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6월 18일 '작전명 버드독'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3년이 지난 1948년 2월. 동서 냉전이 한창이던 그 시기 미군이 장악한 프랑크푸르트의 옛 라이히스뱅크((Reichsbank) 건물에서는 밤마다 수상한 일이 벌어졌다. 날이 어두워지면 상자에 무언가를 잔뜩 실은 미군 트럭들이 쉴 새 없이 들락날락거렸다. 상자 표면에는 ‘버드 독(Bird God, 새를 잡는 사냥개)’ 또는 ‘점토(Clay)’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그렇게 들어온 화물은 상자 물량으로 무려 2만 3000개. 무게는 500톤에 달했다.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철저히 비밀에 비밀에 부쳐졌다. 당연히 믾은 이들이 화물의 정체에 대해 궁금증을 가졌을 터. 온갖 억측이 난무했다. 누구는 '버드 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개밥'으로 생각했고 어떤 이는 '원자폭탄'을 떠올렸다. 트럭을 몰았던 일부 군인들은 이스라엘 또는 아랍인을 위한 탄약이 들어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하지만 화물의 내용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당시 책임자였던 프랭크 가벨을 비롯한 몇몇에 불과했다.
6월 7일. 라이히스뱅크에서 나온 800여 대의 트럭들이 일제히 어디론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여러 대의 특수열차도 동원됐다. 방향은 독일 서부. 그렇게 꼬박 11일 동안 밤낮없이 수송 작업이 이뤄졌다. 그리고 6월 18일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틀 후인 6월 20일 화폐개혁을 실시한다." 나무 상자에 들어있었던 것은 미국에서 찍어낸 새로운 독일 화폐였다. 그리고 정확히 그날 독일 역사를 바꿀 화폐가 유통되기 시작했다. 전후 라인강의 기적을 일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화폐개혁 작전 '작전명 버드독'의 전말이다.
새 화폐의 이름은 '도이치 마르크'. 독일에서 유통됐지만 독일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화폐를 유통시킨 것도 미국이었고, 도이치마르크라는 이름과 디자인도 모두 미국이 진행했다. 단 한 명 예외가 있었다. 훗날 독일 총리로 재임하면서 라인강의 기적을 일군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경제장관이었다. 그는 화폐개혁의 시작부터 전후 경제복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제 정책에 깊숙이 개입했다. 에르하르트가 '도이치마르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다.
미국에서 들여온 60억 도이치 마르크를 기반으로 화폐개혁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교환 비율은 40 라이히스마르크당 1 도이치마르크. 예금액이 있는 경우에는 10:1이 적용됐지만 너도나도 새로운 화폐를 보유하고자 달려드는 통에 품귀현상을 빚기도 했다. 당시 영국 타임지에서 소개한 사례를 보면 독일인들의 신화폐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한 시민은 "내가 새 화폐를 얻은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소시지 1파운드를 사서 그 자리에서 먹는 것"이었다며 감격해했고 또 다른 시민은 "버터 반 파운드를 사서 으깬 감자와 달걀, 브라운 버터에 콜리플라워를 넣은 다음 디저트로 체리를 만들었어요. 전체 비용은 4마르크였죠. 제겐 연회나 다름없었어요." 도이치 마르크는 그렇게 시장과 가정에 빠르게 침투했다.
독일에서 화폐개혁이 절실했던 것은 이전 화폐인 라이히스마르크가 시장에서 철저히 외면받은 탓이었다. 공식적인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0% 수준이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돈을 지불하는 대신 물건으로 주고받는 것이 훨씬 안전한 거래 수단이었다. 독일인들은 화폐 대신 담배를 교환수단으로 대체했다. 당시 담배 한 가치의 가치는 50마르크였다. 지폐가 불쏘시개로 쓰이는 경우도 있었다. 중세의 물물교환시대가 현대에 다시 도래한 셈이다. 화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다 보니 상점에 가도 살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시 한번 영국 타임지를 보자 "전쟁이 끝난 지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은 상태였다. 살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돈은 계속해서 가치를 잃어갔다." 경제가, 사람들의 생활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붕괴된 화폐 시스템을 복원해야 했다. 도이치 마르크의 등장은 폐허였던 독일을 오늘날 세계 톱 5 경제대국아 될 수 있게 만들었던 원동력이자 라인강의 기적을 움트게 했던 토양이었다.
독일 화폐개혁의 후폭풍은 컸다. 특히 소련의 반발이 컸다. 1948년 3월부터 서방의 동독 통행과 동베를린 진입을 차단했던 소련은 미국 주도의 화폐개혁이 독일을 서방국가로 편입하는 목적을 가졌다고 판단, 베를린을 아예 봉쇄했다. 새로운 화폐가 들어오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대신 소련은 자신들이 관할하는 지역의 법정 화폐로 동독 마르크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이 독일 화폐 개혁을 발표한 지 불과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로부터 또 이틀이 지난 후에는 서방 진영과 베를린 사이를 오가는 육로와 수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서방측도 서부 독일에서 동족 지역으로 가는 모든 교통편을 중단시켰다. 본격적인 동서냉전이 시작된 것이다. '베를린 공수작전'이라고 불리는 '비틀스(Vittles) 작전'이 이루어진 것은 이로부터 불과 두 달 뒤의 일이다.
독일을 둘러싼 미소 양국의 대립은 동서 냉전의 격발로 심화됐다. 그리고 이는 2년 뒤 독일에서 8000km나 떨어진 아시아의 최빈국을 참혹한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고 갔다. 독일을 부흥케 한 화폐개혁이 다른 나라에는 비극이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