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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 May 19. 2022

노예의 탄생, 착각의 시작

노예의 탄생, 착각의  시작

 

해변 쪽에서 바라본 카페 전경. 자주 오시던 손님이 드론으로 촬영한 사진을 보내주셨다. 덕분에 바닷가 쪽에서 바라본 카페가 이렇게 운치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28년.

벌써 이렇게 됐나 싶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강산이 두 번 하고도 반 상 바뀌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이곳저곳 많이 옮긴다는데 참 한 곳에서 주야장천 오래도 버텼다. 능력이 없어서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최면을 건다. 위안도 해 본다. “몇몇 곳에서 은밀한 제의를 받아본 적도 있었으니 아닐 거야.”   

단 하나 있던 내 동기는 입사한 지 얼마 안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친하게 지내던 동료, 선배, 후배들도 하나 둘 사라지고 없다. 이제 주변에는 이름과 얼굴이 잘 매치되지 않는 후배들이 상당수다. 이름을 불렀다가 틀리면 안 되니 아예 부르지 말자.  

모르는 후배들이 많아졌다는 건 회사를 떠나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앞으로 3년만 있으면 정년이다. 그전에 월급도 깎인다. 임금피크제 탓이다. 말로는 이젠 구세대가 뒤로 물러나고 새로운 세대들에게 길을 터줘야 한다고 떠들지만 막상 내 문제로 다가오자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하면 젊은 친구들한테 욕먹을 게 뻔하지만 튀어나오는 걸 어쩌랴. ‘망할 놈의 임금피크제.’

막상 떠날 때가 되니 뭘 해야 하나 눈앞이 아득하다. 아들이 한 얘기도 떠오른다. “아빠는 내가 뼈골 다 빼먹을 때까지 있어야 돼.” 아빠랑 오래 같이 살겠다며 한 말이라는 건 알지만 계속 돈을 벌어야 한다는 소리로 들리는 건 부담감 때문일까. 해답은 하나밖에 없다. 퇴직해도 일하자.

한때 일 때문에 대기업과 지자체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적이 있다. 모두는 아니지만 몇몇은 퇴직을 앞둔 세대들의 인생 이모작을 위해 창업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한다. 귀가 쫑긋 세우고 들어 봤지만 모두 그림의 떡. 빅데이터 활용법, 인공지능(AI) 전문가, 이름도 외기 힘든 프로그래밍 언어들... 평생 이과, 기술과는 담을 싼 문과 출신에게는 온통 외계어일 따름이다. ‘문사철’(文史哲)이라는 한탄은 취준생들만 하는 게 아니다. 아들의 얘기가 다시 귓가를 때린다. “나중에 나는 이 집에서 살면 되지만 엄마 아빠는 어디서 살아?”

어느 날 아내가 말한다. “카페라도 해야 할까 봐.” 지어놓고 빈 채로 놔뒀던 강화도 건물. 솔깃하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장밋빛 미래가 펼쳐진다. 바로 옆이 강화도 유일의 해수욕장이다. 여름이면 해변이 사람들로 미어터지고 길은 자동차들로 주차장이 되는 곳이다. 게다가 당시만해도 주변에 카페가 몇 곳 되지 않았다. 손님 걱정 안 해도 될 성싶었다.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햇빛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차 한 잔 멋들어지게 하며 노을을 감상환다. 캬~~ 그림이 따로 없다. 얼마 안돼 나만의 착각이라는 게 분명해졌지만 꿈은 언제나 달콤했다.

당시에는 품목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악성 베토벤도, 학교에서 배운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도, 심지어 고종까지 커피 마니아 아니었던가. 진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장 자크 루소조차 죽기 직전 “더 이상 커피를 들 수 없겠구나”라고 했다 하니 더 이상 말해 뭐 하겠는가. “하자.”

우선 비용을 최소화해야 한다. 냉장고, 냉동고 등 전자제품은 최대한 부담이 되지 않도록 마련한다. 냉장고는 12개월 할부, 냉동고는 중고. 그래도 에어컨은 싸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눈 딱 감고 이름값이 있는 대기업 제품을 산다. 문제는 커피 머신. 아무리 싸도, 중고라고 해도 500만 원 아래로는 구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리 부부는 모두 기계치. 기계에 한번 이상이 생기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불러야 한다. 여기는 섬 아닌 섬이다. 강화대교도 있고 초지대교도 있어 사실상 육지와 다를 게 없지만 무슨 일이든 시키려고 하면 육지보다 최소 50% 이상 비싸다. 심지어 택배를 시켜도 그렇다. 자원봉사자가 아닌 이상 한번 사람을 부르면 지갑이 거덜 날 게 뻔하다.

아내가 대안을 제시했다. 모카포트. 몇만 원이면 살 수 있으니 돈 걱정할 게 없다. 그때는 몰랐다. 모카포트로 만든 커피가 어떤 맛인지. 어느날 한 손님이 남긴 뼈 때리는 후기를 남겼다. '이렇게 맛없는 커피를 내놓고 장사를 하다니. 기대를 하고 간 내가 바보지. 내가 그 카페 다시는 가나 봐라.' 나중에 커피를 드립으로 바꾼 것은 그 손님의 불만 때문이었다. 아프지만 고마운 불만이다. 

인테리어는 아내가 책임지기로 한다.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 빈 벽면을 채우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해외 유명 가구점과 동네 가구점을 돌아다니며 탁자와 의자를 고른다. 카운터도 철제 앵글을 붙여 골격을 만들고 벽돌 형태의 벽지와 판자를 붙여 직접 만든다. 그렇게 힘들이고 땀을 흘렸더니  어느 곳보다 아늑하고 따뜻한 공간이 됐다.  

다 하고 보니 뭔가 허전하다. 고상한 분위기가 나야 하는데... 맞다. 책을 갖다 놓자. 일단 집에 있는 책들을 가져가고 회사에 일주일에 한 번씩 출판사에서 서평을 써 달라고 보내오는 책들이 있으니 나머지는 그것으로 챙겨 넣으면 될 터. 그렇게 갖다 놓은 책이 수백 권은 되는 듯싶다. 다 하고 보니 뭔가 있어 보인다.

돌아보니 내가 한 게 별로 없다. 책 빼고는 다 아내가 한 것이지. 직장 나가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남편과는 달리 아내는 '요술 손'을 가졌다. 옛날 TV에 방영됐던 미국 드라마가 생각난다. '아내는 요술쟁이(Bewitched)'. 그 요술쟁이가 지금 내옆에 있다. “디자인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라는 아내의 말이 맞다. 누군가 내 직업을 표현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말만 많지 실제로 쓰려면 하등 쓸모없는 인간. 반박하고 싶은데 말이 떨어지질 않는다.

하여튼 끝났다. “이제 시작이다. 돈 벌고 폼 내는 일만 남았다.” 착각은 이렇게 시작됐다. 고생문이 활짝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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