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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 Jul 15. 2024

정조의 노총각 노처녀 결혼 대작전

1791년 6월 2일 김희집과 신 씨 중매를 서다

  1791년 6월 2일. 정조가 말했다. " 두 남녀를 결혼시킵시다." 최고권력자의 한마디에 온 정부가 다 움직였다. 대상자는 평범한 양반집 출신인 28세 김희집과 21세 처녀 신 씨. 당시만 해도 남성이 15세, 여성은 14세가 되면 혼인할 수 있었다. 이몽룡과 성춘향이 만났을 때도 16세에 불과했다. 28살과 21살이면 늦은 나이였던 셈이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 외에 또 다른 동병상련도 있었다. 이들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모두 사돈이 될 집안으로부터 정실부인의 자손이 아니라는 또는 돈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이유로 파혼을 당했다. 남들이 기피하는 서자와 서녀를 나라에서 결혼시켜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준비는 착착 진행됐다. 두 남녀는 할 일이 없었다. 모든 것은 정부가 나서서 다 했다. 기획재정부 장관 격인 호조판서 조정진이 신랑 측, 선혜청 제조 이병모가 신부의 부모 역할을 대신했다. 결혼식 준비와 양가에 보내는 결혼 예물은 나라 곳간에서 나갔다. 혼례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또 다른 이벤트가 준비됐다. 이들의 결혼 스토리를 엮어 한 권의 책으로 역었다. 결혼 장려라는 국정 홍보 수단으로는 딲 이었다. 이렇게 나온 책의 제목이 '김신부부 전'. 조선판 '하트 시그널'이자 '나는 솔로(SOLO)'인 셈이다. 


노총각 노처녀 둔 아버지는 처벌 대상


  정조가 노처녀 노총각의 결혼에 큰 관심을 보였던 이유는 인구 때문이었다. 인구 감소 문제가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요즘 인구가 너무 많이 줄었습니다. (특정 지역의 경우) 31년 전에는 2만 2000여 명이었던 인구가 지금은 1만 2000명이라고 합니다." 

  저출생과는 무관할 것 같었던 약 500년 전 조선 중기 때 영의정 정광필이 중종에게 제기한 문제다. 그로부터 280년이 지난 1796년 3월 12일 이번에는 충청감사를 지냈던 임제원이 임금 앞에 섰다. 감사직을 그만두면서 하직 인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임제원은 입을 열었다. "요즘 저잣거리 10집 가운데 9집은 비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만큼 줄었다는 얘기다. 정조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조정 대신 중 한 명이 "그럴 리가 없다. 오히려 인구가 늘었다"라고 부정하자 "임진년 이전에는 성 안에서부터 강 밖에 이르기까지 인가가 즐비하였다고 하는데, 근년 이래로 옛날 즐비하던 집들 태반이 비어버렸는데도 어찌 인구가 증가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 인구 감소를 당시의 임금들도 심각하게 생각했다는 증거다. 

  물론 조선 시대에 인구 자체가 감소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1639년 853만 명이었던 조선 인구가 1801년 1483만 명에 달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문제는 증가율이었다. 17세기 중반 0.505% 달했던 인구 증가율은 18세기말~19세기 초에 0.197%까지 떨어졌다. 약 150년 사이 반토막 넘게 감소했다는 의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인구가 줄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우리나라 인구가 감소세에 접어든 것은 아니다. 하지만 1년 뒤인 2025년이 되면 우려는 현실이 될 가능성에 가슴을 졸이고 있다. 조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인구가 줄어들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했을지 모른다. 

  인구 감소가 조선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오늘날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지금이야 노동력 부족을 로봇과 인공지능(AI)과 같은 혁신 기술로 대체할 수 있지만 그때는 사람의 힘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인구가 줄어든다면 농사를 짓는데 심대한 타격이 불가피하고 이는 곧 백성들의 생존은 물론 왕조의 존폐문제로까지 직결된다. 조선 후기 민란이 급증한 데에는 삼정의 문란과 같은 부정부패도 한몫했지만 노동력 확보가 쉽지 않아 지면서 생계가 힘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는 결혼이 우선돼야 한다. 요즘 청년들을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n포 세대'라 부르는 것처럼 당시에도 결혼하지 않은 노처녀, 노총각이 꽤 많았다. 이 때문에 역대 조선의 왕들은 선남선녀를 맺기 위해 갖가지 묘안을 짜냈다. 우선 늦은 나이까지 결혼을 하지 않으면 법으로 처벌을 받았다. 처벌의 대상은 혼인 대상자가 아닌 그 부모였다. 실제로 성종 때 혼기가 찼음에도 결혼을 하지 않는 자식을 둔 아버지는 중앙 정부에 끌려가 문초를 받았다. 결혼하지 않은 사실을 숨긴 경우에도 똑같은 처벌을 받았다. "아비가 이웃 마을의 수장들과 짜고 자녀가 미혼인 사실을 숨기거나 보고하지 않는 자는 모두 중하게 여기겠다"는 성종의 명령도 이때 떨어졌다. 가장만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이 자녀를 늦게까지 결혼시키지 않은 사실을 알았음에도 이를 묵과한 경우 해당 마을의 관리도 처벌을 받았다. 결혼하는 이들이 워낙 적다 보니 비구니에게 머리를 기르고 혼례를 치르도록 하는 방안까지 검토됐다.  


'사치 결혼 금지' 혼례날 횃불, 안주 개수까지 통제  


  30~40살이 다되도록 시집 장가가지 못하는 노처녀, 노총각들은 주로 상류층이 아닌 서민층에 집중됐다. 이유는 단 하나, 혼수비용 때문이었다. 지금도 결혼 한번 하는데 '수억 원이 깨진다'며 한숨을 내쉰다. 비용을 마련하기 힘들어 결혼식을 미루는 사람들도 많다. 조선시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혼례를 치를 때 기와집 몇 채 값이 족히 들어갔다. 왕족은 유독 심했다. 왕자나 옹주가 혼례를 치를 때는 금그릇이나 은그릇이 등장하고 신부는 구슬과 옥으로 치장하는 것을 예사로 했다. 심지어 신랑이 신부 측에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물품을 보낼 때는 중국에서만 구할 수 있는 '사리능단(紗羅綾緞)'이라는 고급 비단이 10 필씩 동원됐다. 사주단자를 보낼 때만 현재 가격으로 치면 어림잡아 5000만 원 이상을 썼다는 얘기다. 신혼집을 장만할 때도 남의 집과 땅을 빼앗아 그곳에 더 큰 집을 짓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왕자나 옹주의 집을 짓는데 그 모양이 임금의 거처에 비할만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결혼의 '결'자도 꺼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더 이상 놔두고 볼 수 없었던지, 중종 때는 혼례를 할 때 사치를 막기 위한 조례까지 등장했다. 내용은 대단히 구체적이다.  혼인하는 날 밤 횃불은 2품 이상 10자루, 3품 이하는 6자루까지만 허용, 신부가 시부모를 찾아갈 때는 술은 1분(盆), 안주는 5그릇, 따라가는 여자 종 3명, 남자 종은 10명만 허용, 혼례 때 사리능단과 금은 주옥, 산호, 마류, 명박과 같은 사치스러운 물건은 일절 금지 등등. 만약 사리능단과 같은 사치품을 사용할 경우 장 80대를 친다는 처벌 내용도 포함돼 있다. 

  결혼을 시키기 위해 채찍만 든 것은 아니었다. 집안이 가난해 시집가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1424년 세종은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었음에도 돈이 없어 결혼하지 못한 선비의 딸들을 위해 형제와 친척들이 신랑감을 적극적으로 찾아보도록 했다. 또 결혼 비용으로 공신의 자녀에게는 쌀과 콩을 2석씩 주고 일반 선비들에게도 1석씩을 줬다. 성종 역시 혼례를 치르지 못한 선비들에게 쌀과 콩 10석, 평민에게는 5석을 주도록 했다. 결혼비용 지원은 조선왕조 내내 이뤄졌다. 

  그중에서도 노총각 노처녀 없애기에 가장 적극적인 임금은 정조였다. 정조는 한성부 다섯 개 부처에 도성 내 노총각 노처녀에 대한 일제 조사를 진행하도록 했다. 이렇게 파악된 인원이 모두 281명. 정조는 이들에게 500냥과 포 2단씩을 내렸다.  


자녀 낳은 관가 노비, 한 달간 출산 휴가 


  결혼만 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일단 먹고사는 걱정을 덜게 해 주는 것.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조선시대에도 세 쌍둥이를 낳는 일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어쩌면 산모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세 쌍둥이 이상을 낳으면 조정에 즉각 보고됐고 상도 주어졌다. 실제로 세종 때 광주에서 세 쌍둥이가 태어나자 쌀과 콩 10석을 주었고 사내아이 셋을 한꺼번에 낳은 함길도와 강원도의 부부에게도 쌀과 콩 7 석을 내렸다. 일종의 출산 축하금이다. 더불어 어렵게 낳은 자식을 굶어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출산 휴가도 있었다. 1430년 10월 19일 세종이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대언(代言)을 불렀다. 고려시대 있다가 유명무실해졌던 출산 휴가를 다시 시행하기 위함이었다. "옛적에 관가의 노비에 대하여 아이를 낳을 때에는 반드시 출산하고 나서 7일 이후에 복무하게 하였다. 이것은 아이를 버려두고 복무하면 어린아이가 해롭게 될까 봐 염려한 것이다. 일찍 1백 일 간의 휴가를 더 주게 하였다. 그러나 산기에 임박하여 복무하였다가 몸이 지치면 곧 미처 집에까지 가기 전에 아이를 낳는 경우가 있다. 만일 산기에 임하여 1개월 간의 복무를 면제하여 주면 어떻겠는가. 가령 그가 속인다 할지라도 1개월까지야 넘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상정소(詳定所)에 명하여 이에 대한 법을 제정하게 하라."-

  조선 임금들의 노력은 성공했을까. 인구수로만 본다면 대성공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 약 400만~750만 명이었던 인구는 1910년 1700만 명으로 세 배 가까이 늘었다. 하지만 조선은 결국 망했다. 인구 문제를 단지 결혼과 출산 문제로만 국한하면서 벌어진 예견된 결과였다. 국민들이 마음 놓고 잘 살 수 있는 나라가 됐다면 조선이 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인구를 인구 문제로만 봐서는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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