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머무는 게 어때요

리스본행 야간열차 Night Train to Lisbon, 2013

by 김하지

스포일러와 글쓴이의 주관적인 의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모두 관람한 뒤에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올라탄 교수 _ 레이몬드 그레고리우스

고전문헌학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혼자 체스를 두고 아침마다 먹던 티백이 다 떨어진 것을 까먹고 사놓지 못해 쓰레기통에서 깨끗한 티백을 골라 다시 우려 마신다. 한눈에 보기에도 삶이 재미없고 지루해 보이는 그는 출근길에 우연히 빨간 가죽 코트를 입은 여자가 강물에 뛰어드려는 것을 구하게 된다. 함께 가도 되냐는 여자의 질문에 그는 여자와 함께 교실로 향한다. 수업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는 자리를 뜨고, 그는 그녀가 두고 간 빨간 코트 속에서 '언어의 연금술사'이라는 책 한 권과 리스본행 야간열차 티켓을 발견한다. 15분 후에 출발하는 기차에 몸을 실은 그는 이끌리듯 책의 저자를 찾아간다.



우리 안에 있는 삶의 작은 부분만 살아갈 수 있다면

나머지는 무슨 일이 생길까

우리는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

다른 곳에서의, 지난 모든 일들은 모두 과거다

그리고 대부분 잊혀진다


무엇이 일어날 수, 일어나야 하는가

우리 앞에 놓인 모든 시간들 속에

열린 그리고 완성되지 않은

자유 안에서 깃털처럼 가벼운 그리고 불확실성 안에서 납처럼 무거운


이것은 소망일까

꿈같은 그리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삶의 그 자리에서 다시 한번 일어선다는 것이

그리고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준 방향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그는 고리타분한 사람일 것이다. 시끄러운 교실로 들어선 동료 교수가 여자와 함께 있었다는 학생의 이야기를 듣고 "말도 안 돼"라고 외친 말, 아마데우의 집을 찾아가 벨을 누르고 매무새를 점검하는 모습, 마리아나에게 데이트를 신청할 때 이를 보던 호텔 주인의 "절대 안 물어볼 줄 알았는데..."라고 하는 부분, 담배를 피우지 않는 점, 학교에 남을지 말지 결정을 내렸냐는 동료 교수의 질문에 짧은 침묵 끝에 아니라고 대답한 점 등이 그가 참 바르고 우유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니 이런 그가 충동적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은 것이 얼마나 놀랍고 당황스러운 일이었겠는가.


또한 그는 착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인 듯하다. 손을 떠는 주앙을 위해 커피를 비워주고 담배를 사가는 모습, 전부인과의 일들을 말하던 끝에 자신이 멍청하고 거만했다고 자신은 지루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부분,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는 조지의 말에 단숨에 술을 들이켜는 모습, "전 항상 제가 그를 죽였다고 생각했어요."라고 하는 스테파니아의 말에 아마데우가 동맥류를 앓고 있었다고 상세히 말해주는 부분, 스테파니아에게 '원하면 책을 가지고 계셔도 된다'고 하는 말, 멘데스의 손녀에게 할아버지가 한 일 가지고 자책해선 안된다고 말한 부분들이 그의 온화한 심성을 증명한다.


그가 그토록 아마데우의 책에 빠져있었던 것은 '그가 몇 년간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던 모든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한 부분을 보면, 아마 그 역시 아마데우와 비슷한 깊이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이가 있냐는 마리아나의 질문에 '학생들이 있어요 근데 얼굴이 매년 바뀌니까 너무 좋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라는 대답, '세상은 왜 이렇게 잔인한가요?'라는 아드리아나의 말에 "저 스스로 묻곤 해요. 마치 세상이 신경도 안 쓰는 것처럼요."라고 진중히 대답하는 모습, 아드리아나에게 "다시 와도 될까요? (왜죠?) 그의 인생, 그의 세계는.. 비범해요. 제 삶이 사소하게 느껴져요."라고 말하는 부분 등에서 그의 생각의 깊이와 생각하는 시간의 양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의 삶은 활력과 긴장으로 가득 찼어요. (결국 모든 걸 조각냈죠.) 하지만 살아있었잖아요. 제 삶은 어디 있을까요? 지난 며칠을 제외하고요."

그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 여행을 계기로 그는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살아있는 생각을, 한층 또렷해진 시선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연이 만든 앞으로의 그의 세계가 궁금하다.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혹과 동정, 황홀한 매력으로 가득 찬 감독.





작가나 철학가가 되고 싶던 의사 _ 아마데우 프라두

"저는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더러운 군복의 색깔에 맞서기 위해서, 대성당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이 필요합니다.


저는 성경의 강력한 말씀을 사랑합니다. 언어의 부패와 독재의 쓸모없는 슬로건에 맞서기 위해서, 성경 구절의 힘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제가 살고 싶지 않은 또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독립적인 사색이 경멸 당하고 마치 죄인 양 비난당하는 세상입니다. 독재자, 압제자, 암살자로부터 사랑을 강요받는 세상입니다."


주앙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신을 믿지 않는 성직자'였다. 판사의 아들이자 비상한 머리를 가진 청년이었다. 안경사인 마리아나가 바라본 그의 눈은 우울하지만 희망차고, 지쳐 보이지만 끈기 있었다. 그는 지금에 있지 못했기에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입으로 표현되었다. 그 자신도 그를 모르는 듯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친구 그리고 연인이 그를 더 잘 알았으리라. 그와 너무도 어울리는 말들로 그를 설명하는 친구들의 말에 그들 사이에 깊은 우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저항군에 있기에는 너무 무른 사람이었다며 그는 오직 죄책감 때문에 저항군에 합류한 거라는 주앙의 말, 너무 감정적인 단어라며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길 피하고 사랑을 믿지 않았다는 조지의 말, 부정직을 참지 못해 거짓말을 절대 하지 않았다는 주앙의 말들은 그가 얼마나 올곧고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이 있는 사람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신념과 그가 믿지 않던 사랑은 그에게 용기를 준다. 리스본의 도살자라고 불리는 독재자 멘데스의 목숨을 살려준 그의 선택, 아드리아나가 위급한 상황에서 기관절개술을 시행한 그의 결단, 거짓말을 하지 않던 그가 주앙에게 한 거짓말들은 결국 그를 더 그답게 만들었다.


그는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사람이었다. 이는 그를 사랑을 믿게 만든 스테파니아가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입을 빌어 청춘의 그를 만나보자.


"아마데우는 저에게 끊임없이 물어봤어요. 그는 나를 찾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인생을 찾는 거였을까요. 그는 모든 것을 알기 원했어요 제 모든 인생을, 제 기억, 생각, 판타지, 꿈을요. 그는 집요했어요."


"그는 나를, 삶을 갈망했어요. 하지만 그가 원했던 길은 그의 영혼으로 향하는 거였어요 저를 향한 게 아니라."


뇌 안의 혈관이 터지는 동맥류라는 지병으로 그는 혁명의 그 날, 숨을 거두었다. 새빨간 카네이션이 그의 가는 길에 수를 놓았다. 신념으로 움직였던 그가 의무라 여기던 혁명을 두 눈 뜨고 보진 못했지만 가슴으로 느꼈기를 바라며, 죽어서는 부디 그가 아무 걱정 없이 눈 감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어떤 곳을 떠날 때

우리 스스로 뭔가를 남기고 떠난다


우리가 떠나도 우린 거기 머문다

다시 가야만 찾을 수 있는 우리의 것들이

거기 있다


우리가 어떤 곳으로 갈 때

우린 우리 스스로를 여행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간다

얼마나 짧은 지는 중요치 않다

독재가 하나의 사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이다.




감독 _ 빌레 아우구스트

48년 덴마크에서 태어난 빌레 아우구스트는 촬영감독으로 시작해서 <정복자 펠레>(1987), <최선의 의도>(1992)를 연출해 칸 영화제의 최고 상인 황금종려상을 두 차례나 수상하기도 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이후에 존엄사를 다룬 <사일런트 하트>(2014), 중국 진주만 공습을 다룬 <언더 파이어>(2017), 가장 최근작 <어 포튜네이트 맨>(2018)까지 여러 영화를 연출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혁명은 1974년 4월 25일 일어났던 카네이션 혁명(별칭 : 리스본의 봄)을 뜻한다. 이 혁명은 40년 이상 계속된 독재정권인 살라자르 정권과 식민지 전쟁에 대한 반발로 발생했던 무혈혁명이다. 카네이션 혁명이라는 이름은 혁명의 성공을 알게 된 시민들이 거리의 혁명군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며 지지의사를 표시한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이에 혁명군 병사들은 총구에 카네이션을 꽂음으로써 화답했다고 한다. 포르투갈 내부에서는 4·25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며, 현재 포르투갈은 4월 25일을 '자유의 날'이라는 이름의 공휴일로 지정했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방대한 책의 분량답게 수많은 나레이션으로 이루어져 있다. 액자식 구성으로 현재(그레고리우스가 아마데우의 책을 통해 혁명의 사실을 찾아가는 과정)와 과거(아마데우와 그의 연인, 친구들이 혁명을 준비하는 과정)이 교차로 보여진다. 로드 무비이자 혁명 영화이며 성장 영화인 셈이다. 감독은 현재와 과거를 대표하는 두 인물을 표현하는 방식을 달리하고 있다. 과거를 대표하는 아마데우는 그레고리우스가 떠나는 여정 속의 로드무비라는 형식 안에서 그의 연인과 친구들의 입과 그레고리우스가 읊는 책의 내용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와 다르게 현재를 대표하는 그레고리우스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던 아마데우의 글을 보며 자기 자신과 현실을 자각하게 되는 성장 드라마의 형식을 띄며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관객 _ 민감한 고슴도치


삶의 결정적인 순간은

방향이 영원히 바뀔 때

항상 극적이거나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사실 극적인 삶의 순간들은

가끔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하


혁명의 결과가 펼쳐질 때 그리고 새로운 빛에 떠오른 삶에 확신을 가질 때

조용히 진행된다

그리고 이 경이로운 침묵은 특별한 고귀함 속에 존재한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휘몰아치는 대사의 양에 깜짝 놀랐다. 모두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이야기인 것 같아, 지레 겁을 먹고 해석하기를 포기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두 번째, 세 번째 볼 때마다 그 문장에 대한 이해도가 점차 깊어졌고 아마데우의, 스테파니아의, 조지의, 그리고 그레고리우스의 삶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만 보아도 소설의 난이도가 짐작이 되기 때문에 심호흡을 하고 도전해야겠지만 언젠가 꼭 원작소설을 읽어보리라.


액자식 구성의 이 영화에는 충동적으로 들어선 새로운 삶을 직접 발로 찾아가는 그레고리우스의 여정과, 역사의 한가운데 지나치게 똑똑하고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었던 청년 아마데우의 삶이 그려진다. 그 속에서 이 두 사람을 제외한 많은 인물들이 그려지는데, 내가 한 편의 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의 수가 한정적이라는 것에 작은 안타까움이 밀려오기도 했다. 기회가 된다면 아마데우의 동생인 아드리아나,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인 스테파니아, 안경사 마드리나 의 이야기도 나누고 싶다.


이 영화는 그레고리우스가 저자의 발자취를 쫒아가는 로드무비이자, 저자인 아마데우의 짧은 삶을 다룬 전기이며 포르투갈 청년들의 역사를 다룬 투쟁기이고, 두 커플의 미묘한 사랑을 다룬 로맨스라고 말하고 싶다. 실제로 이 영화의 장르는 미스터리, 로맨스, 스릴러라고 적혀있다. 참 어려운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 영화는 보기 좋게 잘 엮어놨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면서 너무 어려워서 버거워서 싫어할까 봐 걱정했지만, 각자가 와 닿는 부분이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깊은 여행, 자신만을 위한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보면 좋을 영화인 것 같다. 너무 부담 느끼지 말고 천천히 대사를 곱씹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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