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살의 나는 15살 때의 나보다 조금도 슬기롭지 못해
언어의 정원 言の葉の庭, 2013
스포일러와 글쓴이의 주관적인 의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모두 관람한 뒤에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그 _ 아키즈키 타카오
소년은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철없는 홀어머니와 조금은 무책임한 형 밑에서 자란, 똑 부러지고 책임감 있는 아이. 하늘을 좋아한 소년은 하늘의 향기를 머금고 내리는 비를 맞이하기 위해 비가 오는 날마다 1교시를 빼먹고 공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난 신비로운 여자. 초콜릿에 맥주.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끼어서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그러면 널 붙잡을 수 있을 텐데" 라며 단가를 읊는, 자기의 이야기는 좀처럼 잘하지 않는 여자. 소년은 그녀와의 시간이 즐거웠다.
그 시간들이 지나고 햇살이 부서지는 맑은 날에는 그녀와의 거리가 사무치게 느껴졌지만 그럴수록 소년은 구두에 집중했다. 소년은 어릴 적 어머니의 선물로 기억되는 구두를 직업으로 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어쩌면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일지 모른다, 소년이 그녀를 위한 구두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바람을 용기로 뱉어낸 그 날, 처음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느샌가 제대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고. 소년은 그녀에게 나아가고 싶은 마음을 가득 차게 할 구두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다, 학교에서 그녀를 만났다. 무덤덤하려고 애썼지만 별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의 소문은 퍽 볼썽사나운 것이었다. 학생을 홀린 선생님,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 더 참을 수 없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소년은 난생처음 누군가를 때리고 말았다. 생채기 가득한 얼굴로 다시 마주한 그녀는 처음 만난 공원에 있었다. 하늘도 소년의 마음을 아는지 매섭게 비를 쏟아 내렸다.
비를 흠뻑 맞은 두 사람은 그녀의 집으로 향한다. 그녀의 집은 그녀의 입으론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담겨있었다. 공원에서 함께한 시간들은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이, 바로 이 순간이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일지 모른다. 목 끝을 간지리는 말이 있었다. 그녀가 건넨 커피가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소년은 입을 열었다. 나 유키노 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유키노 '씨'가 아니라 선생님이잖아? 이사를 간다며 운을 띄운 그녀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곳에서 혼자 나아가는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며 그동안 고마웠다고 선을 긋는 그녀의 말에 소년은 뜻 모를 감정이 울컥 차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나 덜 마른 옷을 챙겨 입고 그녀의 아파트를 내려가는데, 마음이 잘 정리되지 않는다. 내리는 장대비를 맞는 건물들을 내려보며 생각에 잠긴다. 인기척에 뒤를 돌아봤다. 그녀다. 소년은 참아왔던 말들을 뱉어낸다.
그녀 _ 유키노 유카리
그녀는 정체되어 있었다. 매일 정장을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 플랫폼에 서서 하염없이 열차를 바라보다 결국 오르지 못하고 공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비가 오는 날, 그곳에서 소년을 만난다. 소년은 그녀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의 학생이었다, 소년은 잘 모르는 듯 하지만. 소년과의 순간은 어색하지 않았다. 대화를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모두 대화였다. 소년이 싸오는 도시락에서는 또렷하게 맛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 일을 겪고 미각을 잘 느끼지 못했다. 오직 맥주와 초콜릿의 맛만 느껴졌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점점 거짓말이 늘어갔다. 소년이 여자구두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소년이 그녀의 발을 만졌다. 소년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발 사이즈를 기록했다. 왠지, 소년에게 말을 해도 될 것 같았다. 어느샌가 제대로 나아갈 수 없게 돼버렸다고. 맑은 날이 이어지고 그녀는 소년을 생각했다. 소년이 학교를 빠질 구실이 줄어들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사실은 장마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다, 학교에서 소년을 만났다. 사직서를 내고 돌아가는 길, 소년의 얼굴이 스쳤다. 교복을 입은 소년의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소년도 그녀를 알아챈 듯했다. 돌이라도 얹은 듯 무거운 마음에 발길이 저절로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은 역시 소년을 떠올리게 했다. 인기척에 돌아본 곳에는 상처 투성이의 얼굴을 한 그가 있었다.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며 비가 내리지 않는다 해도 나 여기 머뭅니다 당신이 붙잡아 주신다면" 순간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장대비가 쏟아졌다. 그녀와 그는 헤엄쳐서 강을 건넌 듯 홀딱 젖은 모습이었다.
옷을 말리기 위해 그녀는 그를 집으로 들였다. 역시 그의 음식은 생생한 맛을 냈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이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일지 모른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유키노 씨. 그녀는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본다.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나 유키노 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설렜다.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다니던 학교의 학생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애써 침착한 음성으로 그의 말을 정정했다. 유키노 '씨'가 아니라 선생님이잖아?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녀가 담담한 척 말을 이었다. 이사를 간다고, 전부터 결정했던 일이라고. 그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의 눈 속에는 아까와 같은 확신은 온데간데없다. 그녀는 그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곳에서 혼자 나아가는 연습을 하고 있었던 거라고, 그동안 고마웠다고 그녀는 그에게 그렇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옷이 아직 다 마르지도 않았는데... 쾅.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와 나눴던 대화, 그가 해줬던 음식들, 그가 눈을 반짝이고 말했던 구두 이야기들 그리고 단가. '나 여기 머뭅니다 당신이 붙잡아 주신다면' 머릿속이 선명해진다. 그녀는 신발도 신지 않고 그의 뒤를 쫓는다. 마침내 다다른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아픈 말들을 쏟아낸다. 아팠다. 그의 진심을 모르는 척한 대가를 치르는 듯, 그녀의 상황을 꿰뚫는 말들이 가슴에 꽂혔다. 그녀는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매일, 매일 아침 정장을 입고 학교에 가려했어.
하지만 무서워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어.
나 그곳에서, 네게 구해진 거야.
감독 _ 신카이 마코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일본 주오대학교 고전문학과를 졸업해 자신의 영화를 직접 소설로 출간하기도 하는데, 이 영화 언어의 정원 역시 출간된 도서가 있다. 형식이 조금 독특하다. 1인칭 시점으로 화자를 달리해가면 이야기가 진행된다. 영화에서는 아키즈키와 유키노의 입장에서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소설에서는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바라보는 재미가 있다.
이 영화의 제목인 언어의 정원은 일본어로 言の葉の庭(코토 노 하 노 니와)로 언어 즉, 말을 뜻하는 言葉(코토바) 사이에 ~의를 뜻하는 の(노)를 넣어 지었다. 말씀 언(言)과 잎 엽(葉)으로 이루어진 단어를 분리해 일종의 언어유희를 만들었다. 그래서 직역하자면 '언어와 잎사귀의 정원'이라는 뜻이 된다. 또한 言の葉라는 글자는 和歌(와카)라는 일본 고유 형식의 시를 뜻하고 주인공들이 읊는 단가라는 장르를 포함한다. 이 영화의 제목은 '시의 정원' 혹은 '단가의 정원'으로 읽힐 수도 있는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영화 속 두 주인공의 나이와 행동의 차이를 묘사한 것은 어른들이 가끔 십 대들보다도 성숙하지 않다고 느낄 만큼 어색하게 성숙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순조롭고 아름답게 성장하지 않다는 것을 묘사하려고 했다고 한다. 감독은 영화의 주된 배경인 비에 대해서는 "비는 슬프고 어둡게 보이기도 하지만, 언어의 정원에서는 세상을 더 활기차게 하며 삶의 현실과 사회에서의 어려움으로부터 두 주인공을 보호하기도 한다"며, 또한 '둘 다 통제되거나 멈춰질 수 없다'는 사랑과 비의 공통점을 강조했다.
이 영화에서는 단 '두' 번에 오블리크 앵글숏 (oblique angle shot)이 사용된다. 단어 뜻 그대로, 비스듬하게 각도를 틀어 찍은 장면이다.
언어의 정원 言の葉の庭 ⓒ 2013. CoMix Wave Films Inc. all rights reserved. 첫 번째 장면은 아키즈키가 유키노를 처음 만났던 날, 만엽집의 실린 단가를 읊을 때의 유키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아기즈키의 입장에서 유키노의 등장을 그윽하고 신비롭게 연출하는 효과가 있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앞뒤 화면과 다른 느낌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어, 이 컷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상황을 돋보이게 만들 수 있다.
언어의 정원 言の葉の庭 ⓒ 2013. CoMix Wave Films Inc. all rights reserved. 두 번째 장면은 아키즈키가 학교에 떠도는 유키노의 소문을 들은 날, 소문을 퍼뜨린 당사자를 찾아가 싸움을 시작하는 아키즈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책임감 있고 바른 아키즈키가 영화에서 처음으로 과격한 모습을 보이는 장면으로, 아키즈키의 격양된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앵글의 활용이 눈에 띈다.
각 주인공이 한 번씩 오블리크 샷을 주고받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각 주인공의 등장과 감정을 강조하여 관객들이 새롭게 영화에 이입할 수 있게 만든 점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관객 _ 민감한 고슴도치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영화의 러닝타임이 고작 46분인지는 꿈에도 몰랐다. 너무 깊숙이 빠져서 봐서인지 기존 영화의 러닝타임인 1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으로 착각할 정도로 흡입력 있는 영화였다.
아무런 정보 없이 캐릭터들의 나이와 직업만 들었다면, 영화의 내용을 오해할 수 있다. 나 역시도 거부감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시작되고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그 순간부터 오해는 오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드럽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감독의 솜씨가 감탄스러웠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활용한 소재들에 있다. 배경이 되는 공원과 비, 여자 주인공의 시, 초콜릿과 맥주, 정장 그리고 남자 주인공의 구두, 스케치, 교복 등 은유와 상징이 넘치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영화였다. 현실인지 의심이 들게 하는 사실적인 작화도 한몫을 하지만 단연코 내 맘을 사로잡은 것을 꼽자면 '시'다. 영화에 등장한 단가는 한 시 안에 두 사람의 시점이 있는 듯 문단이 나뉜 시이다. 이 두 문단을 주인공들이 서로 나눠 읊는 모습이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또한 여자 주인공은 나아가지 못하고 있고, 남자 주인공은 그런 여자 주인공을 나아가게 해 줄 구두를 만들고 싶어 한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구두를 선물하면 먼 곳을 떠나버린다는 옛말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나 역시도 유키노에게 아름다운 구두를 선물하고 싶게 만드는 영화였다. 신카이 마코토가 쓴 소설을 읽으면 그들의 뒷 이야기까지 엿볼 수 있는데 그들의 뒷 이야기가 궁금한 분들에게 동명의 소설을 읽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