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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 Jun 02. 2022

그 알바생은 지금 뭘 할까

잊힌 웹툰 지망생의 꿈

‘어, 저 알바생이 또 지나가네.’

손님을 기다리다 우연히 밖을 보니 옆 카페의 알바생이 뛰어간다. 사장이 무슨 심부름이라도 시킨 모양이다. 그날만 벌써 세 번째였던가. 당시 시급 8,000원에 하루 6시간 근무하는 자그마한 체구의 이제 겨우 고등학교 2학년생. 어쩌다 마주치면 항상 밝은 얼굴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던 아이, 카페 주인이 나오지 않아 문 밖에서 쪼그리고 앉아 책을 보던 꿈 많았을 소녀, 자기 몸집보다 더 큰 쓰레기봉투를 낑낑대고 옮기던 어린 일꾼. 내가 봤던 알바생의 모습은 이랬다. 

손님이 뜸한 시간 카페 앞을 서성이다 마주쳤을 때 물어봤다. “알바해서 뭐하려고 하지요?” 뻔한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외여행 아니면 최신 휴대폰을 사기 위한 것일 거야.’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학원비에 보태려고요.” 더 묻지 않았다. 어쩐지 더 묻는 게 실례인 것 같았다. "장하네요." 

전해 들은 얘기는 이렇다. 그 알바생은 어려운 집안 살림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카페에 알바를 나왔다고 한다. 대학 진학도 오래전에 포기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앞날에 대한 설계까지 포기하지는 않았다. 꿈은 웹툰이나 드라마 작가. 카페 바닥을 닦고, 주문받고, 산 같은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미래의 스타 작가의 꿈을 이뤄줄 학원비가 되고 있었다. 그에게 알바란 희망으로 가는 길이다. 꿈을 위해 땀 흘리는 젊은이의 모습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단 그 꿈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논외다. 얼마 전까지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이 아무리 거세도 문학이나 문화예술 분야는 열외가 될 줄 알았다. 그 환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IBM의 인공지능(AI) ‘왓슨’이 3분 20초짜리 공상과학 스릴러 영화 예고편 ‘모건(Morgan)’을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하루면 충분했고 구글의 AI 추상화가 ‘딥 드림’이 그린 그림은 경매시장에서 1억 원에 팔리기도 했다. 영화 ‘스타워즈’의 조지 루커스 감독이나 박수근·이중섭 같은 화가가 그린 명작도 AI가 대신할 수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힘들여 학원 다니며 웹툰을 배우고 작가 교육을 받아도 순식간에 작품을 만들어내는 기계 앞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티는 시급 알바 고교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미래다.

지금 그 알바생이 없다. 영업이 잘 안되면서 그만 나오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돼지열병과 코로나로 손님이 줄면서 알바 자리와 꿈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전염병은 그렇게 많은 것을 앗아갔다. 일자리를 빼앗긴 순간 알바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 좌절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을까.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다른 알바 자리는 구했을까. 학원은 다니고 있을까. 웹툰 작가의 꿈은 아직도 유효할까. 갑자기 궁금증이 파도처럼 몰아친다. 

호랑이를 탄 소년. 웹툰 작가를 꿈꾸는 알바생을 응원하며... 

열정이, 신념이, 계획이 사람들을 성공으로 이끈다고들 이야기한다.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이 알바생이 노력이 부족하고 장래 계획이 없어서 학원비를 벌 기회를 날린 게 아니다. 그냥 현실이 알바생을 배신했다. 혹시 이런 현실을 만든 나 같은 기성세대가 알바생을 쫓아낸 건 아닐까. 별 별 생각이 다 든다.

카페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알바생 한명 쓰는데 돈이 얼마나 든다고 안쓰나. 그냥 사회공헌 하는 셈 치고 한 명 고용하지'하는 말을 하고 다녔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내심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철없는 50대라고 꾸짖었을 터이다. 그랬던 사람이 정작 카페를 하면서 비용 절감을 외치며 한번도 알바생를 채용하지 않았다. 말 따로 생각 따로. 진짜 얼굴을 감춘 위선의 가면이다. 

그 알바생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은, 대학 시절 ‘농활’에서 만났던 5살짜리 꼬마. 그때만 해도 농활(농촌활동)은 도시 촌놈이 노동이라는 것을 해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통로였다. 생전 농사일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대학생에게 첫 농활은 정말 죽을 만큼 힘든 고역이었다. 모내기를 하다 보면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이 아팠고, 땡볕에 밭에 들어가 고추를 따다 보니 피부에 물집까지 잡혔다. 가뜩이나 검은 얼굴이 더 시꺼멓게 된 것은 물론이다. 영어만 잘했으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흑인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저녁에도 쉬는 게 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과 어르신을 대상으로 한 활동을 해야 하는 시간이다. 나는 맡은 분야는 청소년부 중 유아와 국민학생(당시 초등학생). 처음에는 서먹서먹해했지만 2주 동안 같이 지내다 보니 따르는 아이들이 많이 생겼다. 그때 나를 가장 잘 따랐던 아이가 5살 꼬마다. 그 아이는 항상 말했다. "나는 형아가 제일 좋아." 그렇게 따르던 아이가 농활을 끝내고 마을을 떠나려 하자 가지 말라고 울면서 떼를 썼다. 그때 내가 한 약속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1년 후에 꼭 다시 올게" 하지만 약속을 지키기 못했다. 꼬마가 학교로 장문의 편지도 보냈지만 1년 후에도 나는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그 아이는 나에게 그냥 스쳐 지나간 잊힌 존재였다. 

어쩌면 철없는 대학생이 내뱉은 한마디 말을 굳게 믿으며 기대를 했을지 모를 그 꼬마에게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모를 알바생에게도 지금의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그럼에도 어느 일간지 칼럼에 등장한 한 스님의 글이 위안이 된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선 자리를 인식하고 자기답게 살아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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