 많은 것들을 배운다. 사냥감을 잡을 때를 적절히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 사냥감의 행동을 차분히 바라보는 관찰력, 사냥감의 특성을 파악하는 분석력, 사냥감을 잡을 계획과 준비를 착실히 하는 준비성까지. 인디아는 그렇게 좋은 사냥꾼의 자질을 갖춰간다.


찰리와의 동거는 인디아를 끊임없이 긴장시킨다. 찰리의 행동 하나, 말 하나에도 의미가 있는 듯 곱씹는다. 인디아는 찰리에게 직접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내고, 원하는 게 뭐냐고 묻는 당돌함이 있다. 인디아는 점차 찰리가 저지른 일들을 눈치채가지만, 찰리와 이비가 나누는 매혹적인 손길들은 인디아 안의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인디아는 지금 기분 그대로를 즐기고 싶어 한다. 하지만 맘처럼 되지 않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찰리의 등장으로 위기를 넘긴 인디아는 그 날 확실히 깨닫는다. 찰리는 아주 위험한 사람이다.


18살 생일 선물의 비밀을 모두 알게 된 인디아는 찰리를 다룰 줄 알게 된다. 찰리라는 사람을 정확히 파악한다. 인디아는 찰리와 이비의 대화를 조용히 관망하다가 아무 표정 없이 짐을 싼다. 그리고는 아빠의 가르침대로 차분히 그리고 단호하게 찰리를 사냥용 총으로 쏜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비상함으로 무장한 인디아는 엄마 이비의 블라우스와 아빠 리처드의 벨트, 삼촌 찰리가 선물한 구두를 신고 떠난다.



아버지의 장례식 날 불현듯 찾아온 삼촌 _ 찰리

자신의 딸의 생일날 목숨을 잃은 형 리처드의 장례식에 불현듯 등장한 찰리. 매력적인 외모에 와인과 오페라 등 다방면의 지식까지 두루 갖춘 찰리는 여유가 넘치고 당당하다. 세계를 돌아다니는 미스터리한 직업도 가지고 있다.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요리도 잘하고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인다. 조카인 인디아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


인디아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 오고, 인디아가 태어난 년도인 1994년산 와인을 인디아에게 건넨다. 인디아의 하굣길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 비가 올 예정인 날에는 친절히 우산까지 준비해준다. 인디아와의 피아노를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형수 이비와 있을 때도 이비보다 인디아를 더 신경 쓴다. 이런 찰리의 인디아를 향한 관심은 어디서 온 걸까.


인디아가 학교 친구 윕과 밤 산책을 나간 날, 찰리는 인디아를 따라간다. 인디아를 겁탈하려는 윕을 결박해놓고 인디아 보고 "All yours."라고 말하며 인디아가 윕에게 해를 가하길 바란다. 리처드의 벨트로 윕의 숨통을 끊고, 인디아에게 윕의 시신을 처리하는 법을 보여준다. 계속 돼오던 인디아의 경계가 무색하게 찰리는 인디아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동생 조나단에 대해 묻는 인디아에게 숨기지 않고 모든 진실을 말하는 찰리는 어찌 보면 순수하고 열렬하기까지 하다. 가정부 할머니, 진 고모, 윕, 갓난쟁이 동생 조나단 그리고 리처드까지 모두를 죽이고도 죄책감 없이 웃는 모습이 기괴하기 짝이 없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상대의 긴장을 즐기고, 상대의 행동을 도발하고, 집요하고 확실하게 죽인다. 그런 찰리가 일생을 정신병원에서 보내고도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매력적이었고 또한 그가 가진 뛰어난 연기력과 거짓말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찰리는 그 사실들을 너무도 잘 알고 사람을 현혹시킬 줄 안다. 그의 죽음은 어쩌면 예견된 것일지 모른다. 인디아를 향한 외사랑이 그렇게 막을 내린 것이다.



감독 _ 박찬욱

영화 평론가로 영화 비평을 쓰던 영화광 박찬욱은 88년 <깜동>의 연출부로 시작해 차곡차곡 필모를 쌓아간다. <공동경비구역 JSA>로 큰 성공을 거둔 뒤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로 복수 3부작을 끝마치고 <박쥐>, <스토커>, <아가씨>와 최근 영국 BBC 6부작 드라마인 <리틀 드러머 걸>까지 필모를 이어오고 있다. 특히 <올드보이>는 한국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에서 만장일치로 심사위원 대상을 거머 줘 큰 성과를 거뒀으며, <스토커>로 외국에서의 작업을 시작하더니 <리틀 드러머 걸>을 찍는가 하면, 올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액스>를 리메이크할 계획을 드러내 모두의 관심을 이끌고 있다.


<스토커>는 박찬욱 감독의 '배운 변태'라는 별명이 찰떡같이 부합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괴한 분위기를 담고 있지만 매력적인 샷들이 영화 가득 넘치고

영화 속의 여러 번 등장하는 사물들의 모양으로 연결되는, 기발한 화면 전환은 영화 속의 음침한 분위기를 배가 시켜준다.

박찬욱 감독 영화들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극단적인 조명과 선명한 색감들 역시 연신 우리의 눈을 황홀하게 한다.

이 영화는 박찬욱 감독이 처음으로 헐리우드에서 작업한 영화로, 한국영화 평균 제작기간이 6개월인데 <스토커>는 그에 절반에도 못 미치는 2개월 만에 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대사나 음향이 스토리를 빠르게 담아내고 있고, 카메라 워크 역시 경제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현관문과 계단을 오가는 씬들은 경제적인 카메라 워크가 인상적이다. 밑에 네 개의 화면은 모두 한 컷으로 이뤄져 있다. 연극적이라고 할 만큼 인물의 이동이 역동적이고 화면에 인물을 알맞게 배치한 구도가 가히 탁월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밖에도 찰리와 인디아의 격정적인 피아노 연주 장면이 은유하는 바나 이비를 줄곧 약하고 무력하게 표현하는 장면들 그리고 인디아가 아이스크림을 푸고 이비가 찰리의 가방을 뒤지고 찰리가 진 고모를 죽이는 그 교차 장면은 박찬욱 감독의 집요함이나 섬세함, 당돌한 자신감까지 느껴진다.




관객 _ 민감한 고슴도치

사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호감이 가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취향에 맞지 않는 편이다. 이야기들이 너무 극단의 끝을 달리고, 화면에서 뿜어 나오는 에너지가 지나치게 강렬하다. 꽉꽉 채운 미장센과 대사나 사물에 숨겨진 상징과 은유들이 때때로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하지만 영화를 배운 사람으로서 박찬욱 감독의 장점을 잘 알고 매우 인정한다. 그가 이토록 끊임없이 도전하고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존경스럽다.

그가 가지고 있는 영화적인 색감이나 실험적인 시도들이 나의 흥미를 돋운다. 내 취향이 아님에도 굳이 찾아서 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스토커> 역시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임팩트나 주제가 와 닿았다. 두 달만에 촬영을 끝냈는데도 이런 완성도가 나오다니 거장은 괜히 거장이 아닌 것이다. 내로라하는 배우들의 호연과 배우들이 소화하는 과감한 이미지들. 적절히 숙성된 이야기를 풀어내는 박찬욱 감독만의 스토리텔링. 비싼데 맛있기까지 한 불량식품을 먹는 느낌이다.


내가 이 영화에서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박수를 보내고 싶은 장면은 두 번의 식사 장면이다. 검은 식탁과 인물들 사이를 오가는 완력 다툼이 펼쳐지는 그 장면들 말이다. 첫 번째 식사 장면은 인디아, 찰리, 이비 세 명이 등장한다. 찰리와의 첫 식사 장면으로 인디아와 이비의 신경전이 1차전이고 인디아와 찰리의 눈치싸움이 2차전이다. 미묘한 긴장감이 계속해서 흐르고 찰리의 양쪽 어깨를 오가는 카메라 이동이 박진감 넘친다.

두 번째 식사 장면은 세 사람과 갑작스레 방문한 진 고모와의 저녁시간이다. 진 고모를 향한 이비의 경계심과 찰리를 아는 진 고모의 불안감, 그에 대비되는 찰리의 여유로움이 관전 포인트다. 인물 간의 관계나 각 인물의 감정선을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담아냈다.


이야기하고 싶은 장면들이 너무도 많지만 이쯤에서 마무리한다면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인 첫 장면에 등장하는 인디아의 내레이션 대사로 마무리하고 싶다.


"내 귀는 남이 못 듣는 걸 듣고

내 눈은 남이 못 보는 작고 먼 것을 봐

이런 감각은 오랜 열망의 산물이야

구출되거나 완성되고 싶은...


바람이 불어야 치마가 날리듯

난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이뤄지지 않았어

어머니 블라우스 위로 아버지 벨트를 멨고

삼촌에게서 받은 구두를 신었거든


이게 나야


꽃이 자기 색을 고를 수 없듯

내가 무엇이 되든 그건 내 책임이 아냐

그걸 깨달아야 자유로워지고

어른이 된다는 건 바로

자유로워진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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