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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 May 21. 2022

Latte is horse

꼰대 무급 알바는 서럽다

'이걸 얘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손님이 왔다. 커플이다. 카페를 찾는 손님의 3분의 2 이상은 연인이니 여기까지는 이상할 게 없다. 문제는 그다음. 여자 손님의 의상이 눈에 들어왔다. 등이 훤히 보인 원피스. 얼핏 보면 등에 달린 지퍼가 내려간 것 같았다. 그런데 남자 친구로 보이는 손님은 아무 말이 없다.

‘혹시 내가 모르는 게 아닐까.’ 머리는 계속 얘기하지 말라고 한다. '저건 패션일 수 있어. 내가 모를 뿐이야.' 문제는 사람에게는 머리만 있는 게 아니라 입도 있다는 사실이다. 커피를 주문하러 왔을 때 결국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말았다. “손님, 여자 친구분 등 지퍼가 내려간 것 같습니다.” 순간 여자 손님이 흘낏 쳐다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한다. “이 옷, 원래 그런 거예요.” 아뿔싸. 또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구나. 이러니 ‘꼰대’라는 얘기를 듣지...

50대가 카페를 하다 보면 이해 안 가는 손님들이 한 둘이 아니다. 원래 카페는 커피나 음료를 마시며 대화하러 오는 곳으로 생각했는데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게 아닌가 보다. 같이 와도 스마트폰을 보며 서로 딴짓을 하는 단체손님들, 사진을 찍겠다며 등의자를 창가로 가져가 드러누운 채 사진을 찍는 사람, 사진기를 들고 여친을 쫓아다니며 ‘찍사’ 노릇을 하는 남친 등등. 카페를 하기 전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모습들이다.

이해 못 하는 게 어디 손님뿐이랴. 아들의 행동도 이해하지 못한다.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제방에 문 닫고 들어가 하루 종일 무언가를 한다. 그때는 헤드폰을 끼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외계어까지 큰 소리로 지껄인다. 부모 입장에서는 한숨만 나올 뿐이다. 후배들에게 물어보니 요즘은 다 이런단다. 덧붙이는 게 이런 걸 가지고 말하는 사람은 꼰대란다. “선배. ‘라테는 말이야’라는 말이 괜히 나왔는 줄 알아요? 지금은 개성 시대예요. 서로 존중해야죠.”

얼마 전 TV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볼 때였다. 갑자기 ‘Latte is horse'라는 자막이 뜨는 게 아닌가. 저게 뭔 말인가. 한참을 생각하다 겨우 깨달았다. '라테는 말이야'구나. 이제 겨우 뜻을 알아들은 '라테'가 이제 외국어 영역까지 손을 뻗쳤구나. 조금 있으면 한자로도 나오겠구나. 그럼 '라태이마야(羅泰而馬也)' 정도가 되려나. 젊은 세대는 한자를 잘 모르니 그렇게까지 나가지는 않으려나. 갑자기 피곤함이 밀려온다.

원래 라테는 ‘우유를 섞은 커피’라는 의미 외에 부드러움이라는 표현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1867년 윌리엄 D. 호웰스가 ‘라테’라는 단어를 처음 썼을 때도 ‘기분 좋음’을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카페라테와 토스트를 아침으로 가져다줬을 때 나는 우아한 객실을 비추는 햇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라테’가 시간이 지나고 물을 건너와 ‘꼬장꼬장하고 고지식함’의 대명사로 바뀌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여기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어떤 블로그의 ‘나이 지긋한 노부부’라는 표현에도 격하게 아니라고 주장해 본다. 그럼에도 후배들과 같이 식사를 할 때면 ‘나 때는 말이야’라고 대화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

병원에 갔을 때의 일이다. 순서를 기다리는데 간호사가 '아버님 들어오세요' 한다. 종합병원이라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았기에 다른 사람을 부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간호사가 나와 눈을 맞춘 것이 아닌가. '아버님이라고? 환자분이 아니라? 내가 벌써 이런 말을 들을 나이인가, 아니 내가 그렇게 늙어 보였나' 충격이었다. 마음만 청춘이라는 말의 뜻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젊은 세대는 아직 덜 여물었다는 글들을 찾아보며 위안을 삼아 본다. 제법 많다. 고대 수메르인들의 점토판에 이런 말이 쓰여 있다고 한다. “도대체 왜 학교 안 가고 빈둥거리고 있느냐. 제발 철 좀 들어라. 수업 끝나면 바로 집으로 와라.” 14세기 초 스페인 프란체스코회 사제였던 알바루스 펠라기우스가 남긴 글은 지금 읽어도 어색하지 않다. “요즘 대학생들 정말 한숨만 나온다... 그들은 멍청한 자존심 때문에 자기들이 모르는 것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창피해한다.” 비슷한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왔다. 지금의 우리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래서 말한다. ‘그래 나 라테다. 어쩔래. 배 째!!!’

퍼뜩 예전에 썼던 글들이 생각이 난다. 게임 산업이 성장하려면 기반을 만들어줘야 한다. 게임을 마약과 동급으로 취급하지 마라. 기타 등등...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키운 청년들을 4차 산업혁명을 이끌 주역들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예전에는 구세대들이 젊은 세대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세상이 지금처럼 빨리 변하지 않았고 어제의 지식이 오늘에도 먹혀들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나. 지금은 다르다. 우리가 젊은 세대들에게 알려줄 지혜도 넘겨줄 기술도 별로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다. 19세기 학교와 일터에서 20세기 교사와 상사가 21세기 학생과 후배들에게 넘겨줄 지혜와 지식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다시 말한다. ‘라테 안 할 테니 버리지 말고 같이 살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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