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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 Jul 06. 2023

무급알바의 꿈

한 4~5살쯤 될까. 한 아이가 말 인형을 타고 카페를 휘젓고 다닌다. 동생으로 보이는 이 꼬마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카페 노예에게 말한다. “비켜라. 나는 왕자다. 내 길을 막지 마라.” 왕자. 어릴 적에는 참 많이 들었는데 이제는 언제 들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한 동화 속 존재. 세상이 각박해졌는지, 금수저 흙수저의 저주인지, 아니면 영국 왕실처럼 왕자가 돼도 살기 위해서는 뭐든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서 그러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은 내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친구를 그 어린 친구가 다시 소환한다. 아이의 그 꿈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어릴 적 나에게도 꿈이 있었다. 남들이 들으면 항상 웃었던 존재. 버스 운전사다. 아직도 생각이 난다. 아버지가 세무공무원인 덕에 당시 우리 집은 꽤 잘 사는 축에 속했다. (지금 생각하면 전혀 자랑할 만한 꺼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숨기려 하지 않았을까.) 그때는 부자의 상징이었던 등나무 의자도 있었다. 의자의 다리는 마치 차바퀴처럼 둥글었다. 그것을 바퀴 삼아 나는 냄비 뚜껑 하나룰 들고 그 속에 들어가 하루에도 몇 시간씩 버스 운전을 하곤 했다. 아마도 손으로 솥뚜껑만 한 핸들을 돌리며 큰 차를 자유자재로 요리하던 어른들이 그렇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드림스컴트루(Dreams come true)’가 어쩌다 현실로 나타나기는 한다. 지금도 생생한 2002 한일월드컵은 를 직접 목도한 아름다운 기억이다. 첫날 폴란드에게 월드컵 사상 첫승 따냈던 광화문에서의 황홀한 밤을, 일요일 스페인을 꺾고 4강 진출을 결정한 뜨거운 여름을 잊을 수가 없다. 

2002 월드컵 같은 경험은 결코 많을 수는 없다. 카페에 온 어린 손님의 꿈도 실현될 수 없다. 우리나라에는 왕자가 없다. 왕자가 되려면 영국이나 일본, 스페인 등에서 태어나야 한다. 태생부터 안 될 팔자다. 국적을 바꿔도 안된다는 사실이 바뀌지 않는다. 무급 알바생의 버스운전사의 꿈도 가능성이 희박하다. 시도는 하지 않았지만 버스운전사를 직업으로 하겠다고 하면 부모가 싸리비 빗자루를 가지고 좇아올 게 뻔하다. 지금의 사장님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앞길이 창창해야 할 청년이 버스운전사를 한다고 하면 누가 같이 살자고 할까.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알고 있다. 누구나 그렇듯 꿈은 그냥 꿈일 뿐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현실은 꿈이 되고 꿈은 이루지 못할 희망사항이 된다. ‘★은 계속돼야 한다’는 현실이 되고픈 꿈의 갈망일 뿐이다. 

60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퇴직예정자의 꿈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우선은 카페가 잘 돼서 노년을 초라하게 보내지 말아야 한다. 파고다 공원 앞에 모여서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내는 노년이 되고 싶지는 않다. 지하철을 타면 등산복을 입은 채 가방 하나 둘러메고 어디론가 떠나는 존재가 되고 싶지도 않다. 한량 취급을 받지 않고 필요한 존재가 되는 일, 스스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함으로써 삶의 자유를 찾는 것. 퇴직을 코앞에 둔 이들의 꿈이란 이런 것들이다.  

그게 무슨 꿈이냐 핀잔을 줄 수도 있다. 인생의 절정기가 지나면 알 것이다. 남들이 비웃는 자그마한 희망조차 현실에서는 이루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집의 절반을 은행에 맡기고 신혼을 시작할 때 이 굴레가 지금까지 계속되리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한 내 집을 갖고 좀 더 큰 방을 가진 주택으로 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30년이 지났다. 아직도 제자리다.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이것만 견디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라고 실낱같은 희망을 가졌다. 다행히 월세가 나가지 않으니 어렵더라도 버티면 승자가 될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전염병으로 열병을 앓던 시기가 지나갔다. 일상이 돌아왔고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모든 것이 다 정상으로 가는데 딱 하나 돌아오지 않은 것이 있었다. 떠나간 매출은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고요한 카페에서는 시간조차 속도를 잃는다. '노후를 카페에서'는 이제 정말 꿈이 됐다. 석양이 오늘따라 처연하게 보인다. 

포기할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된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 나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이것이다. 달라이라마의 한마디가 힘을 준다. “일 년 중 아무 거도 할 수 없는 날은 단 이틀뿐입니다. 하루는 ‘어제’이고 또 다른 하루는 ‘내일’입니다. ‘오늘’이야말로 사랑하고 믿고 행동하고 살아가기에 최적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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