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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프더레코드 Aug 15. 2021

시청 앞 지하철 역에서

삶과 사랑 이야기 #6

-너를 다시 만났었지-

"어! 오랜만, 어떻게 지내?"

그녀를 우연히 다시 만난 건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한창이었던 2008년 여름이었다.

아들 부시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시청광장과 태평로 8차선이 모두 촛불로 뒤덮인 가운데 참여 시민들의 멘트를 따다가 화장실을 찾아 1호선 시청역으로 내려갔을 때였다.

검정바지에 짙은 보라색 마이를 팔에 걸친 채 퇴근하던 그녀와 마주쳤다. 헤어지고 9년, 그 사이 동기 결혼식에서 우연히 마주치고는 2년이 지났을 때였다.

"보시다시피. 이러고 살지. 선배는?"

나는 재수를 했고, 나이는 동갑이었지만 그녀가 한 학번 위였다. 사귈때는 이름이나 '너'라고 불렀지만 이별 뒤엔 별도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냥 신문사 입사 뒤 '선배'란 호칭이 입에 익어버려서 자동으로 그렇게 불러버렸다.

"하하, 선배? 그렇지, 내가 과선배이긴 하지. 인하우스 하다가 얼마전에 여기 앞 펌으로 옮겼어"

입학 뒤 그냥 선후배로 알고 지내다, 2학년이 되면서 호감을 갖고 사귀기 시작할 무렵 그녀는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반면 아버지의 바람대로 사는 게 싫어서 법대를 가지 않았던 나는 고시라고 하면 무조건 '안 해', '싫어'였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전공 공부를 하던가 취업 준비라도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당시엔 아무 계획도 없었다. 끝물의 끝물인 학생운동을 설렁설렁하면서 그냥 흘러가는 시간 속에 숨을 쉬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세계관에선 내가 한심하고 이해안되는 사람이었겠지. 그나저나 그 사이 열번 넘게 이사 다닌 것 같은데, 아직도 이 책이 있었다니... 이 책은 나랑 인연이 있나보다.


- 디딜틈 없는  곳에서-

"기자됐단 이야긴 들었어.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살아온 환경도 세계관도 미래에 대한 생각도 달랐다.

D외고 출신, 엘리트 집안, 압구정 H아파트 살고, 법조인이 되겠다며 2학년 겨울부터 김준호 민법강의를 끼고 살기 시작한 여자.

음악한답시고 까불다가 고등학교잘리듯 그만두고, 검정고시 패스  독학으로 맨투맨과 정석을 달달 외워 기적적으로 서울대에 들어온 , 그저 사람이 좋아 데모판을 전전하던 미래가 없던 남자.

그래서인가 둘이 사귄다는 소식은 당시 우리과를 강타한 빅뉴스였다.

어쩌다 둘이 같이 있는 걸 목격한 학우는 마치 희귀템을 획득한 것처럼 상황을 부풀려 말하기도 했다. 난 전혀 신경을 안 썼으나, 그녀는 싫어했다.

나한테도 고시 공부를 권했으나, 싫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그 때 권유를 따라 고시를 시작했다면 인생의 많은 부분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겠다.

서양사학과 프랑스사 수업을 같이 들었고, 외국어 공부라도 하라는 충고는 받아들여 불어 1, 2와 회화 등의 수업을 수강했다.

워낙 라이프 스타일이 달라서 자잘한 다툼과 묘한 긴장이 항상 함께였다.

가끔은 고시생의 스트레스를 나에게 집중적으로 분출하는 거 아닐까, 나아가 고시생의 남자친구는 모두 그런 용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루했던 날씨 이야기-

"집은 어디?"

"용인. 네 달 뒤엔 둘째 태어나"

"와! 진짜? 축하해"

눈치채지 못했는데, 말을 듣고 보니 배가 살짝 불러있었다.

"아들은 초등학교 입학했겠네?"

"어. 일학년. 아내 일 때문에 아직 김해에 있어. 사업 정리되는대로 서울 올라오기로 했어"

"부인도 고생이시네. 네가 잘해야겠다"

"응"(끄덕끄덕)

"약속 있어서 가볼게, 회사도 가까우니까 다음엔 식사라도 같이 하자. 전화번호 그대로지? 연락할게"

"그래. 조심해서 가"

"하하하. 어째 넌 말투가 하나도 안 변했다. 여전히 무심하고 텅 빈 사람같네. 그래도 뭔가 열중하고 있는 것 같아 멋있어"

그렇게 우리는 손을 흔들고 웃으며 헤어졌다. 3분정도였을까.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는 날엔-

이후로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나도 바쁘기도 했지만, 딱히 따로 마음을 일으켜 만나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물론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스물 하나. 서툴렀지만 뜨거웠던 석달, 이후론 의무와 일상이 된 만남, 그리고 겨울 초입에 이별. 그 짧았던 사귐에 뭘 더 보태거나 미련이 남을 것도 없었기 때문일까.

나중에 친구를 통해 사법연수원에서 만난 사람과 결혼했고, 3분 마주침 뒤 얼마있지 않아 싱가포르인지 말레이시아인지로 해외근무를 갔다고 들었다.

'어디서든 잘 살고 있으면 됐지 뭐'

그 정도인 것 같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을 뿐. 다만 그녀도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다면, 무언가를 남기며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하게 된다.

근데, 나는 무얼 남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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