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그니 Jun 03. 2024

함대, 기병대에 사로잡히다

1795년 1월 23일 이상기후가 바꿔놓은 전쟁의 판도

1795년 1월 23일 새벽. 수백 명의 무리가 어둠에 둘러싸인 네덜란드 덴 헬더 항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프랑스 라인군 총사령관 장 샤를 피슈그뤼의 명령을 받은 쟝 기윰 드 윈터 준장 휘하의 제8 기병연대와 제14 보병연대였다. 기병대의 말발굽에는 헝겊천이 씌워져 있었다. 네덜란드 군에게 발각되지 않으려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공격 준비를 모두 마친 프랑스군이 기병대를 앞세워 일제히 돌격했다. 

1795년 1월 23일 프랑스 기병대와 네덜란드 함대 사이의 전투를 다운 프랑스 화가 샤를 모진의 유화. 

그런데 방향이 이상했다. 육군이고 기병대면 당연히 산이나 평지로 달려가야 옳았다. 하지만 이들이 향한 곳은 육지가 아닌 바다, 정확히는 항구에 정박 중이던 네덜란드 전함들이었다. 바다 위에는 기함인 미힐 드 로이테르호를 비롯한 14척의 군함들이 있었다. 

목적은 분명했다. 영국 해군과 합류하려는 네덜란드 함대를 항복시키는 것. 1700년대 후반 유럽은 격동의 시대였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다. 루이 16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고 프랑스는 의회를 중심으로 한 공화정으로 탈바꿈했다. 유럽 최강국 중 하나였던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원동력은 자유와 평등, 박애 정신. 나머지 유럽 국가의 절대 군주들에겐 비상이 결렸다. 이대로 놔뒀다간 자신들도 루이 16세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다.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국민의 손으로 권력이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영국과 네덜란드 등 절대군주 국가들에겐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프랑스혁명의 물결이 퍼지는 것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 시급했다. 1793년 유럽 국가들이 동맹을 결성(대불동맹)하고 프랑스 진격 전을 펼친 것도, 우리가 흔히 '나폴레옹'이라 부르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의 구원자로 등장한 것도 필연이었다. 프랑스가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유럽 국가들이 손을 잡기 전에 각개격파하는 것이 중요했다. 프랑스군이 네덜란드, 특히 해군 장악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당시 혹한에 시달리고 있었다. 1794년부터 시작된 극한 추위에 강은 물론 항구와 해협, 내해까지 꽁꽁 얼어붙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 맞서기 위해 영국 해군과 합류하려던 네덜란드 함정들은 꼼짝없이 얼음 속에 갇히고 말았다. 기동력을 상실한 전함에게 850문의 대포는 그저 장식품에 불과했다. 프랑스 기병대는 얼음 위를 달려 군함들을 포위했다. 함포를 쏘기엔 프랑스군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 자칫하면 자신들 스스로 포격을 주고받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네덜란드 해군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항복뿐이었다. 허무한 결과였다.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군과 역사가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기록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역사가들의 분석은 달랐다. 프랑스군이 덴 헬더 항에 도착하기 이틀 전인 1월 21일 네덜란드 함대에 저항하지 말라는 지시가 이미 내려갔다는 것이다. 과정은 다를 수 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해군이 육군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이다. 후일 역사가들은 이를 기병대가 함대를 장악한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례로 기록하고 있다. 

네덜란드 앞바다는 어떻게 빙판길로 변했을까. 당시 유럽은 전에 없던 이상 기후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겨울이 심했다. 1794년에는 매서운 한파가 스코틀랜드 남서지방을 강타했다. 강력한 눈보라와 함께 찾아온 강추위에 수많은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어떤 보고서에는 "눈보라가 지나간 후 '에스크의 침대'라 불리는 지역에서 1840마리의 양과 소 9마리, 45마리의 개와 180마리의 산토끼가 죽은 채 발견됐다"라고 설명했다. 1795년에는 1월부터 혹한이 몰아쳤다. 기온은 1월 기준으로 1659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특히 일부 지역은 영하 21도까지 곤두박질쳤다. 2월 평균 기온도 예년보다 무려 3도나 낮았다. 영국 런던의 템즈강과 서부의 서번강이 꽁꽁 얼어붙어 스케이트를 타려는 사람들로 붐볐고 북유럽 인근 해안과 해협도 얼음으로 뒤덮였다. 이른바 '소빙하기(Little Ice Age)'다. 

유럽이 일련의 이상기후를 겪기 시작한 것은 13세기부터 약 500년 동안. 지표면 온도는 20세기와 비교할 때 평균 2도 가까이 떨어졌다. 이후 북유럽에서는 심심치 않게 혹한을 겪었다. 특히 1500년대 겨울에는 얼어붙은 새가 하늘에서 떨어지는가 하면 프랑스의 왕이 자고 일어나자 수염이 고드름으로 바뀐 일도 있었다. 한 나라의 군주도 이런 일을 겪었는데 일반 백성들은 말해 뭐 할까. 하루에도 수십 명씩 동사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스트라디바리가 1703년 만든 바이올린. 독일 베를린악기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이상 기후가 발생한 원인에 대해 갖가지 추측이 난무한다. 눈여겨볼 점은 독일 역사학자 필립 블롬의 주장이다. 그는 저서 '자연의 반란:17세기 소빙하기는 어떻게 서구를 변화시켰고 현재를 만들었나'에서 인간이 17세기 혹한의 원인을 제공했을 가능성에 주목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본격적인 식민지 확보전이 발생했다. 다른 지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서는 원주민과의 전쟁이 필수였다. 이 과정에서 무려 5600만 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그 결과 식민지에서는 인력이 줄어들었고 경작 면적도 감소했다. 지구를 따뜻하게 해 줄 이산화탄소가 부족해진 것이다. 블룸은 이러한 변화가 지표면의 온도를 끌어내리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예술 분야도 소빙하기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바이올린의 세계적 명장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대표적이다. 2011년 런던 온라인 경매에서 1590만 달러(약 219억 원)에 팔린 '레이디 블런트'라는 이름의 바이올린은 스트라디바리가 소빙하기였던 1721년에 만든 악기였다. 극심한 추위가 닥치면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내부에 축적한다. 소빙하기를 거친 나무들의 밀도가 높아진 이유다. 덕분에 당시 만들어진 바이올린이 이전이나 이후보다 높은 음질과 공명도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게 블롬의 의견이다. 바이올린의 또 다른 명장 피에트로 지오바니 과르네리 역시 스트라디바리와 동시대에 살았다는 것도 블룸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그렇다 해도 당시만 해도 인간이 미친 지구 기후에 미친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태양 흑점 활동의 감소, 화산 폭발, 해류의 변화 등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과학자들은 추론한다. 인간은 전지구적 변화 속에 보태진 아주 작은 요소에 불과했다. 지금은 다르다. 최근 보이는 이상 기후는 거의 대부분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이 초래했다는 게 정설이다.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 사용의 증가에 따른 이산화탄소 급증, 무분별한 개발에 따른 녹지 감소, 생활 편리성을 위한 에너지의 과잉소비 등 현대 인간이 하는 거의 모든 행동이 지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결과 최근 10년 지구의 평균 기온은 100년 전 50년 평균 기온에 비해 1.1도나 상승했다. 특히 육지의 평균 기온은 1.59도에 달한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지구 종말의 마지노선으로 정한 1.5도(산업혁명 시기 대비 현재 기온)를 육지는 이미 넘어섰다는 의미다. 그러자 지구가 다시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예측하기 힘든 기상 이변이 일어나며 과일값, 채소값이 폭등한다. 먹고살기 힘들다는 하소연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서민에게는 그 자체가 재앙이다. 지구는 이렇게 우리에게 매일 경고장을 보내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순신을 위로한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