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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 Jan 30. 2024

신뢰 잃은 지폐, 저화(楮貨)

1402년 4월 6일 실패한 화폐 정책의 시작

TV나 영화관에서 사극을 보면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팔 때 엽전을 사용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주막에서 국밥을 먹을 때나 시장에서 비녀를 살 때 언제나 땡그랑 소리와 함께 동그란 동전이 손에서 손으로 건네진다. 무엇인가 은밀한 일을 부탁하고 대가를 지불할 때는 단위가 더 크다. 거의 한 뭉텅이를 던져준다.  엽전의 재료가 대부분 동(銅)이었기에 아주 무겁지는 않았겠지만 수십 개가 넘는 동전 뭉치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더구나 그 많은 것을 품 안에 지니고 다닌다. 옷이 늘어나지 않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조선시대에 엽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벼운 지폐도 있었다. 포털에서 한국 최초의 지폐를 검색하면 고종 때인 1893년 우리 정부가 발행한 '호조태환권'이라고 나온다. 식민지 시대에 발행된 지폐를 광복이 된 후에도 그대로 사용했다는 친절한 설명도 함께다. 이 설명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지폐의 역사는 130년 정도밖에 안 된다. 사극에서 지폐를 본 적이 없기에 어쩌면 당연하게 여길 수도 있다. 

사실이 아니다. 이 땅에 지폐라는 존재가 처음 출현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이보다 5배나 더 오래된 약 620년 전의 일이다. 저화(楮貨) 혹은 저폐(楮幣)라 불렸던 화폐가 주인공이다. 원래 고려 공양왕 시절에 처음 등장했지만 제대로 사용되지 못했다. 지폐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인물은 조선 3대 임금이었던 태종. 1402년 4월 6일 태종은 '저화 통행법'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법을 당시의 법전이었던 '경국대전'에 넣으라 지시했다. 시장 화폐로 지폐가 사실상 처음 사용된 셈이다.

당시 저화의 모습은 현대 지폐와 상당히 달랐다. 종이의 질부터 차이가 났다. 지금은 지폐는 섬유 재질로 이뤄졌지만 당시에는 오늘날의 조폐공사에 해당하는 사섬서(贍署)에서 두껍고 품질이 좋은 한지인 '장지(壯紙)'로 만들었다. 장지를 12~16등 분해 한 장의 저화를 찍어냈다. 지폐를 인쇄하기는 했지만 지금의 화폐처럼 다양한 무늬가 새겨져 있지는 않았다. 단지 그것이 화폐임을 알려주는 글과 도장이 전부였다. 하긴 오늘날처럼 과학 기술이 발전한 때가 아니고 물감 구하기가 힘들었던 시절이니 그럴 만하다.  저화 한 장의 가치는 당시 민간에서 화폐처럼 쓰였던 무명 또는 베 한필과 같았다. 쌀로 치면 두 말의 가격이다. 쌀 한 도시의 무게가 약 1.6kg 정도이고 10되가 한 말이니 저화 한 장이면 쌀 32kg를 살 수 있다. 지금의 시세로 한다면 대략 10만 원 안팎이다. 지금의 최고액권 '신사임당(5만 원권)'의 두 배에 해당하는 큰 단위다. 


초기 저화를 유통하기 위한 조정의 노력은 상당했다. 우선 저화에 대한 신뢰를 높이기 위해 호조에게 금과 은은 물론, 면과 포를 사들이도록 했다. 오늘날의 기획재정부에 해당하는 저화 담당관청  '풍저창(豊儲倉)'으로 하여금 저화를 받고 쌀을 팔도록 지시했다. 또 경상도에서 쌀 2000석, 전라도에서 쌀 1000석을 저화로 사들여 지폐로 중요한 물품을 살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관리들에게 월급을 줄 때도 면이나 포 대신 저화로 지불했다. 조정 신료들이 먼저 지폐를 사용하면 백성들도 따라올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저화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처벌이 뒤따랐다. 시장이나 거리에서 물건을 팔 때 저화를 받지 않거나 구매자가 저화를 내지 않고 쌀이나 면포 같은 다른 현물로 지불하는 경우 해당 물품은 모두 압수한다는 극약 처방도 내려졌다. 지폐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을 신고하는 사람에게는 상으로 저화 50장을 주겠다는 포상제도 실시했다. 쌀 한 돼도 제대로 못 구하는 백성들이 태반이던 시기 쌀 5 섬을 살 수 있는 큰돈이었지만 현실을 보면 별로 신고가 많이 들어온 것 같지는 않다. 른 사람을 고발하는데서 오는 양심의 가책이 목구멍에 풀칠을 하는 것보다 소중했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고발자 자신도 조화를 사용하지 않는데서 오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저화는 태어날 때부터 갖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우선 시장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저화 대신 당시 화폐의 역할을 했던 포를 사용하는 모습이 전국 곳곳에서 나타났다. "백성들이 구습에 젖어 포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했다" "외방(外方-지방)에서 양식을 저자[市]에서 사는데 저자 사람들이 저화(楮貨)를 쓰지 아니 한다"는 보고도 쇄도했다.  결국 1년 반만인 1403년 9월 태종은 "처음에 저화를 만든 것이 나의 허물이다. 누구를 탓하랴"라는 장탄식과 함께 저화를 폐지하겠다는 어명을 내렸다. 주무관청인 '사섬서'도 없앴다. 

한번 사라졌던 저화는 7년 뒤인 1410년  다시 부활했다. 두 차례 '왕자의 난'으로 형제들의 피를 흘리면서까지 왕의 자리에 올랐던 태종이기에 '하찮은' 백성들에게 질 수는 없다는 고집이 한몫했을지 모른다. "저화는 예전의 아름다운 법인데 중간에 폐하고 행하지 않은 것은 나의 허물이다." 과거 저화를 발행한 것이 과오라고 했던 자신의 말을 손바닥 뒤집듯 엎어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저화를 밀어붙이겠다는 얘기다. 이번에는 좀 더 세심하게 준비했다. 먼저 과전, 공신전과 같은 토지에 세금을 거둘 때 반드시 5 결마다 저화 1장을 받도록 하고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규찰을 실시하기로 하는 등 거의 모든 세금을 지폐로 지불하도록 했다. 대장장이 같은 공장이나 상인에게는 매월 1장씩 저화를 바치게 하고 행상들에게도 3장을 받고 행장을 만들도록 했다. 벌칙도 더 세졌다. 세종 문길보라는 사람이 두필을 주고 사노 원례의 말을 적이 있었다.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그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잃었다. 저화 아닌 다른 물건으로 사고팔면 가산을 모두 빼앗는다는 법이 엄격히 적용된 결과였다. 


임금까지 나서 저화의 사용을 장려했지만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저화가 가진 치명적인 단점들 탓이었다. 화폐가 유통외기 위해서는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거나 정부에서 그 가치가 일정하다는 것을 보장해줘야 한다. 근대 유럽과 미주에서 보유한 금 또는 은을 기반으로 화폐를 발행하는 '금은본위제'를 실시했던 것이 전자라면 중앙은행이 보증하는 화폐를 발행하는 것이 후자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장치가 없었다. 화폐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다. 지폐는 종이로 만들기 때문에 사람의 손을 거치면 닳고 해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만 원짜리 지폐가 해지고 조금 찢어졌다고 만원 어치 상품을 살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게 지금의 상식이다. 조선시대에는 달랐다. 지폐가 닳고 해지면 그 값어치는 뚝 떨어졌다. 심지어 인쇄 상태가 좋고 도장이 선명하면 상품과 그렇지 않으면 중품, 하품으로 나눠 그 값을 따로 메기기도 했다. 조정에서 낡고 더러운 지폐 2장을 새 저화 1장으로 바꿔주는 사례도 있었다. 사람의 손을 거칠수록 화폐 가치가 떨어진다니 누가 화폐를 쓸까 싶다. 상황이 이러니 저화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뚝뚝 떨어졌다. 태종 때는 저화 1장으로 쌀 2되를 살 수 있었지만 세조 때는 1되 밖에 살 수 없었고 중종에 이르러서는 쌀 1되를 사는데 15 장 또는 16장의 저화를 내야 했다. 

결국 조정도 손을 들었다. 이제는 "민간에서 돈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425년 7월 7일 세종이 공물로 저화를 받는 것을 없앤 것이 그 첫걸음이었다. 이후에도 저화의 활용방안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기는 했으나 이미 지폐에 대한 미련을 버린 일반인과는 거의 상관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신뢰를 잃은 정책은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만 남긴 채 저화를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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