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안 갚아도 돼요

만추 LAST AUTUMN, 2010

by 김하지

스포일러와 글쓴이의 주관적인 의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모두 관람한 뒤에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72시간 후에 돌아가야 하는 여자 _ 애나 첸

교도소에서의 7년은 애나를 아주 달라지게 만들었다. 식당에서 서빙 일을 할 때 손님들이 모두 애나만을 찾아서 몇 달만에 카운터로 자리를 옮겼을 정도로 붙임성 좋고 밝은 아이였던 애나는, 이제 없다. 그를 위해 죽을 수 있을 만큼 사랑했던 왕징을 다시 만났을 때, 너무도 많은 것이 변해버린 왕징은 애나에게 많은 일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애나는, "저는 많은 일이 없었어요."라고 답한다. 교도소는 그런 곳이었을 것이다. 많은 일들이 없어서 많은 것들이 무너져내리는 곳.


애나는 모범수였다. 그래서 살인범임에도 처음으로 보석될 수 있었다. 더 이상 무엇도 어그러지지 않고 온전히 끝났으면 하는 바람에서 성실히 지낸 것이었을 것이다. 애나는 그렇게 마음의 상처에 본드를 바르며 스스로를 더 딱딱하게 만들었다. 가족들의 맞이에도 감정이 좀처럼 분출되지 않고 예쁜 옷을 입고 꾸며봐도 무력하다. 애써 웃어 보였던 왕징과의 재회도 어린애 보듯한 왕징의 태도에 애나는 다시 생기를 잃는다.


"돈 안 갚아도 돼요" 스스로를 감옥으로 돌아갈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애나는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을 꺼린다.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훈과 거리를 둔다.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명함도 아무 감정 없이 버린다. 하지만 훈은 애나를 찾아낸다. 찾아내서 조금씩 웃게 한다. 애나에게 주어진 3일을 훈이 자꾸만 채운다. 그렇게 훈은 얼어붙은 애나의 맘을 서서히 녹이고 있었다.


어쩌면 애나는 바랐는지도 모른다. 7년 만의 외출을 특별하게 만들 사람을, 작은 탈선을 함께 해줄 사람을. 훈은 그에 걸맞은 사람이었다. 곁을 감추는 애나의 품을 자꾸만 파고드는 사람이었다.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제안들에 애나는 오히려 흥미로운 듯 표정 변화 없이 훈을 따른다. 멀리 보이는 커플의 대화를 상상해서 뱉어낼 때, 애나의 진짜 감정이 슬며시 모습을 내비친다. 이별의 아픔과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 이내 훈의 장난을 못 이기는 척 받아주고, 마음이 열리고,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결국 엄마의 장례식에까지 찾아온 훈이, 애나는 고맙다. 비집고 들어와서 자꾸 당황스럽게 만든다. 애나는 장례식 내내 왕징을 신경 쓴다. 애나를 버리고 가정을 이룬 것이 맘에 남았는지 왕징 역시 애나의 눈치를 살핀다. 훈과의 언쟁이 커져 훈을 크게 밀친 왕징. 포크 때문이라는 훈의 말에 애나는 그간 왕징에게 쌓여있던 울분을 쏟아낸다. 7년 전 일에 대한 감정까지 모조리.


감옥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훈은 또 시계를 건넨다. "To remember." 애나는 "Goodbye."라고 답한다. 버스에 올라탄 애나 옆에 또 훈이 아무렇지 않게 앉는다. 그렇게 함께 가는 길이 외롭지 않다. 안개 때문에 잠깐 멈춘 버스, 잠깐 찬 바람을 쐬고 있는데 훈이 다가온다. 몇 초의 정적. 기나긴 키스를 나눈다. 애나가 나오는 날 여기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잠깐 잠이 들었는데 훈은 온데간데없다. 손목에 시계만 남겨둔 채.




애나 곁에 자꾸 나타나는 남자 _ 훈

훈은 뻔뻔하게 애나에게 다가가 30불을 빌린다. 버스기사에게 말하는 본새가 능청스럽기까지 하다. 훈의 직업은 여자가 원하는 일을 해주고 기쁘게 하는 사람이다. 나쁘게 말하면 제비. 외모는 물론이고, 배짱도 두둑하고 붙임성도 좋고 무례의 선을 간당간당 넘지 않는 친화력도 있다. 자꾸만 자신을 거절하는 애나에게 계속해서 시계를 건네고 명함을 건네고, 또 찾아내 옆에 앉는 모습을 보면 끈질긴 구석이 있다. 자신의 직업을 말함에 있어서 당당하고 능력에 대한 자부심도 있다. "맘에 들지 않으면 돈은 안 내도 돼요."라고 말할 줄 안다.


단순하지만 감정표현이 확실하고 작은 것에도 눈치가 빠르다. 7년 만에 꼈던 귀걸이의 후유증으로 애나가 귀를 긁어대는데, "긁지 마요. 그럼 더 나빠져요."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훈의 섬세함과 배려를 느낄 수 있다. 그때그때 갈 곳을 정하고 재밋거리를 만들어내는 훈의 모습에선 순발력과 기지가 엿보인다. 거짓말을 스스럼없이 해대고, 애나를 어딘가로 데려가고 계속 무언가를 한다. 실행력과 추진력까지 있는 남자다.


적당한 때에 화제를 돌릴 줄 알고, 언제나 애나의 의중을 살핀다. 옛 손님 옥자가 찾아와 매달리지만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고, 부채감에 그녀를 방 앞까지 배웅한다. 마음이 약한 사람이다. 가볍지만 진심이 묻어난다. 애나를 두고 게임하지 말라는 왕징의 말에, 왜 게임하면 안 되냐며 애나를 웃게 하지 않냐고 애나를 웃게 한 적이 있냐고 되묻는다. 왕징과 주먹이 오간다, 마치 애나와 왕징의 관계를 알기라도 한다는 듯이.


애나가 감옥으로 돌아가는 날, 애나에게 또 시계를 건넨다. 어쩌면 또 거절할 줄 알지만 계속해서 시계를 건넨다. 시간을 함께한다. 옥자의 남편이 훈을 납치해 옥자를 왜 죽였냐고 묻는 장면에서도 훈은, 당황 끝에 문득 애나를 걱정한다. 애나의 앞에 선다. "여기서 다시 볼까요, 당신 나오는 날." 애나의 손목에 시계를 걸어두고 훈은 모습을 감춘다.




감독 _ 김태용

이 영화 <만추>를 찍고 탕웨이의 남편이 된 걸로 유명한 김태용 감독은, 지금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과 <허스토리>로 유명한 민규동 감독과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을 공동 연출해, 함께 상업영화감독으로 데뷔 신고식을 치른다. 그 뒤 <온 더 로드, 투>라는 YB밴드 유럽투어 다큐멘터리와 <가족의 탄생>이라는 영화를 찍었고, <만추>로 정점을 찍는다.


8년 만의 선보이는 상업영화 <원더랜드>는 수지, 최우식, 탕웨이가 출연을 확정 지었고 박보검과 정유미가 출연을 논의 중에 있다. 초호화 캐스팅으로 시작 전부터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원더랜드>는, 근 미래 사후세계를 관리하는 가상의 세계 원더랜드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사연을 다룬 영화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 영화는 자잘한 배경 묘사를 최대한 줄이고 담백하게 인물의 감정에만 집중한 연출이 돋보인다.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고, 카메라의 흔들림으로 불안감에 힘을 실으며, 풀 샷으로 인물의 공허한 감정을 극대화한다.

잘 정돈된 기법들과 기다려주는, 느끼게 해주는 긴 호흡으로 감정선을 진하게 담아낸다. 감정이 담긴 대사에는 변주로 강조하고, 햇살과 정적조차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배우의 연기가 중요한 시나리오에 배우의 연기를 잘 이끌어냈으며 배우의 연기를 온전히 담아낸 것이 이 영화의 특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배우들의 열연이 빚은, 시애틀의 안개처럼 먹먹한 작품이다.




관객 _ 민감한 고슴도치

두 번째 보는 것임에도 모든 것이 새로웠다. 인물들의 감정이 첫 번째 보던 때와는 또 다르게 다가왔다. 막연한 내 기억 속 영화보다 더 어두웠고 더 감정적인 영화였다. 그래서 좋았다. 새롭게 깊이가 느껴졌다. 많은 의미들을 은유하고 다룬 영화였다.


왜 하필 시계였을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제비의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I need a time."이라는 훈의 대사도 뭔가 의미심장하고 계속해서 두 사람이 시간을 함께하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까지 애나에게 훈의 기억을 남기는 중요한 물건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면 시계의 의미는 생각보다 무거울 것이다.


<만추>에는 개인적인 기준에서 뽑은 세 가지의 명장면 있는데 첫 번째는 커플 더빙 장면, 두 번째는 하오 화이 장면, 세 번째는 장례식 포크 장면이다.

세 장면 중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장면은 하오 화이 장면이다. <만추>를 처음 봤을 때에는 이 장면이 명장면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었다. 영화를 고를 때도 이 장면을 제외하고 두 명장면을 떠올리며 이 영화를 골랐다. 하지만 영화를 다시 보고 하오 화이 장면에서 표현되는 인물들의 감정이 더 세밀하게 와 닿았다.


그 하루의 여정 중에 하오 화이 장면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커플 더빙 장면을 지나, 애나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내일 감옥으로 돌아가요, 엄마 장례식만 끝나면"의 대사 장면도 지나, 하오 화이 장면이 등장한다. 애나의 깜짝 고백에 훈은 유일하게 아는 중국어 '하오(좋다)'의 뜻을 묻는다. 그리고 '화이(나쁘다)'의 뜻도 배운다. 애나는 유령 시장에서 7년 전 기억을 떠올린다. 훈은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어로 옛이야기를 풀어낸다.

훈은 애나의 말에 조심스럽게 하오와 화이를 골라 대답한다. 어떤 때는 의미가 맞는 듯하고 어떤 때는 아닌 듯하다. 그 과정에서 애나는 웃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고,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훈은 알 수 없는 애나의 반응에 그저 대답을 이을 뿐이다. 그 이상한 대화가 좋았다. 그 통하지 않는 대화에서 통해지는 감정의 교류가 신선했다. 훈의 아는 듯 모르는 듯한 애매한 표정도 좋았고, 애나의 희로애락이 담긴 표정도 좋았다. 단연 두 주연 배우의 열연이 여실히 펼쳐지는 장면이었다.

안개보다 햇살이 더 먹먹하고, 서로 닿았을 때보다 닿지 않았을 때가 더 애절했다. 이상하게 눈이 가고 이상하게 마음이 쓰이는 영화였다. 곱씹어 볼거리가 많아서 정독하듯 이 영화를 읽으면 더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좋다. 가볍게 보아도 좋은 영화다. 가볍게 보아도 아름다운 영화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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