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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을 거닐다 Mar 12. 2020

일출과 일몰이 알려주는 지혜

II. 길 위에서

일출과 일몰의 동일성 -탄생과 소멸– 반복과 순환


인도의 디우라는 고즈넉한 해변 마을에서 홀로 바위 위에 앉아 2시간 가까이 석양의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며 감동하고 또 감동한다. 


디우의 일몰


오렌지색 태양을 품은 회오리 구름은 마치 카푸치노 거품 같았고, 석양빛에 출렁이는 바다의 물결은 마치 생명이 태동하는 배 속 아기의 초음파 사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면 이 바다가, 이 자연이 태곳적부터 우리의 생명을 품은 존재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여행 와서 매우 자주 하는 일 중 하나가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는 일이다. 매일 보는 일출과 일몰이지만, 그래도 매번 감동스럽다. 매일 반복되는 것이지만, 여행자의 눈으로 본 태양의 뜨고 지는 모습은 매번 다르게 보인다. 그러고 보면, 일상적인 것도 설렘을 갖고 오밀조밀 관찰하고 다른 관점으로 조망하면 감동을 가지고 살 수 있을 텐데란 생각이 들었다. 일상을 그저 지루한 반복으로 여기고, 순간을 무심코 흘려보내기에 의미 없고 별다른 감동이 없는 삶이라 여기는 게 아닐까. 뜨고 짐을 반복하는 태양에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 떠올랐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 삶과 이 순간은 무한 반복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을 긍정하며, 순간의 고뇌와 기쁨 모두를 받아들이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도 감동을 지속할 수 있으려면 반복된 매 순간을 긍정하는 마음의 습관을 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이 아모르파티(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가 아니겠는가. 


생각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또 한 가지 생각, 일출과 일몰의 순간을 찍은 사진을 보면 어떤 것이 일출이고 어떤 것이 일몰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바라나시에서 찍은 '일출' 사진을 여행 중에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올렸더니, 한 지인이 물었다. 


바라나시의 일출


"이 일몰은 어디에서 찍은 거예요?" 


그 질문을 들으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은 기실 지구가 자전하며 생기는 현상으로 해는 뜨고 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 눈에 방향만 다를 뿐 해가 '떠오르는 것'이나 '떨어지는 것'이나 찰나에는 동일한 현상이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면 탄생과 소멸 또한 찰나는 동일한 것이 아닐까? 일출과 일몰을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시간이 구분해 주듯, 탄생과 소멸 또한 인간이 만든 관념이 구분해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모든 것은 같은 연속선 상에서 순환할 뿐인데 말이다. 그 커다란 순환의 고리 속에서 모든 것은 다 연결되어 있고 결국은 하나로 관통하는 것인데, 우리는 서로 구분 짓고, 반목하고, 별것 아닌 것에 집착하며 아등바등하고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낙타에서 사자로 그리고 아이로: 인간 정신의 변화


워낙 인도가 그렇기도 하지만, 특히 고아는 사람 마음의 발목을 묶는 곳이다. 도시와 단절된 해변이라 그런지 한번 들어오면, 나갈 마음이 도통 생기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히피들의 천국으로 자리매김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 떠날 거냐고 묻는 다른 여행자에게, "몰라, 마음이 동할 때?"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천성적으로 히피가 아닌가 보다. 자유로움이 좋지만, 그렇게 한 곳에서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살라면 못 사는 체질인 듯했다.


다시 한번 니체를 인용할 수밖에 없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첫 장,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란 제목의 글에서 니체는 인간 정신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변증법적 비유에서 인간 정신은 낙타, 사자, 아이의 단계로 발전해나간다.


첫 번째 정신은 자신의 등에 짐을 올리는 주인에게 아무런 저항도 없이 등을 내어 주는 '낙타'처럼 아무런 반성적 사고 없이 기존 사회적 관습에 굴종하여 맹목적으로 따르는 상태이다. 이 상태는 지워진 짐이 무겁고 고통스럽지만,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반면 자유가 없이 자기 소외를 경험하며 노예적 정신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두 번째 정신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지워진 짐을 벗어던지고 자유정신을 획득한 '사자'처럼 억압에 저항하고 굴종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대로 살게 되는 단계이다. 이 상태에서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낄 수 있지만, 새로운 지향점이 없기에 목적 없이 방황할 수밖에 없다.


세 번째 정신은 변증법적 정신 단계의 마지막 단계로, '아이'의 상태이다. 아이는 어떠한 존재인가? 니체에 따르면, 아이는 '순진함이고,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 최초의 움직임이자 성스러운 긍정'이다. 아이는 모든 것을 놀이로 대하며, 관습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는 늘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나간다. 아이가 놀이하는 것은 누군가가 시켜서도, 무언가를 벗어던지기 위해서도 아니다. 다만 그 순간 어떤 것도 의식하지 않고 그 자체를 즐기며 창조할 뿐이다.


그 순간 이 대목이 떠오른 이유는 '내 느낌에' 고아에 장기간 머물며, 강태공처럼 세월을 낚는 여행자들이 '사자'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내 느낌'을 강조하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상태를 단정 지어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라는 인간을 대상에 비추어 보면 고아에서의 시간과 더 길게는 이번 여행이 '사자'의 정신 단계로의 변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사자로 지냈다면, 이제는 바야흐로 '아이'로 진화 발전해야 할 때라고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현재 삶의 조건을 긍정하며 자유로운 정신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가는 아이의 정신이 되어야 할 때였다.


돌아갈 여정을 정하지 않고 떠나온 길이었다. 발길 닿는 대로 다니면서 정신의 불필요한 쭉정이들을 비워내고 본질적인 알맹이로 채워졌을 때 돌아가겠거니 했다. 이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깨닫게 되었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하는 열망이 생겼으므로 주저할 것이 없었다. 우선 한국 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2주. 한국에 들어갈 일정이 잡히니, 남은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 여행이 평생 지속될 것이 아니기에, 그리고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을 쪼개서 큰 결단을 하고 떠나왔기 때문에 그동안도 하루하루, 매 순간을 소중하게 즐기며 지내왔지만, 솔직히 여행 후반부 고아에 와서 많이 늘어져 있던 게 사실이다. 물론 때로는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멍 때리는 것도 필요한 시간이지만, 매일 이렇게 세월만 낚는 것은 내가 지향하는 바는 아니다. 그래서 남은 2주 동안 하나라도 더 느끼고 더 보기 위해 시간을 알차게 써 보기로 한다. 




일출과 일몰의 차이 – 탄생과 죽음의 과정-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제 이틀 뒤면 수도인 델리로 떠날 예정이었다. 매일 같은 일상이었지만, 아침, 저녁 해변 산책을 하며 눈에 고이고이 더 많이 담아둔다.


그러면서 발견한 것, 전에 디우의 일출을 보면서는 일출과 일몰이 인간 인식의 차이에 의한 것일 뿐 그 작용이나 모습은 같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둘이 비슷해 보이면서도 다른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중 내가 느낀 큰 차이는, 일출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어야 아름다움과 감동이 배가 되고, 일몰은 적당히 구름이 있어야 제 맛이라는 것이다. 같은 장소의 같은 하늘이고, 같은 구름이지만 세밀한 눈길로 바라보면 어느 하루도 같은 날이 없었다. 인위적으로 만들래야 만들 수 없는, 복제 불가능한 것으로 '스스로 그러하다는' 말 그대로의 자연(自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톤레삽 호수의 일몰


우다이뿌르 일몰


자이살메르 일몰


메콩강 일몰


순간 우리의 삶도 비슷한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서 떠오르는 태양은 순수함 그 자체로 태어나는 생명을 떠올렸다. 태양이 지는 일몰 때도 물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말갛게 동그란 해가 쏘옥 하고 지평선 아래로 떨어질 때가 있지만, 그때는 그 밋밋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앞서 디우의 일몰을 보며 느꼈던 것처럼 삶과 죽음이 순환적으로 연결된 것이라는 자각을 함으로써 쓸데없는 집착을 버릴 수 있지만, 만약 한평생 살아가며 아무런 변화 없이 태어날 때 그 모습, 그 정신으로만 살아가다 죽는다면 그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럴 수도 없을뿐더러.) 살아가며 우리는 많은 것에 영향을 받고, 때로는 충격을 받아 얼룩덜룩 해지기도 하고, 그것을 극복하며 만들어진 영광의 상처도 얻게 되고, 여러 가지를 배우며 변화하게 된다. 그래서 죽을 때는 말갛게 애 띤 얼굴로만 죽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죽게 되는 것이며, 그때 그 모습은 어떻게 살았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며, 그런 흔적과 궤도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삶에서 우리는 그 사람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것이다. 구름과 어우러진 일몰이 더 아름답고 각양각색인 것처럼 말이다.


결론적으로 탄생과 소멸은 작용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자각으로부터 쓸데없는 집착을 떨쳐 낼 수 있지만, 소멸까지 가는 과정에 따라 그 모습이 현격히 달라지기에 우리 삶에 책임을 지고 잘 살아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국으로, 집으로, 내 삶의 자리로 다시 돌아갈 날을 앞두고 든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삶의 무게감과 책임감, 그리고 선택으로 인한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면해야 하겠지만 앞으로 삶의 자양분이 될 수 있는 이런 생각들을 할 수 있음이 소중하고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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