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5년 8월 16일 다양성 실종과 빈부 격차가 가져온 비극의 시작
1845년 8월 16일 영국의 원예농업 전문지인 '정원사 연대기와 농업 신문(The Gardeners' Chronicle and Agricultural Gazette)에 기사가 실렸다. "영국에 새로운 이상한 감자 전염병이 상륙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냥 그저 그런 식물 전염병이겠거니 했다. 그해 서부와 북부 유럽의 여름은 이상하리만큼 서늘하고 습했다. 6주 동안의 평균 기온이 예년보다 1.5~7도나 낮았다. 폭우도 잦았다. 강물이 범람해 경작지가 잠기는 일이 수시로 발생했다. 30여 년 전엔 1813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식물이 썩어 죽는 병이 돌았다. 이번에도 그러다 말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상이 틀렸음이 증명됐다. 이미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이 '새롭고 이상한' 전염병으로 비상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병든 잎과 줄기를 잘라내도, 감염된 감자를 캐내 버려도 감자 역병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1840년대 중후반 아일랜드를 공포로 몰고 간 19세기 최악의 참사는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시작은 유럽이 아니었다. 1843년 6월 어느 날 아침 미국 플랜더스 지방. 한 농촌에서 악취가 심하게 났다. 숨쉬기 힘들 정도로 역한 냄새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농부들이 악취의 근원을 찾아 몰려나왔다. 곧 원인을 찾아냈다. 선명한 흰색 점이 감자 잎 가장자리에서 발견됐다. 다음날에는 흰점이 갈색으로 변하더니 금방 검게 시들었다. 또 하루가 지나자 이번에는 땅속의 덩굴이 썩었고 감자도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 못한 속도였다. 감자역병은 급속히 퍼졌다. 메릴랜드와 매사추세츠는 물론 오대호와 캐나다로까지 번졌다. 불과 2년 뒤 이 감자 전염병은 유럽 감자 농가를 덮쳤다.
이중 아일랜드가 받은 타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전염병이 돈 다음 해인 1846년 감자 수확량은 전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1847년은 또 그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최악이었다.
감자수확량이 2년 전보다 80%나 줄면서 '검은 47(Black 47)'이라는 악명까지 붙었다. 밭에는 제대로 된 감자를 찾기가 힘들었다. 어쩌다 한알을 구해도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극심한 흉년이 2년 넘게 지속되자 아일랜드에는 감자 한 두 알로 일주일을 견뎌야 하는 농가들이 속출했다. 죽음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도시라고 상황이 나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들이 마치 무덤에서 나온 좀비처럼 거리를 헤맸다. "도시에서는 신발조차 신지 못한 가난한 여성들이 품에 죽은 아이를 안고 거리에 서 있었다. 그들은 해안가에 늘어서서 구걸을 하고 있거나 수백미처 낭떠러지에 있는 갈매기 알을 얻기 위해 한겨울의 추위와 거센 바람을 견뎌야 했다. 병원과 작업장에서는 매일 사장자가 수천 명씩 쏟아졌다." 훗날 미국의 역사학자 존 켈리와 같은 사람들은 당시 아일랜드를 이렇게 표현했다. "무덤이 걸어 다니고 있다."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일들도 벌어졌다. 자신이 먹고살기 위해 아내는 물론 부모와 자식까지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형제자매들끼리 감자 한 알을 두고 피 터지는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인륜이라는 말은 아일랜드에서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말이 됐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니 묻을 곳도 없었다. 무덤 하나에 관 하나가 묻히면 그 위에 또 다른 시체들이 산처럼 쌓였다. 그러다 보니 비가 오지 않아도 시체 썩은 물이 온 길거리에 흘렀다. 심한 악취가 풍겼음에도 사람들은 코를 막을 기력조차 없었다.
죽음에 일상화되면서 사람들도 무감각해져 갔다. 1847년 1월 어느 날, 마차 한대가 스키 버린 외곽의 한 오두막에 멈췄다. 마차를 몰던 이는 “제 개가 어제저녁 이것을 가지고 왔어요”라고 사과하며 박스 하나를 오두막 주인인 소농에게 넘겨줬다. 박스에는 소농 아내의 머리가 들어있었다. 마차가 떠나고 난 후 농민은 심하게 훼손된 머리를 꺼내 오두막으로 가지고 들어가 옷으로 감쌌다. 다음날 그는 자기 아내의 머리를 원래 있던 무덤으로 가져갔다.
대기근 동안 100만 명의 아일랜드 사람들이 사신(死神)을 만났다. 죽음을 면하려고 다른 나라로 이민 간 사람들도 200만 명이나 됐다. 미국에 유독 아일랜드 출신들이 많은 이유다. 미국만이 아니다. 배를 얻으려고 항구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어디로 가냐고 물으면 대답은 한결같았다. "어딘지 모르겠지만 아일랜드만 아니면 돼요." 아일랜드를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두 손 모아 빌었다. 제발 자신이 관에 누워 훼손되지 않은 무덤에 묻힐 수 있기를. 죽음은 그들 바로 곁에 있었다.
아일랜드를 지옥으로 몰고 간 감자역병의 공식이름은 '감자입마름병(Phytophthora infestans)'. 사실 이 감자역병에 당한 곳은 아일랜드만이 아니었다. 벨기에, 프랑스, 독일, 폴란드 등유럽의 많은 국가들도 역병을 피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아일랜드가 유난히 큰 피해를 입은 데는 획일성이 도사리고 있었다.
감자가 유럽인들이 자주 먹는 먹거리였던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아일랜드처럼 감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나라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주변 나라들의 농민들은 감자 외에도 귀리와 밀을 같이 먹고 있었다. 감자가 없어도 먹고살 길이 있었다는 의미다. 아일랜드는 달랐다. 당시만 해도 소농과 빈민 대다수는 감자 하나만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그 인구가 전체의 3분의 2에 달했다. 얼마나 감자를 많이 먹고살았는지 '아침에 감자, 저녁에도 감자, 심지어 한밤중에 일어났을 때도 감자가 옆에 있었네.'라는 말이 온 나라에 떠돌아다녔다.
아일랜드 국민들이 의존했던 감자 품종은 '대기근 감자'라 불리던 '아이리시 럼퍼(Irish Lumper)'였다.
원래 아일린드 농민들은 여러 종류의 감자를 재배하고 있었다. 아일린드 북부 도네갈 지역에서는 밀러스 엄지, 데리 벅스와 같은 품종이 자랐고 먼스터 지방의 케리라는 곳에서는 그린 탑스, 화이특 록스, 아메리칸 세일러가 주류를 이뤘다. 칼로우 지방에선 화이트 탑스, 웨스트미스에서는 스카이리 블루스라는 품종을 키웠다. 1800년대 초 아이리시 럼퍼가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이 품종은 습도가 높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는 점이었다. 특히 생산성이 엄청 좋았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다른 품종에 비해 30%나 많은 생산량을 얻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높은 생산성에도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인기가 없었으면 사람이 먹는 게 아니라 소나 돼지에게 먹이는 사료로 써야 한다고까지 했을까. 귀족이나 부유층들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신 비싸고 입맛을 돋우는 '프리미엄'급 감자나 밀가루, 고기 등만 찾았다. 하지만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아이리시 럼퍼는 빠르게 서민들의 주식으로 자리 잡았다. 맛이 없으니 값이 쌌고 생산량이 풍부했으니 가난한 소농이나 빈민들이 끼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이리시 럼퍼를 제외한 다른 품종들은 아일랜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이제 소농과 빈민들에게 남은 것은 맛없고 값싼 감자뿐이었다.
문제는 아일랜드 대부분의 농가에서 아이리시 럼퍼만을 재배했다는 점이다. 아이리시 럼퍼는 감자잎마름병에 특히 취약했다. 단일 감자종만 키우던 아일랜드 농가는 풍비박산 났다. 전국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뾰족한 해결책도 찾지 못했다. 이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하자 영국의 내로라하는 생리학자와 전문가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달라붙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상황은 더 악화되기만 했다. 획일성이 가져온 비극에 아일랜드 땅은 무덤이 됐다. 미국에서의 버팔로 대학살이 소의 급격한 번식을 가져왔고 그 되새김과 배설물이 지구 온난화라는 재앙의 한 원인을 안겨주듯이, 아이리시 럼퍼로의 품질 단일화는 아일랜드에 대기근이라는 죽음을 몰고 왔다.
아일랜드 대기근의 원인이 단일 품종에서 비롯됐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 가지 간과된 것이 있다. 아이리시 럼프는 어떻게 아일랜드를 장악했을까.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18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일랜드인들은 풍요롭지는 못했지만 끼니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프랑스혁명 이후 전개된 대불전쟁(1793~1815년) 기간 동안 영국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싸우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당연히 군수물자 수요가 크게 늘었다. 영연방에 속한 아일랜드가 직접적인 혜택을 보았다. 군복을 만드는데 필요한 섬유공장이 쉴 새 없이 돌아갔고 식료품 수요 역시 넘쳐났다. 덕분에 농부들은 2층 주택을 지을 수 있었고 아내와 딸들은 바느질로 기운 옷 대신 멋진 드레스를 입고 다녔다. 식단도 바뀌었다. 이전에는 감자 수프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지만 이제는 차를 마시며 버터크림을 바른 빵에 고기나 청어를 얹어 먹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아일랜드 경제의 황금기였다.
워털루 전쟁은 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보나파르트가 몰락하면서 영국과 동맹국들이 사들이던 군수물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다. 당장 아일랜드 산업이 직격탄을 맞았다. 생산량이 급감했고 일자리는 크게 줄었다. 게다가 대불 동맹국 간 관세가 폐지되면서 영국과 다른 나라 공산품과 기계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값싸고 좋은 제품을 아일랜드 산업은 감당할 수 없었다. 섬유뿐 아니라 조선, 유리 등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산업 분야에 종사하는 공장들이 문을 닫았다. 노동자들의 수입이 급감했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더블린 북부 드로게다 지역의 한 직물공장 노동자들은 전쟁 당시 주당 14~21실링을 벌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 4~8실링 밖에 받지 못했다. 그래도 일을 할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거리에는 직장을 잃은 노동자들로 가득 찼다. 1821년 제조업 노동자 비중은 43%에 달했지만 20년 후에는 28%로 곤두박질쳤다.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이 갈 곳은 도시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먹고살기 위해 결국 농촌으로 밀려왔다. 하지만 이들은 농지를 빌리거나 살 수 있는 돈이 없었다. 결국 산비탈이나 해변에 있는 모래밭, 거센 바람을 견뎌야 하는 급경사지 같은 곳을 찾아 어떻게든 식량을 재배해야 했다. 척박한 땅에서 놀라운 생산량을 쏟아내는 '아이리시 럼퍼'가 빈농과 도시 노동자들 속으로 급속히 파고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기근은 아일랜드에는 비극이었지만 영국에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아일랜드의 농지는 대부분 영국인 부재지주의 소유였다. 이들은 토지를 농민들에게 비싼 임대료를 받고 빌려줬다. 토지 생산물의 3분의 1 정도가 지주들 손으로 들어갔다. 게다가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에서 토지 거래를 이어주는 중간상까지 가세하면서
농민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더욱 줄었다. 한 역사학자는 이를 "임대료와 이것저것을 지불하고 나면 소능 가족들 대부분은 먹고사는 것이 힘든 지경이었다"라고 표현했다.
그렇다고 임대료를 내려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토지를 찾는 여기저기 사람들은 널려 있었다. 도시에서 농촌으로 내려간 소위 '귀농' 인구가 많았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지친 도시 생활의 안식처'를 찾기 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없이 간 사람들이었다. 결국 그나마라도 먹고살기 위해서는 비싼 임대료를 내고서라도 밭을 일굴 수 있어야 했다. 더구나 농촌 인구가 늘어나면서 토지 임대를 위한 경쟁도 심해졌다. 결과는 뻔했다. 영국과 영국인 지주들과 아일랜드의 귀족, 성직자들은 갈수록 부유해졌고 아일랜드와 소농들은 더욱 빈곤해졌다.
1850년대 들어 상황이 조금씩 나아졌다. 감자전염병이 잦아들고 날씨도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영국에서 보낸 지원금도 도움이 되기는 했다. 아일랜드 주민들의 상황은 나아졌을까. 아니다. 한번 벌어진 빈부 격차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소능이 먹을 감자는 여전히 부족했고 귀족의 식탁은 더욱 호화로워졌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사회 양극화가 갈수록 커지는 우리나라와 대기근을 겪은 아일랜드는 닮은 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