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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을 거닐다 Jan 10. 2020

가이드북에 의존하는 삶?

II. 길 위에서

요즘에는 인터넷의 발달로 SNS를 통해 여행 정보를 공유하지만, 예전에는 여행 특히 해외여행을 가면 가이드북을 한번 훑고 가거나 손에 쥐고 다니는 게 다반사였다. 종이책이냐 인터넷 매체이냐 도구만 바뀌었을 뿐이니 현재의 가이드북은 인터넷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이드북은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자에게 길을 알려주고,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소중한 동반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가이드북이나 SNS 정보에만 너무 의존하는 여행자들을 볼 때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예를 들면 식당의 경우 가이드북이나 인터넷에 소개되어 있는 곳만 쫓아다닌다든지 관광지의 경우도 필수코스로 소개된 곳만 간다든지 말이다.


나 역시 가이드북이나 인터넷을 참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략적인 정보를 얻을 때는 먼저 경험한 사람들의 후기나 소개가 너무나 반갑고 감사하다. 꼼꼼하게 정리해서 소개해놓은 사람들의 글과 사진을 보면서 '세상엔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라고 감탄하며 감사하게 정보를 얻는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따르지는 않는 편이다. 특히 식당의 경우는 가이드북이나 인터넷에 소개된 곳을 가볼 때도 있지만,  길을 걷다 우연히 들른 로컬 식당에서 천상의 맛을 경험할 때가 많았다. 관광지의 경우에도 가이드북에는 없지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어선 발걸음이 멋진 풍경을 선사해 줄 때도 더러 있었다.



우연히 들어간 로컬식당에서 맛본 꿀맛 점심


방비엥에 머무르는 어느 하루, 탐 짱이라는 동굴에 가면 그 앞에서 방비엥 전경을 볼 수 있다 하여, 자전거를 대여해 가보기로 한다. 여행자 거리에서 탐 짱까지는 그리 멀지 않아 걸어가도 되고, 자전거를 타고 가도 된다. 탐 짱 말고 이 참에 방비엥 여러 곳을 자전거 타고 돌아보자는 생각으로 자전거를 대여한다.


탐 짱에 가기 위해서는 방비엥 리조트 앞에서 통행료를 내야 한다. 방비엥을 흐르는 메콩강을 건너 탐 짱이나 블루라군을 가기 위해서는 몇 개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매번 그 앞에 있는 리조트나 호텔에서 통행료를 받는다. 고깟 조그만 다리 하나 건너는데 매번 2만 킵 (2-3 달러)를 받아가며 돈 버는 게 어이없긴 하지만, 다행히도 현지 주민들에게는 무료이다.  


리조트 안 숲길
에메랄드 빛 연못
탐 짱 동굴 앞에서 본 방비엥 전경. 우리나라 논과 비슷한 풍경.
방비엥 하이웨이


동굴에서 내려와 자전거를 타고 이곳저곳 달려 본다.  이 곳은 방비엥의 소위 'Highway'. 하이웨이라고 하지만, 비포장 도로이다. 라오스는 돈이 없어 개발이 잘 안되고 있다고 하는데(2012년 당시), 라오스 사람에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여행자인 나에게는 그리고 여행자 입장이 아니더라도 초발전된 도시 생활만 해 온 내가 보기에 오히려 이렇게 발전이 더딘 곳에서 사는 라오스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축복받은 듯하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 관점이고, 그들에게는 개발이 간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개발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그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것인데, 그것이 어디 쉽겠는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다 됐다. 숙소가 있는 여행자 거리로 가서 밥을 먹을까 하다 여행자들이 잘 안 가는 로컬 식당에서 현지스러운 음식을 먹어보고 싶어, 하이웨이 상에 있는 한 식당에 들어갔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내가 들어가니 주인이 말한다.
"여기는 라오 음식밖에 없어요."

 이에 내가 흔쾌히 대답한다. "더 좋아요, 전 라오 음식 먹고 싶어서 여기 온 거거든요." 

메뉴판을 건네받았는데, 띠용~~ 라오어 메뉴판에, 가격도 아라비아 숫자가 아닌 라오 숫자로 쓰여 있다.

다행히 주인이 영어를 한다. 그래서 내가 이전에 책에서 봤던 라오스 국민음식인 랍(LAAB)이 있냐고 물으니 있단다. 소, 돼지, 생선 세 가지 중에서 고르라 해서 생선을 먹어보기로 한다. 이 앞 쏭강에서 잡은 물고기냐고 물으니, 당근이란다. 갈증 해소를 위해 라오 비어도 한병 주문한다.


음식이 나오고 한입 넣었는데, 이거 이거 맛이... 맛이... 너무너무 끝내주는 거 아닙니까!

청양고추와 같은 매운맛이 제대로 얼큰해서 한국인의 입맛에 딱이다. 내가 너무 맛있다고 하니까 주인이 맵지 않냐고 묻는다. 나는 매워서 좋다고 엄지 척을 해줬다. 이때만 해도 다른 곳의 랍을 안 먹어봐서 몰랐지만, 이후에 라오스 다른 어떤 곳에서 먹은 랍보다 맛있었다.

  

밥을 먹으며, 주인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젊은 청년이다. 보통 라오스 사람들이 하는 영어는 끝을 잘라먹어서 알아듣기가 힘든데(예를 들어 time은 '타이'로, relative는 '뤨라'로 eight은 '에이'로, 라오 말에 종성이 흔하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청년은 영어가 매끄럽다. 영어를 잘한다고 말해 줬더니 쿠바에서 몇 년간 바를 했단다. 지금은 접고 들어와서 여기 식당을 운영한다고 한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후 맛있는 식사에 감사하며, 길을 나와 다시 자전거 타고 신나게 달렸다.




나만 만끽한 비밀의 정원


푸른색으로 칠해진 가옥들 덕분에 블루시티(Blue City)란 별명으로 알려진 인도의 조드뿌르(Jodhpur). 성 주변에 거주하던 브라만들이 다른 계급과의 차별화를 위해 집의 벽을 푸른색으로 칠했던 전통 때문이라고 한다. 라자스탄 지방 일와르 왕조에 의해 세워진 메헤랑가르 성에 올라 바라보는 푸른 도시의 전경이 청명한 기운을 불러일으킨다. 인도 라자스탄 지방(조드뿌르, 자이살메르, 우다이뿌르 등)에는 대표적인 성이 있는데, 나에게 그 성 중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조드뿌르의 메헤랑가르 성(Meherangar Fort)이다. 


성 안에서 걷고 쉬고 생각한 반나절의 시간이 무척이나 여유롭고 풍요로웠다. 특히 오디오 가이드가 제공되어 라자스탄의 왕조에 대한 역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입장료가 비싸다고 성 외곽만 둘러보고 패스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데, 입장료 내고 박물관으로 개조된 왕궁 내부를 둘러보기를 추천한다. 박물관에 소장된 물품을 보는 것 이상으로, 왕궁 내부의 건물들을 둘러보는 것이 즐겁고 흥미롭다.  

 

비록 나는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조드뿌르는 영화 <김종욱 찾기>로 한국인들에게 각별한 도시이기도 하다. 조드뿌르 사람들도 이를 알아, 내게 '김종욱'을 찾으러 온 거냐고, '김종욱'을 찾았냐며 질문하기도 했다.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는 더 흥미로울 수 있는 조드뿌르. 나도 한국 가면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며 조드뿌르 여행을 추억하는 것도 재미가 쏠쏠할 듯 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조드뿌르를 추억하며 영화를 봤다. 영화 감상평은 보통)


메헤랑가르 성 외부.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성에 매료된다.
블루시티라는 애칭의 조드뿌르 전경
중세 시대 성은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요새로도 쓰였기에 대포가 구축되어 있다.
미로 같은 계단이 인상적


창을 통해 도시를 바라보다.
왕의 침실
궁의 내부 마당 같은 곳
성벽 위에 앉아 도시 바라보기


메헤랑가르 성 투어를 마치고, 출구 쪽에서 두 갈래 길이 보인다. 한쪽은 사람들이 조르뿌르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고, 또 다른 길은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이다. 궁금해서 인적이 드문 길로 가본다.

  

조금 걸어가 보니, Chokelao Bagh라고 정원(garden) 이름이 쓰여 있다. 경비원이 서 있길래, 들어가도 되는 곳이냐 물으니 들어가도 된다고 허락해준다.  인적이 거의 없어 약간 오싹한 느낌도 있었지만, 마치 비밀의 정원에 들어온 것 마냥 호기심이 샘솟는다. 홀로 아름다운 풀과 꽃 속을 거닐며, 성에 사는 공주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상상해 보기도 했다. 건조하고 거친 성의 느낌을 보완해주는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정원이었다. 돌아와서 가이드북이나 인터넷을 찾아보니 메헤랑가르에 대한 정보는 넘쳐나지만, Chokelao Bagh에 대한 정보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찾아보니 몇 년이 흐른 지금도 가이드북이나 여행자 SNS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정원 가는 길


와우... 웅장한 성과는 또 다른 느낌의 아기자기한 정원


영화 <비밀의 정원>이 떠오르는 길
정원에서 바라본 메헤랑가르 외벽


혼자여서 약간 무섭기도 했지만, 저 계단을 지나 문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호기심을 거둘 수가 없다.


계단을 내려오니 올라가는 계단으로 들어가는 문이 나옴



동굴 같은 계단을 지나 문을 통과해 또 다른 계단을 올라가니 펼쳐지는 숨 막히는 풍경


동굴 같은 계단을 지나 또 다른 문을 통해 계단을 올라가니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장관이다. 성채 뒤에 이런 풍경이 숨겨져 있었다니. 빠삐용이 요새를 탈출해서 나왔을 때 풍경을 마주한 느낌 같달까..


조용하고 고즈넉한 정원


정원을 산책하고 나오는 길에 석양이 비춰 든다. 가이드북을 따라 그리고 인파를 따라 내려갔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고즈넉한 정원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다른 길을 택한 것에 대한 만족감이 밀려든다.




인생의 가이드북?


"이 집은 꼭 가봐야 돼. 사람들 추천이 장난 아니야."
"여기 맛집이래요."
여행 중에 종종 듣던 말이다.

가이드북의 정보를 맹목적으로 쫒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어떤 특정한 장소로의 여행은 어쩌면 한 번뿐일 수 있고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이미 검증된 곳을 선택해 실패를 최소화하고 싶은 마음일 수 있겠다.


그런 모습을 보면 사람들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을 우르르 따르고, 사회가 이상적이라고 정해놓은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불안해하기 일쑤다. 그래서 검증된 안전한 길을 택하려 하고, 규격화되고 정형화된 삶을 추구한다.


물론 검증된 안전한 길을 추구하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것도 개인의 선택이니까. 그러나 다만 불안해서 그런 선택만 하고 있다면, 멈춰서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이나 정해진 규범이나 틀에 맞춘 길 말고, 내가 끌리는 것을 시도해보기도 하고, 우연히 발견한 길목에 들어서 보기도 하고, 인적이 드문 길을 선택해 보면 어떨까? 좀 실패하면 어떤가? 일부러 실패를 경험하기 위해 누가 봐도 뻔히 아닌 길을 택하고 아닌 걸 경험하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겠지만, 실패할까 두려워서 혹은 그저 알 수 없는 막연한 불안을 피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다른 사람이 정해놓은 길, 사회가 추천한 길만 가는 것은 인생에서 풍부하게 경험해 볼 수 있는 것을 놓치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닌 내 호기심과 우연으로 발견하고 선택한 길 위에서 오히려 내게 맞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수도 있다.


여행자에게 여행 가이드북이 유용한 도구로 쓰이는 것처럼 인생에서 다수의 사람들과 사회가 제시하는 규칙과 정보도 유용한 도구와 지침이 될 수 있다. 아예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남들과 같은 경험을 하지 않으면 소외되거나 실패하거나 후회할까봐하는 두려움에 그 기준들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어쩌면 당신이 쓸 수 있는 당신만의 멋진 가이드북을 놓치고 있을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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