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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을 거닐다 Mar 11. 2020

Be Myself

II. 길 위에서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현지인이나 다른 여행자를 만나서 잠시 시간을 함께 보내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보통은 여행 정보의 교환, 여행에서 겪은 일, 현재 느끼고 경험하는 것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취향과 가치관을 공유하기도 한다. 장기 여행이다 보니 여행의 목적을 묻는 사람들도 있었고, 여행 오기 전에 뭐하던 사람인지를 묻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땐 나는 간단히 회사 다니다 그만두었다고만 말하곤 했다.


한국인들의 경우 가끔 어느 회사를 다녔는지, 심지어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를 묻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런 정보를 묻는 한국사람들의 습성은 익히 알지만 여행자들끼리 그런 정보를 왜 묻는지 납득은 잘 안되었다. 회사 면접도 아니고, 취업정보 교류회 할 것도 아니며 동문회 할 것도 아니지 않는가. 한국 돌아가서 뭐 할지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대학생과 친해져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고, 조언을 구하기에 조언해주다가 말하게 된 경우는 있긴 하다.  여행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런 질문이 더 불편해지며 거부감이 들었는데, 여행기간에 비례해 나는 스스로 내 겉껍질보다는 내 본질과 더 만나고 있었고,  '지금 -여기'에서의 삶과 경험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괜찮은 학교를 나오고 괜찮은 직장을 다녔다는 이유로 한때  이런 것들에 기대어 내 존재를 의식하기도 했다. 물론 사회적 영민함을 갖추고 있는 터라 티내고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스스로도 이런 것에 대해 일종의 자부심 내지는 우월감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10대에서 20대 어린 시절에는 분명히 있었고, 30대 초반까지도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나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것들과 나만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져 감에 따라 그런 조건들은 그저 나를 구성하고 있는 아주 작은 정보, 또는 과거의 것이므로 희미해진 정보에 불과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변화가 내가 가진 우월한 조건을 신경 쓰지 않게 함과 동시에 내가 가진 열등한 조건 또한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해 주었다.


이러한 변화는 30대 초반에 다녀온 이 장기여행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던 것 같다. 오랜 시간 홀로 다니는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현재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고, 현재 만나는 사람과 이 순간 교류하고, 현재 내 눈 앞에 보이는 풍경에 심취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현재에 더 집중하게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여행 중 만나는 대부분은 내 조건이나 과거 성취에 의미를 두지도 않고, 말해도 잘 모를 사람들이었기에 그런 조건이나 포장지는 쓸모가 없었다. 그런 겉껍질을 들이밀지 않아도 나라는 사람으로서 좋은 관계를 맺게 되고,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게 되니 더욱더 본질에 더 가까워질 수 있었고 무엇보다 만족스러웠다.  아마도 이런 경험이 무엇도 걸치지 않은 있는 그대로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데 출발점이 되지 않았나 싶다.


여행 그리고 돌아와서 한 이후의 경험을 통해 이런 조건들은 중요도가 낮아졌고 때로는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게도 되었다. 물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조건들이 나를 구성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융 심리학에는 라틴어로 '가면'이라는 의미를 지닌 페르소나(persona)라는 개념이 있다. 사회적 인격, 외부적 인격이라고도 불리며 우리가 맡고 있는 다양한 역할에 적합한 다양한 페르소나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살아가는 데 있어 그 페르소나를 적절히  잘 사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중 어떤 페르소나로 역할을 수행해야 할 때는 내가 가진 조건이나 이전의 경력 등을 제시하고 사람을 대면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심리상담 전문가로서 내가 전문적인 공부와 수련을 했음을 내담자에게 밝히는 것이 윤리적이기 때문에 내가 어디서 무엇을 공부하고 수련했으며, 어떤 자격을 갖추었는지 제시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전문적 상담 관계에서조차도 이후의 만남은 그런 자격에 얽매인 관계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 본질 대 본질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 성공적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가고 충만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한 페르소나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조건에 집착하거나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적으로 사람을 만날 때에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조건 또는 라벨을 뜯지 않은 채로만 만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상대를 바라볼 때도 그 라벨을 확인하고 가늠하며 관계를 저울질한다. 라벨이 부착되어 있는 상품으로서의 만남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그 라벨이 없어지면 불안하다. 어떤 특정 페르소나를 벗지 못하고 항상 가면을 쓴 채로 만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예를 들면 동호회 같은 모임에 나와서도 자기가 어떤 회사를 다니고 어디에 살며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어떤 차를 굴리는지를 깨알 같이 알리는 사람이다. 정작 듣는 사람들은 안.물, 안.궁인데 말이다. (안.물.안.궁 =안 물었고 안 궁금하다는 의미의 신조어)




낯선 곳으로의 여행의 좋은 점을 말할 때 흔히들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되어서 좋다'고들 한다. 그런 묘사도 충분히 합당하고 수긍이 되기는 하지만, 나에게 있어 여행은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어서 좋은 것'이다. 물론 '또 다른 나'의 의미가 '나 자신'과 같은 의미이다. 

예전에는 '진정한 나 자신이 될 수 있어서 좋은 것'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수년이 흐른 후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진정한 나 자신이라는 게 단 하나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민을 거듭한 결과 페르소나를 벗어던진 자아만이 진정한 자신은 아닐 것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다양한 페르소나,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조건과 포장 또한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기에 부정할 필요는 없으며 부정해서도 안 된다. 다만 여행 중에 포장지 벗기고 라벨 떼고, 본질적인 나 자신으로 존재하면서 타인과 관계 맺을 수 있어 좋은 경험이 되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 순간에 충분히 나답게 존재하는 경험을 통해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한번 이 자유를 발견하고 체험하게 되면 그 맛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일상으로 복귀해서도 여전히 이 충만한 경험을 더 많이 하려고 했다. 여행이 나에게 준 또 하나의 삶의 지혜이다.




인도의 고아라는 해변 마을에 묵을 때였다.


어느 날 저녁,

이어폰을 꽂고 노을이 지는 해변을 걷는다.

아름다운 풍경과 감성을 자극하는 선율에 내 몸이 가벼워진다.

사람들이 지나가는데도 구애받지 않고 춤을 춘다.

이 순간 온전히 나일 수 있음이 행복하다.

공복에 물을 마시면 위장이 쭉 빨아들이는 느낌이 들 듯이,

그저 뜻이 좋아 외웠던 시가 내 뼈와 살 속으로 전율처럼 깊이깊이 느껴졌다.

이게 현존하게 되며 느끼는 자유로구나.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알프레드 D. 수자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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