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6년 1월 28일 미국 신시내티의 비극
1856년 1월 28일 오후.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시의 한 시골 마을. 총으로 무장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느 오두막집 주위를 둘러쌌다. 이들의 신분은 연방요원과 신시내티 경찰, 그리고 농장 소유주인 A.K 게인즈 등이었다. 이들이 집을 포위한 이유는 단 한 가지. 도망친 노예들을 잡는 것이었다. 집안에는 얼마 전 게인즈의 집에서 야반 도주한 로버트, 마가렛 가너 부부와 토마스, 사무엘, 매리, 프리실라 등 4명의 자녀를 포함, 모두 8명의 노예들이 있었다. 노예추적자들이 다가왔음을 안 이들은 다시 잡힐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장 요원들은 일제히 집안으로 들이닥쳤다. 안에 있던 사람들도 강력하게 저항했다. 연방요원들이 집안에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치고 치열한 총격전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노예를 잡기 위해 출동한 연방 요원 중 한 명이 팔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래도 여자와 어린아이가 대부분이었던 노예들이 훈련받은 무장 요원들을 당해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8명 모두 붙잡혀 감옥신세를 지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였다.
이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마가렛이 갑자기 삽을 들고 자신의 아이들을 차례로 내리치고 나중에는 칼을 들어 품에 안고 있던 2살밖에 되지 않았던 딸 프리실라의 목을 그었다. 칼이 향한 다음 대상은 자기 자신. 갑작스러운 사태에 모두들 깜짝 놀랐고 무장요원들은 황급히 엄마를 붙잡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두 아들과 한 딸은 목숨을 구했지만 막내인 프리실라는 결국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다니. 마가렛이 너무 공포에 떨다가 정신줄을 놓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이코패스일까. 한 침례교도는 나흘 뒤 마가렛을 만났을 때 그에게 당시 상황을 물었다. 그때 마가렛은 똑똑히 말했다. "나는 그때 멀쩡한 상태였다." 사건 당시 자신이 아주 정상적인 상태였다는 얘기다. "자식들을 죽이고 나도 죽으려 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법정에 서기 전 마가렛이 밝힌 시나리오였다.
사실 가너 가족에게 운이 조그만 좋았어도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들이 자유를 찾아 길을 나선 것은 하루 전인 1월 27일 일요일. 처음 출발할 때는 가너 일행과 다른 9명을 포함, 총 17명이었다. 최종 목적지는 노예들도 백인처럼 살 수 있는 곳, 캐나다.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마가렛은 주인인 가이너를 따라 몇 번 신시내티를 가 본 적이 있었다. 적어도 신시내티까지는 추적자들의 눈을 피해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셈이다. 게다가 오하이오강은 60년 만의 강추위로 꽁꽁 얼어붙은 상태였다. 이동수단도 마련했다. 사람들을 태울 수 있는 말 두 마리와 큰 썰매로 강까지 손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강을 건널 때는 얼음이 깨질 것을 우려해 말과 썰매를 버리고 걸어서 이동했다.
신시내티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 대낮이었다. 거리에 사람들이 많았기에 17명이나 되는 흑인들이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것은 눈에 쉽게 띌 우려가 있었다. 결국 가너 가족과 나머지로 무리를 나눴다. 그때는 이것이 천당과 지옥을 가르는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몰랐다.
가너 일행과 떨어진 다른 9명의 무리는 운이 좋았다.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친구를 만났다. 밤까지 그곳에 숨어 있다가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Underground Railroad)'라는 흑인 노예들의 비밀 탈출 네트워크를 통해 그토록 가고 싶었던 캐나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반면 가너 가족은 은신처를 찾는데 애를 먹었다. 원래 캔터키주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 이웃으로 지냈던 자유 흑인 카이트의 집에 머무르려 했지만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 결국 집을 찾기 위해 동네 주민들을 붙잡고 네 차례나 물어보았다. 자신들의 위치가 노출될 것이라는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모험은 추적자들에게 자신들이 어디 있는지 알리는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기회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만약 카이트가 이들이 왔을 때 곧바로 아무도 모르는 은신처로 이동시켰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 있었다. 하지만 카이트는 마가렛 가족을 피신시키는 대신 캐나다까지 데리고 갈 퀘이커 교도이자 노예제 폐지론자인 레비 코핀을 찾아갔다. 카이트에게 사정을 들은 코핀은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며 빨리 마가렛 가족을 교외로 이동시키라고 재촉했다. 저녁이 되면 자신이 찾아가 기차를 탈 수 있게 하겠다는 약속도 함께였다. 카이트가 도망친 노예 가족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만약 케이트가 불과 몇 분만 일찍 도착했어도 마가렛 일행은 노예사냥꾼의 마수에서 벗어났을지 모른다.
흑인 노예 어머니가 자식을 죽였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신시내티는 물론 미국 전역이 발칵 뒤집어졌다. 뉴욕타임스는 '신시내티 노예들의 사례'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놓기도 했다. 어머니가 자식을 죽이는, 당시에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을 벌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반응이 뜻밖이다. 마가렛이 천륜을 저버리는 행위를 했음에도 여론은 그녀를 비난하기는커녕 오히려 같이 마음 아파하고 동정하는 분위기였다.
마가렛이 자식들을 죽이려 했던 것은 '내 자식들을 평생 노예로 살아가게 놔둘 수는 없다'는 절박함의 표현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살을 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얼어붙은 오하이오 강을 건넌 것도, 삽으로 아이들을 내리치고 겨우 2살밖에 되지 않았던 사랑하는 딸을 칼로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자식들을 죽인 후 자신도 아이들을 따라가려 했던 것도 자신의 삶을 대물림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에 벌인 일이었다.
흑인들, 특히 흑인 여성들이 노예로 돌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다는 것 그 이상이었다. 어린 여성들에게는 더 치욕스러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남성 백인 노예주들의 성 노리개 역할을 해야 했다. 마가렛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가 맡았던 가사 관리는 노예주와의 접촉이 잦았다는 점에서 더 심했다. 마가렛은 흑인과 백인의 피가 동시에 흐르는 혼혈(물라토)이다. 농장주가 흑인 소녀를 성착취의 상대로 여기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 혼혈로 태어났다는 것은 마가렛의 아버지가 흑인 여성 노예와 성관계를 맺은 사람이었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혼혈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사뮤엘과 토머스, 프리실라 등 마가렛이 낳은 세 명의 자녀 역시 혼혈이었다. 그녀 역시 농장주의 성 노리개였다는 의미다. 신시내티의 비극이 일어난 직후 그녀의 나이는 대략 21~23세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큰 아이가 6살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불과 10대 후반의 어린 소녀가 수년간 지옥 같은 경험을 해왔다는 결론이 나온다.
마가렛이 체포돼 법정에 섰을 때 변호를 맡았던 루시 스톤은 그녀가 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러야 했는지 처절하게 설명했다. "자신의 딸이 다시 수치스러운 노예생활을 하지 않으려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비열하고 잔인한 농장주의 손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누가 엄마에게 그럴 권리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누가 딸을 죽여야 했던 그 깊고 침통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마가렛은 자식들이 노예라는 지속적인 고통을 받지 않도록 했을 뿐 아니라 혼혈이라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비장한 심정으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탈출 노예들과 관련한 재판은 보통 하루면 결론이 내려진다. 하지만 마가렛을 둘러싼 재판은 2주 동안이나 계속됐다. 사회적으로 워낙 파장이 큰 사건일 뿐 아니라 노예제 폐지론자와 옹호론자 사이의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 탓이다. 어떤 죄목으로 기소할 것인가를 놓고도 의견이 엇갈렸다. 옹호론자들은 노예는 노예주의 재산이므로 '재물손괴죄'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폐지론자들은 '살인죄'를 외쳤다. 노예는 재산이 아니라 존엄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의미에서다. 법원은 옹호론자의 손을 들어줬다. 그리고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판결도 내렸다. 마가렛 일행은 켄터키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해 3월 11일 증기선 '헨리 루이스'가 다른 배와 충돌했다는 소식이 보도를 통해 전해졌다. 마가렛 식구들이 타고 있던 배였다. 이 사고로 돌도 지나지 않은 마가렛의 딸이 물에 빠져 죽었다. 마가렛은 그때도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딸이 더 이상 자신과 같은 노예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처절한 기쁨이었을 것이다.
마가렛은 1858년 병으로 숨을 거뒀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사건을 소재로 한 1859년 프란시스 하퍼의 시 '노예 어머니:오이오 이야기(Slave Mother: A Tale of Ohio)'와 1867년 그림 '현대의 메데아(The Modern Medea)'가 등장했고 100년이 훨씬 더 지난 1987년에는 토니 모리슨이 '비러브드(Beloved)라는 소설로 퓰리처상까지 받았다. 2005년에는 '마가렛 가너'의 이름으로 오페라도 만들어졌다.
마가렛 사건 이후 약 170년이 지났다. 비극은 이제 종말을 고했을까. 미국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이역만리 떨어진 우리나라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하다 보면 종종 가슴 쓰린 단어를 만난다. '동반 자살'. 대부분의 자살 사건이 '극단 선택'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묘사되지만 부부 또는 일가족이 들어갈 때는 '자살'이라는 표현이 용납된다. 일제시대 '사의 찬미'로 이름을 날렸던 윤심덕과 김우진 같은 가슴 아린 러브스토리라면 동반 자살도 사랑의 멜로디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요즘 들리는 소식은 그리 로맨틱하지 않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뒤따라 간다거나 자식이 병들거나 치매에 걸린 부모의 수발을 들다 못해 돌이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9세기 미국과 다른 점이라면 가해자가 '노예주'에서 '가난'으로 바뀌었다는 점 뿐이다. 왜 비극이 끝없이 이어질까. 우리 사회는 책임이 없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