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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 May 23. 2022

갑, 을이 되다-거꾸로 인생역전

‘갑’(甲). 을(乙)도 병(丙)도 정(丁)도 제치고 십간(十干) 첫째 자리를 당당히 꿰찬 존재.

28년간 직장생활을 한마디로 표현할 때 떠오르는 단어다. 혹자는 ‘사회 정의’를 외치고 누구는 ‘사명감’을 말하며 일부는 ‘사회적 지위’를 입에 담지만 내 직업은 한국 사회에서 '갑’의 자리에서 한 발짝도 물러선 적이 없다. ‘세월호 참사’ 이후 조롱 섞인 표현이 많이 쓰이기는 했지만 그것조차도 갑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기에는 힘이 부쳤다.

밥 한 끼 먹는 것만 해도 그렇다. 지금껏 직장 선후배를 만날 때를 제외하고 요즘 젊은 세대 표현대로 '내돈 내산' 식사를 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어쩌다 우리에게 밥을 얻어먹은 사람들은 '횡재한 날'이라 할 수 있다. 

메뉴도 남다르다. 남들은 비싸서 못 먹는 음식을 지겨워서 못 먹는 경우도 있다. 여의도 모 기관을 출입했을 때의 일이다. 인사차 간부들을 만나러 가면 항상 하는 얘기가 있었다. “어제 고생하셨을 텐데 해장하러 가셔야죠.” 그리곤 데려가는 곳이 열이면 열 모두 복집. 처음엔 ‘이렇게 좋을 곳을 오다니’하고 생각했지만 한 달 내내 복집만 간 후엔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죽하면 오늘은 제발 다른 것 좀 먹자고 사정까지 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천국이었다. 요즘은 세상이 바뀌어 복국은 구경하기도 힘들다. 

이뿐인가. 과거 기업이나 단체와 해외 행사를 가면 돈 쓸 일이 별로 없었다. 비행기표부터 숙박까지 모두 그들이 부담했다. 내가 돈 쓸 일이라곤 돌아올 때 가족들 선물을 사 오는 정도. 국내 행사에 가도 꼭 기념품이 따라온다. 그것도 비싼 것으로. 집에 있는 이탈리아제 스탠드도, 우리 애마 ‘초코’(우리 부부는 자가용을 이렇게 부른다)에 달려 있는 하이패스 단말기도 10년도 전에 열린 모 IT기업에서 받아온 것들이다. 이중 스탠드는 우리 사장님께서 '당신이 집에 가져온 것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라고 할 만큼 고급진 제품이다. 지금은 현장을 떠나 책상에 앉은 지 오래돼 모르겠지만 적어도 김영란법이 시행되기 전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 일반인들에겐 턱도 없는 얘기다.

기업 사장을 만나도 절대 ‘님’ 자를 붙이지 않는다. 사장의 ‘장’(長)이라는 한자에 존칭의 의미가 있기에 동어반복이라고 선배들이 그랬다. 학교에서 ‘역전’(驛前)이라고 해야지 ‘역전앞’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님’ 자를 붙이는 순간 서로의 관계에 상하가 생긴다. 국민을 대신한다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사장 밑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님’ 자는 날아갔다.  

내가 갑이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우리 직업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사회 여기저기에 넘치는 정보가 정부와 기업, 정치인 등을 통해 흘러들어온다. 내가 하는 일은 그것을 가공하고 공개하는 것이다. 만약 내 직업이 없었다면 정보는 그냥 무의미하게 흘러가다 버려질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SNS가 판을 치고 유튜브로 난리가 났어도 내 명함에 찍힌 직함보다 영향력이 적은 이유다.  정부나 기업이 전담 기관을 두고 관리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그래서 갑이다. 

세상 무서울 게 없는 갑이지만 명함이 사라지면 권력도 함께 소멸한다. ‘명함의 힘’이다. 퇴직한 선배를 만났을 때 '아무리 친했던 사람도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그냥 좀 아는 사람일 뿐이더라'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주말에만 가는 카페도 마찬가지. 카페 밖에서는 어깨에 힘을 주고 거들먹거릴 수 있지만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무급 알바일 뿐이다.  평일엔 갑으로 살다가, 토요일과 일요일, 공휴일에는 을이 되는 변신술. 인생 역전이기는 하지만 로또와는 정반대가 된 ‘거꾸로 인생역전’. 수시로 바뀌는 위상이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도 빨리 적응해야 한다. 우선 말투부터 바꾼다. “자료 빨리 줘요” “이거 잘못한 거 맞잖아요” 하는 위압적인 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서 오세요” “고맙습니다”하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변한다. 가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손님을 맞는 자신을 보면 내가 언제 이랬던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장사를 하려면 어쩔 수 없다. 욕쟁이 할머니 집이야 장사가 잘돼니 욕을 해도 되겠지만 우리 같은 영세자영업자가 그런 짓을 했다가는 문을 닫기 십상이다. 미소를 지으며 최대한 상냥해야 대해야 한다. 물론 그런다고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손님의 반응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쓰인다. 커피는 맛있는지, 주문한 건 제대로 갖다 줬는지 꼼꼼히 챙기지 않으면 한 소리 듣기 일쑤다. 요즘 나이가 들면서 건망증이 심해졌다. 엉뚱한 손님에게 서빙을 하기도 하고 주문한 것을 까먹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곤두서는 머리카락. 이래서 나이가 든 알바생을 쓰지 않는가 보다. 손님이 음료나 케이크를 별로 먹지 않고 남겨도 신경이 날카로와진다. 맛이 없나, 음료가 이상한가, 이물질이라도 들어갔나.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어떤 때는 남기고 간 음료를 마셔보기도 한다. 뭐가 잘못됐는지 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못할 건 없다. 학교 다닐 때 적성검사에서 1차 직업으로 ‘비서’가 꼽혔던 적이 있지 않은가. 최근 유행하고 있는 MBTI 성격유형검사를 했을 때도 남에게 친절한 ‘성군(聖君) 형’이라는 분석이 나왔다고 한다. 사실 내가 직접 한 것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사장님이 그러니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장님은 없는 말을 지어낼 줄 모른다. 이 정도면 다른 사람에게 어필까지는 아니지만 욕을 먹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위해 보자. 이렇게 해서라도 성공할 수 있다면 뭔들 못하겠나.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사람이 강한 자다.

어느 시인은 말했다. ‘잘 나가는 즐거움’과 ‘실패의 아픔’을 다 배울 수 있는 게 인생이라고.  시인의 말을 되뇐다. “어쩌면 풍선 터트리듯 자잘한 실패가 삶이라는 궁극의 풍선을 부는 달인이 되기도 하겠죠. 오늘도 열심히 ‘푸우푸우~’와 ‘뻥’의 경계에서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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