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잘 지내요

러브레터 Love Letter, 1995

by 김하지

스포일러와 글쓴이의 주관적인 의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모두 관람한 뒤에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아직 잊지 못한 그녀 _ 와타나베 히로코

그녀는 느린 사람이었다. 말도, 행동도, 죽은 애인을 떠나보내는 일도. 마음이 여려서 부탁을 잘 거절할 줄 모르고, 반지를 손에 들고도 프로포즈를 하지 못하는 애인이 너무 불쌍해 보여서 먼저 결혼해달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작은 자세에서부터 그녀의 성향을 알아차릴 수 있다. 두 손을 모아 잡고 서있는 모습이나 무릎을 가지런히 꿇고 앉은 정갈한 자세, 웃을 때도 고개를 숙여 입을 가리는 모습들이 그녀가 내향적인 사람임을 잘 보여준다. 어딘가 왜소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녀는 누구라도 그녀를 지켜줘야만 할 것처럼 나약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녀는 그가 아직 살아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중학교 졸업앨범에 적힌 주소로 편지를 쓰고, 얼떨결에 받은 답장에 또 정성스레 답장을 써서 보낸다. 그가 조난당한 산을 오르다가도 그간 곁을 지켜준 아키바에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우리 지금 뭐 하는 거야? 이츠키가 화낼 거야."라고 말하며 그가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대한다. 그녀는 아직 그를 보내지 못했다. 그녀는 그녀 스스로를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도 또 뭔가 더 받고 싶어서 죽은 다음에도 따라다니면서 투정 부리는 여자인가 봐요."


그래서 그를 그제라도 떠나보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부리고 있는 투정이 그저 투정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늦추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녀는 그가 죽음을 맞이했던 그곳에서 외친다. 잘 지내냐고, 난 잘 지낸다고. 그녀는 그가 닿을 수 없는 어딘가에서 잘 지내길 바란다. 이제 나도 잘 지내겠다고, 다짐처럼 그렇게 외친다. 난 잘 지낸다고.


그녀는 이츠키와 나눴던 편지를 이츠키에게 되돌려준다. 그 편지들은 그와 이츠키의 추억이라고. 이츠키와 나눴던 편지들은 어쩌면 그녀에게 '과거는 과거로, 지금은 지금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시작이었을 것이다. 과거는 부정할 수 없고, 일어난 과거는 바꿀 수 없다. 조금 늦었지만 그 사실을 깨닫는다. 과거의 그가 짝사랑했을 이츠키에게 힌트를 줄 마음의 여유까지 보여준다. 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이젠 빛을 향해 걸어도 죄책감이 덜 할 것이다. 그녀가 더 맘껏 웃는 모습이 보고 싶다.




잊었던 기억을 떠올린 그녀 _ 후지이 이츠키

그녀는 감정표현에 확실한 사람이다. 우편배달부의 귀찮은 추파를 단호히 거절할 줄 알고, 히로코에게 온 편지를 보고 가족들에게 히로코라는 사람을 모른다며 이상하다고 계속해서 말한다. 표정이 다양하고 리액션이나 성량도 크다. 앉아있는 자세도 굳어있지 않고 열려있다.


호기심이 많고 인정이 있다. 그래서 히로코의 편지를 그냥 넘기지 못하고 답장을 보낸다.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는 상황에서도 답장을 보내 제대로 정정하고, 내막을 알게 된 후에는 히로코를 위해 동명이인이었던 옛 동창의 사소한 기억들을 친절하게 편지에 적어 보낸다. 그의 이야기를 좀 더 해달라는 히로코의 편지에 "차라리 내 머리를 통째로 소포로 보내는 게 빠르겠어."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면 이츠키의 엉뚱하고 능청스러운 면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츠키도 히로코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얽매여 있다. 감기가 악화돼 폐렴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이다. 때문에 기침을 하루 종일 달고 있어도 병원에 가지 못한다. 집에 있는 초기 감기약으로 근근이 때우며 고집을 부린다. 이츠키의 엄마가 강제로 데려다 놓은 병원 장면에서는 이츠키가 병원에 대한 트라우마가 얼마나 심한 지를 잘 보여준다. 히로코의 요청으로 다시 찾은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께 히로코가 숨겼던 사실을 듣게 된다. 동명이인의 동창 후지이 이츠키는 2년 전 조난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 이츠키는 히로코에게 아버지의 얘기를 하려다가 쓰러져 병을 크게 앓는다.


"도서카드에 쓴 이름이 진짜 그의 이름이었을까요? 그가 쓴 이름들이 당신 이름인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드네요."라는 히로코의 말에도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던 이츠키는 조금은 단순하고 눈치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가 짝사랑했던 그때의 이츠키도, 히로코에게 편지를 받고 있는 지금의 이츠키도 모두 사랑스럽기 그지없지만, 때늦은 깨달음은 후회를 남긴다. 뒤늦게 발견한 도서카드 속 그림을 차마 히로코에게 말하지 못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뜬금없는 히로코의 편지 한 장으로 시작된 이츠키의 추억여행은, 회피만 하던 아버지의 죽음을 더 가까이 느끼게 해 줬으며 잊었던 어린 시절의 풋풋한 감정을 일깨워주었다. 히로코와 나눈 편지들은 학창 시절 시험지처럼 먼지 쌓인 다락방에 보관되겠지만, 지금 이츠키가 느낀 감정들은 이츠키의 마음에 남아 내내 기억될 것이다.



감독 _ 이와이 슌지

이와이 슌지 감독은 국내에도 팬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감독인데, 이 감독은 작품 색이 두 가지로 구분돼서 '화이트 이와이 슌지'와 '블랙 이와이 슌지'라고 불리는 영화들이 있다. <러브레터>는 '화이트 이와이 슌지'에 속하는 작품인데 이 밖에도 <4월 이야기>, <하나와 앨리스> 등이 있고, '블랙 이와이 슌지'에는 <언두>, <피크닉>,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 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유작을 고르라고 한다면 이 작품으로 하고 싶다."라고 말한 바 있는 작품이다.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어둡고 무거운 소재의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영상미를 빼놓고 이야기하기는 힘들 것 같다. 상영시간 내내 일본의 겨울과 학교, 도서관 등을 아름답게 담아내고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히로코와 이츠키가 지나치는 장면에서의 연출은 영화 안에서도 특히 빛난다. 두 사람 각자의 내향적인, 외향적인 캐릭터가 한눈에 들어오고, 히로코는 알아보고 이츠키는 알아보지 못한다는 상황 설명 모두를 잘 표현한 장면이라 효과적이면서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밖에도 유려한 화면 전환이 인상적이었다. 가볍게는 히로코가 탄 비행기가 뜨는 모습 뒤에 높은 아파트 멘션을 바라보는 이츠키와 이츠키 엄마를 붙인 부분이나, 이츠키가 남자 이츠키의 죽음을 듣고 집에 가는 장면과 히로코가 남자 이츠키가 조난당한 산으로 향하는 장면, 이츠키가 아버지 장례식을 회상하는 장면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두 사람의 세세한 감정과 그 감정들의 연결고리가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관객 _ 민감한 고슴도치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여자 이츠키가 주인공인 영화라고 생각했다. 여자 이츠키의 캐릭터가 더 주도적이고 과거와 현재 내용도 확실하게 다가와서 그런지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여자 주인공만 두 명인 영화의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 문득 이 영화를 고르게 됐는데, 또 흥미롭게도 1인 2역의 작품이었다. 그렇게 다시 본 이 영화에서 나는 주인공이 새롭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 이츠키가 아닌 히로코가 주인공이었다.


히로코는 성장이라는 확실한 서사를 가지고 있다. 애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연연하고, 옆에서 기다려준 사람에게 선뜻 곁을 내주지 못한다. 그런 히로코가 여자 이츠키에게 편지를 보낸다. 답장이나 어떤 반응을 바라지 않고 한 행동에서 뜻밖의 동력을 얻는다. 자신은 알 수 없었던 죽은 애인의 학창 시절을 알게 되면서 작은 궁금증들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혼자 힘으로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낸다. 그의 고향과 그가 죽은 장소를 가볼 용기를 얻는다. 히로코는 그 과정에서 점점 성장한다. 기어코는 뱉어낸다.


히로코가 이런 대사를 하는 부분이 있다. "닮아서라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나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말했던 것이 어린 시절 짝사랑했던 그녀와 닮아서라면, 나를 사랑한 게 그 여자와 닮아서라면. 한 번이라도 누군가의 애인이었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가정은 생각도 하기 싫을 것이다. 이런 가정을 겪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마음은 분명 힘들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히로코가 앓았을 마음들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더 저릿해진다. 그것을 감내해낸 히로코가 존경스러워진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고, 잊지 못하고 가슴 앓고, 모진 가정을 곱씹으며 미어졌던 그 순간들을 이겨낸 히로코를 보면서 나도 히로코처럼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겼다. 그 감정들은 분명 아프지만 이겨낸 사람이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살아있다는 것, 이토록 아프지만 아직 살아있다는 것, 살아있기에 언젠가 이겨내리라는 것이 나를 살아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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