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서막, 1485년 10월29일 헬레나 쇼이베린 재판
1485년 10월 29일 오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시청 대 회의실에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브릭센의 주교 게오르그 골저의 특별 대표 크리스탄 터너, 교회법 전문가인 마스터 폴 반, 교회 칙령의 집행자인 지기스문트 자우머 등등 당시에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을만한 거물들이었다. 도미니크회의 종교재판관 하인리히 크라머 역시 이 자리에 있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단 하나. 인스부르크 출신 헬레나 쇼이베린을 포함한 7명의 여성이 마녀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재판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재판은 크라머의 주도로 이뤄졌다. 크라머가 쇼이베린을 마녀라고 주장하며 내세운 증거는 이러했다. '거리에서 심문관을 향해 침을 뱉었고,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을 방해했다. 이단자로 의심되는 사람들과 어울렸고 남편이 사귀던 여성이 병에 걸리도록 했으며 그녀가 좋아하던 기사를 마법과 독으로 죽였다.' 지금 사람들이 보면 황당하기 그지 없을 얘기들이었지만 마녀가 존재한다고 믿었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섬뜩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재판 결과는 어땠을까. 무죄였다. 쇼이베린의 변호사 요한 메르바르트는 재판 진행과정과 증거 서류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고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또 종교재판관 크라머가 쇼이베린의 문란한 성생활을 마녀의 증거라고 주장했지만 이 역시 재판과는 상관없는 일로 결론났다. 결국 쇼이베린을 비롯한 7명은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고 이후 속죄라는 가벼운 형만 받았다.
쇼이베린 재판은 분명 마녀로 의심받는 사람들의 승리였다. 하지만 모두가 재판 결과에 승복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크라며는 더욱 그랬다. 그는 쇼이베린은 마녀이며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싸여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2년 후 그 유명한 마녀 판별서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를 출간했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다. 1487년부터 1520년까지 20쇄가 찍혔고 1574~1669년에는 16쇄가 더 나왔다. 유럽을 마녀사냥의 광기로 몰아넣는 마녀 식별서의 등장이었다.
'마녀의 망치' 주장속으로 들어가면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대로 해석하면 마녀로 의심받은 이는 마녀가 될 수 밖에 없다.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은 마녀의 강력한 증거 중 하나였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 키키가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는 장면도 여기서 비롯됐다. 하지만 하늘을 못난다고 마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신이 허락하지 않았거나 악마가 하늘을 날지 못하도록 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마녀로 의심을 받으면 하늘을 날든 못날든 아무 상관없이 마녀라는 식이다.
이뿐 아니다. 고발자는 마녀의 죄를 입증할 필요가 없다. 그저 증인 두명만 있으면 된다. 증인이 만들어졌는지 아닌지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입증의 절차가 필요없으니 소문도 기소의 대상이 된다. 마녀로 고발되면 피고인을 둘 수는 있다. 하지만 변호사 선임은 본인이 아닌 판사가 한다. 지금으로치면 모두 국선변호인인 셈이다.
이런 내용도 있다. "마녀가 불러오는 폭풍과 우발으로 인해 사람들의 노고가 물거품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이에겐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이 문구는 이후 마녀를 잡는 마녀 사냥꾼들에게는 경제적 보상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 확대됐다. 실제로 17세기 마녀 사냥꾼으로 이름을 날린 메튜 홉킨스는 마을마다 20실링씩 받고 마녀 색출에 나섰다. 이보다 훨씬 많은 돈을 지불한 곳도 있었다. 영국의 스토마켓이라는 곳에서는 무려 23파운드를 대가로 치렀다. 현재 원화로 8000만원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홉킨스의 금고는 돈으로 흘러넘쳤다.
그럼 마녀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여러 방법이 동원됐다. 가장 흔한 방법은 고문. '마녀의 망치'는 자백을 하지 않으면 마녀로 처벌할 수 없다고 적었다. 따라서 자백을 끌어내기 위해 온갖 기술이 쓰였다. 뜨겁게 달아오른 쇠를 손으로 만지게 하거나, 불을 피우고 그 위에 피고인을 거꾸로 매달기도 했다. 잠을 안재우는 방법과 실토할 때까지 먹고 마실 것을 주지 않는 방법도 쓰였다. 그래도 자백을 하지 않는다면 마녀로 지목된 사람의 여자 친구까지 고문을 했다. 더 극단적인 수단도 동원됐다. 홉킨스의 경우 마녀로 지목된 이의 옷을 모두 벗긴 후 강이나 개울에 던졌다. 만약 그가 살아남기 위해 물 위에 떠올라 수영하거나 허우적대면 마녀였고 그냥 가라앉으면 마녀가 아니었다. 둘 중 어떤 것이든 피고인은 죽을 수 밖에 없었다.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마녀사냥이 기승을 부리면서 무고한 생명들이 스려져 갔다. 이 시기 적어도 15만명 이상이 마녀라는 굴레를 쓰고 화형장에서, 또는 고문장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훨씬 더 많은 이가 무고한 목숨을 잃었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저서 '소, 돼지, 전쟁 그리고 마녀'에서 이 시기 약 50만명이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독일의 한마을에서는 하루에 200명이 처형당했고 또 다른 마을에서는 3개월간 121명이 불에 타 숨졌다. 하루에 10명 이상씩 화형이 처해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특히 독일, 오스트리아 등 과거 신성로마제국에 속했던 지역에서 극심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헨젤과 그레텔, 백설공주, 인어공주, 백조왕자처럼 안데르센 형제들이 수집한 동화들에 마녀가 특히 많이 등장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은 듯 하다.
피해자들은 누구였을까. 일단 '마녀(witch)'라는 단어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마법을 쓰는 남성은 일반적으로 마법사(wizard)라고 부른다. 무고한 죄를 뒤집어쓴 이들이 대부분 여성들이었다는 의미다. 일각에서는 유럽에서 마녀로 몰려 죽은 사람들의 85%가 여성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한 예로 1585년 독일의 두개 마을에서는 단 1명을 빼곤 모든 여성이 자취를 감췄다. 미국 최악의 마녀사냥 지역으로 꼽히는 매사추세츠 살렘에서는 21명이 마법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처형을 당했는데 이중 19명이 여성이었다.
왜 하필 여성이었을까. 1322년 프랑스에서는 자코바 펠리시라는 한 여의사가 재판에 회부됐다. 그녀는 파리에서 어떤 외과의사보다 치료를 잘한다는 평판을 받고 있었던데다 다른 의사들이 거부한 환자를 치료해 일반 백성들로부터 '치료의 예술사'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런 여의사가 재판을 받게 된 이유는 단 하나, 여성이 치료행위를 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결국 펠리시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더이상 치료 행위를 할 수 없었다. 물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평민들에게 돌아갔다. 이러한 판결이 내려진 데는 주술적 의미가 있다. 15세기 유럽에서 병을 치료하는 이는 산파나 부족의 나이든 여성, 치유사 등이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병을 치료하는 행위는 신묘한 힘을 동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산파나 치유사들이 마법을 통해 병을 낫게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마법이 좋은 일에만 쓰인다고 장담할 수 없다. 반대로 악한 행위에 마법이 쓰인다면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위해를 가할 수도 있다는 믿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가톨릭과 군주들은 이러한 대중의 두려움을 '마녀'라는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병자를 치료하는 이는 지역 공동체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하는 연륜 깊은 여인들이었다. 가톨릭 교회와 기존 권력층에게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신과 그 대리인만이 할 수 있는 신체와 영혼의 운명에 간섭하는 여성들의 치료 행위는 교회가 볼 때 감히 신에게 도전하는 행위였다. 권력층의 눈으로 볼 때도 이는 성직자와 신자, 군주와 농민, 남성과 여성이라는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위험 요인이었다. 여성의 치료 행위는 그대로 놔둘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정치적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녀로 지목된 이들 중 상당수는 부유한 여성, 그 중에서도 아들이 없거나 과부로 지내는, 한마디로 남성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여성들이었다. 교회가 재판을 통해 이들을 마녀로 규정하면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은 몰수돼 국가에 귀속됐다. 실제로 1490년 프랑스의 찰스 8세는 마녀재판에서 유죄를 받은 이들의 재산을 모두 국가로 귀속한다는 칙령을 반포했고, 1628년 6월27일에는 독일 오펜버그에서 마녀 한명당 2실링씩을 부과한다는 칙령이 내려졌다. 1622년에는 듀큐 막시밀리언 칙령이 등장했다. 여기서는 "악마와 손을 잡는 모든 사람은 고문을 받고 화형을 당하며 그의 재산을 몰수한다"고 규정했다.
재산 몰수는 당시 국가의 재정상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당시 독일, 프랑스 등의 세금 수입원은 사실상 농민에게 부과하는 토지세가 거의 유일했다. 흉년이 들거나 농민들이 경작지를 이탈하면 세원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상황에서도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전쟁을 하려면 군비가 필요하다. 세원은 좁은데 쓸 곳은 많으니 국고는 텅 비어갔다. 당시 유럽 국가 상당수가 재정적 어려움에 처했던 이유다. 유럽의 상당수 국가에서 마녀사냥을 국고 충원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재산 몰수 규정은 17세기에 들어서야 모습을 감췄다.
러시아 경제학자 시마코프 알렉산더와 세르게이 페트로프는 '마녀 사냥의 경제적 기원'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마녀 사냥은 중앙권력과 군주제를 공고화하기 위해 계획된 정치 행동이다. 자금이 부족한 권력층은 이단자들에 대한 무바비한 박해로 재산압류를 하고 이를 통해 이익을 얻었다...마녀 사냥은 자금 부족을 메우기 위한 방법이었다."
마녀 사냥이 권력층의 정치, 경제적 수단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주민들도 마녀라는 죄를 뒤집어 씌우는데 일조했다. 고발자는 다양했다. 지주도 있었고 농민도 있었다. 심지어 이웃도 그녀를 마녀라고 진술했다. 타깃은 주로 갑자기 떠오른 부유층이었다.
독일 바이에른주 코부르크에는 람홀드라는 사람이 있었다. 원래 직업은 장인이었지만 나중에 맥주와 우유를 판매하면서 벼락부자가 됐다. 금고에 돈이 쌓이자 그는 이웃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갑자기 부자가 된 것을 그의 아내 마가레타 람홀드가 마법을 썼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마가레타가 용을 부리는 마법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우유와 치즈를 만들었다는 얘기였다. 곧 마가레타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판결은 유죄였다. 마가레타는 1628년 처형됐다. 독일에서 가장 오랜된 도시 중 하나인 트리어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 도시에는 디에데리히 플라데 라는 인물은 가난한 소농들에게 소액으로 돈을 빌려주는 전문 대금업자였다. 그에게는 '악마와 결탁해 탐욕스러운 행동을 저질렀다'는 죄명이 붙었다. 재판에서는 무려 28명이 증인으로 나서 그가 마법으로 돈을 모았다는 증언을 했다.
이들의 재산은 곧 몰수됐다. 이 둘에게 돈을 꾼 사람들은 더이상 빚을 갚을 필요가 없었다. 마법으로 모은 돈은 모두 부정한 것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왜 자신의 이웃, 특히 대부업자를 마녀로 몰았는지 그 이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주들이라고 가만히 있었을까. 1665년 스코틀랜드에서는 재닛 맥머독이라는 중년 여성에 대한 마녀재판이 열렸다. 맥머드가 토지 임대료를 제대로 내지 못하자 지주인 존 무어가 그녀가 마녀라고 고발하면서 열린 재판이었다. 증인으로 나선 이들은 대부분 주변 이웃, 소작농들이었다. 1671년 6월18일 맥머독은 처형됐고 그녀의 시신은 불태워졌다.
사실 마녀라는 개념은 이미 10세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같은 광란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 왜 하필 15~17세기에 피바람이 불었을까.
일부에서는 당시 환경적 요인에서 해답을 찾고 있다. 기온과 마녀 사냥의 연관성을 주장한 미국의 경제학자 에밀리 오스터가 대표적이다. 15~17세기 유럽은 이상하리만큼 기온이 낮았다. 그래서 '소빙하기'라고 일컫어졌다. 낮은 기온은 농작물의 성장을 방해했다. 흉년이 든 것은 당연했다. 생선을 잡을 수도 없었다. 바다가 얼어붙어 배를 몰고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민심은 크게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자칫 농민 봉기가 일어날 지도 모를 판이었다. 군주와 귀족들에겐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오스터는 말했다. "추운 날씨와 마녀 사냥의 광기가 몰아친 시기는 일반적으로 일치했다. 기온이 오르고 내릴 때마다 마녀 재판은 줄거나 늘었다." 대중들의 분노를 딴 곳으로 유도할 필요가 있었다. 권력과 기득권을 유지해야 하는 기득권층은 마녀에 대한 공포, 부유층에 대한 반감, 흉년으로 폭발직전에 이른 민심을 달랠 희생양이 필요했다. 마녀 사냥이라는 중세 최악의 범죄는 이렇게 탄생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 믿고 싶어하는 대중들, 이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권력층, 어디선가가 많이 보던 모습 같지 않은가. 오늘도 창밖에는 갈라진 두개의 함성이 동시에 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