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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 Jul 21. 2023

두고 오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따스한 봄의 기운이 올라오던 3월 말. 카페 문을 닫았다. 금요일부터 무려 10일간이나. 그 사이 카페는 두 번의 주말을 건너뛰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공휴일에만 문을 여는 우리에게 두 번의 주말을 쉬었다는 얘기는 곧 한 달 중 절반을 장사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걱정이 안 된 것은 아니다. 한 달 매출이 절반으로 뚝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보다 무서운 게 있다. ‘이 카페 또 문 닫았어’라는 손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우리 부부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다. 키우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던 아이, 잔소리 대신 인내와 보살핌의 시간으로 대해야 했던 소중한 자식이다. 그 아이가 힘든 시기를 견디고 사립 명문대의 지방 캠퍼스에 입학했다. 우리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신이 분교를 다니는데 대해 견딜 수 없이 힘들어하더니 결국 유학을 결심했다. 누가 도움을 준 것이 아니었다. 혼자 힘으로 일본어를 공부하고 하루에도 A4 용지 몇 장씩 한자 쓰기를 하더니 어느 순간 일본어자격시험 1급을 땄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친구들과 거리낌 없이 대화하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결국 일본 사립 명문대 중 하나라고 하는 호세이대(법정대) 편입 시험에 떡 하니 붙었다.

일본 호세이대학 입학식이 열린 무도장. 천장에 걸린 초대형 일장기가 여기가 어색하고 불편하다.  라떼 세대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우리 아이가 그토록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나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니 모르고 있었다. 항상 걱정의 대상이었던 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성취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부끄러웠다. 아버지가 자식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고정관념과 편견에 가득한 시선으로 내 아들을 바라봤다는 자책감이 나를 견딜 수 없게 초라하게 만들었다. 현실에 안주해 도전은커녕 조그마한 변화도 받아들이지 않는 내가 아들 발가락의 때만큼도 못한 것으로 여겨졌다.

아들이 학교를 다니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이제 가면 넉 달 후 방학이 돼서야 얼굴을 볼 수 있다. 물론 견디기 힘들게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갈 수도 있다. 그래도 같이 살 것이 아니라면 금방 돌아와야 한다. ‘생이별’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다. 아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엄마와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중학교 때였나. 어찌어찌 유럽 여행을 갈 기회가 있었을 때도 아버지는 못 갔지만 엄마는 곁에 있었다. 아들도 우리 부부도 난생처음 겪는 경험이다. 일본에 도저히 혼자 보낼 수 없었다. 따라갔다. 

원래 계획은 금요일 가서 기숙사를 정리해 주고 필요한 물품을 갖춰준 후 다음 주 목요일 돌아오는 것이었다. 돌아오기 이틀 전 갑자기 아내가 말을 꺼냈다. “주말까지 같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아들이 엄마에게 조금 더 있다 가라고 매달렸나 보다.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 이제는 혼자라는 두려움과 서러움이 아들에게 한꺼번에 몰려온 모양이다. 어디 아들만 그럴까. 우리도 마찬가지다. 핑계 삼아 더 붙어있다 돌아오기로 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참 정이 가지 않는 곳이다. 아들이 사는 기숙사는 우리나라 고시원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책상 하나 놓고 조그만 1인용 침대 하나 놓으면 서 있기조차 힘들다. 그런 곳을 한 달에 100만 원 이상을 주며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래도 견뎌야 한다. 우리 아들이 그곳에서 학교를 다녀야 하기 때문에. 

금전적인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입학식에 그렇게 가라고 해도 안 갔던 녀석이 굳이 일본에서는 가겠다고 했다. 어쩌랴 가야지. 그런데 안내문을 봤더니 학생 1명당 보호자 1명만 들어갈 수 있단다. 뭐 이런 곳이 다 있나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내가 함께 행사장에 들어갔었다. 식장에 들어가자마자 아내가 깜짝 놀랐단다. 눈앞에 떡하니 초대형 일장기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그것을 보고 여기가 정말 일본이구나, 내 아들이 일본에서 학교를 다녀야 하는구나 하는 ‘현타’가 왔다고 했다. 

입학식장 맞은편에 위치한 야스쿠니 신사를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아들이 입학식을 하는 동안 할 일이 없어 주변을 돌아다니다 바로 옆 건물에 눈길이 갔다. 싸~한 느낌이 몰려온다. 일본 A급 전범들의 위폐가 있다는 그곳, 식민지 조선이 겪었던 강탈과 수탈과 고통의 역사를 보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는 아픔의 장소. 야스쿠니 신사였다. 왜 하필이면 아들이 새로운 시작을 하려고 간 곳에 이런 것이 바라보고 있을까. 그렇구나. 여기가 일본이었구나. 왜 인지 모르게 가기 싫은 나라, 안 좋은 것만 생각나는 나라, 그런 곳에 내 자식을 두고 와야 한다는 것이 심란하기만 했다. 사랑하는 아들이 있는 곳이니 싫어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는데도 도무지 그렇게 되질 않는다.

두고 온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나와 함께 있던 사람이, 내 안의 무언가가 내가 통제하거나 바라볼 수 없는 곳에 존재하는 것 이상이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보다 더 진한 아픔이, 함께 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만질 수 없다는 괴로움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아들이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듯 시뻘건 눈으로 애써 돌리며 하염없이 출국장 안으로 들어가는 아빠 엄마를 바라본다. 돌아보고 또 돌아봐도 그 자리에 있다. 우리 부부도 마찬가지.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아들을 일본에 두고 온 한국에 도착한 그 시간, 서울은 온통 시커멓게 어두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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