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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 Aug 20. 2024

金銀花가 된 어사화

1699년 10월 21일 증광시 부정사건과 기묘과옥

  이상했다. 1699년 10월 21일 임시 과거인 '증광시'가 끝났지만 한양의 공기가 예전 같지 않았다. 원래 과거가 끝나고 나면 저잣거리는 소란스럽기 마련이다. 이번 문제가 다른 때보다 쉬웠네 어려웠네, 어느 집 대감 자제가 합격을 했네 못했네 하는 갖가지 얘기들로 왁자지껄해야 마땅했다. 오늘날 대학 입시가 끝난 후 학교와 학원가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뒤숭숭한 얘기들이 떠돌았다. 누구누구가 부정을 저질러 과거에 급제했다는 내용이었다. 과거를 치른 장소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 대신 답안을 쓰도록 해 몰래 들여오거나 과거 시험을 위해 임시로 고용된 관원이 하인과 짜고 답안지가 담긴 봉투를 마치 다른 응시자의 답안인양 바꿔치기하는 등의 방법이 동원됐다는 등 갖가지 말들이 오갔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을 알리는 내용을 표현한 AI 이미지. 

  뿐만 아니었다. 저잣거리에는 과거와 관련한 노랫가락이 울려 퍼졌다. "백지로 낸 시험지에 홍패지(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성적의 등급과 성명을 기록해 주는 붉은 종이의 글) 나오니, 머리에 어사화 꽂고 길에서 쳐다보는 이에게 으시대네. 도적의 소굴에서 밤중에 휘파람 소리 들리니, 이 무리들 또한 청렴하다 말할까." 이 노래는 제목도 있었다. '어사화냐 금은화냐'.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고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전락했다는 조롱이었다. 훗날 조선 최대의 과거비리사건으로 기록된 '기묘과옥(己卯科獄)'의 서막이었다.  


답안지 바꿔치기부터 시험관 매수까지 '비리 종합세트'


   시중이 시끄러운데 조정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당시 과거 감시관을 했던 사간원 정언 이탄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이번 과거에 부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근거가 있었다. 새로 급제한 '이성휘'라는 인물은 원래 시험장에서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표(表)'로 답안지를 제출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합격했느냐고 묻자 글을 얼마나 문학적으로 잘 쓰는가를 평가하는 '부(賦)'로 급제했다고 말하고 돌아다녔다. 이번 과거 시험에서 '부'로 합격한 사람이 없음을 알고 있는 이탄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어유봉이라는 인물이 쓴 답안지가 송성이라는 이름으로 제출된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번 과거에서 부정이 횡행했다는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는 대목이었다. 

  결국 그는 증광시가 있은 지 열흘 뒤인 1699년 11월 1일 숙종에게 이 같은 소문을 보고했다. 이어 진상 파악을 위해 답안지를 모두 거둬들여 일일이 확인해 봐야 한다고 탄언했다. 소문이 워낙 구체적이었기에 과장을 감독한 검시관의 입장에서는 그대로 넘어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숙종은 이탄의 탄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과거에서 부정이 있었다는 것은 관료들의 청렴성을 의심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더욱이 조선에서 과거는 시험을 통해 공무원이라는 유일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통로였다. 지금처럼 기업이 채용을 하는 것도 아니고 벤처 창업이 있었던 시기도 아니다. 창업이 되레 '나는 천한 사람이오'라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던 시절이었다. 이런 조선에서 '공정한' 인재 선발은 결코 훼손돼서는 안 될 중요한 가치였다. 어쩌면 조정이 백성들의 신뢰를 송뚜리째 잃을 수도 있었다. 숙종이 과거 부정에 대해 일단 반대 의사를 밝힌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소문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조정 대신 중에도 과거 시험장에서 부정의 소지가 있는 일을 목격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대로 덥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결국 대대적인 조사가 이뤄졌고 풍문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이 드러났다.  과거 응시자 중 12명이 이 사건에 연루됐고 이중 7명이 급제했다. 당시 급제자는 모두 34명. 합격자 5명 중 1명 이상이 부정으로 과거 급제를 했다는 의미다. 수법도 다양했다. 과장(科場)에서 남의 시험지를 훔쳐보는 커닝은 애교에 불과했다. 응시자의 답안지를 다른 사람의 답안지와 바꿔치기하는 '환봉(換封)', 과거 시험을 감독하는 시관과 거래하는 '시관잠통(試官潛通)', 답안지를 대신 써주는 '代述)', 과거 시험장에 응시자 대신 다른 사람이 들어가 답안을 작성하는 '대립(代立)' 등 별의별 수법이 다 동원됐다.  

   물론 이러한 짓을 벌이려면 응시자들이 자신만의 힘으로 절대 불가능했다. 과거 관리자와의 내통이 필수적이었다. 시험 문제는 내고 채점을 맡은 고시관, 시험지를 관리하는 차비관, 역서업무를 맡은 지방 하급 관리 서리들, 과장의 경비와 질서를 맡은 진행요원, 수험생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관여했다. 

  조사를 통해 밝혀진 비리 연루자의 수는 무려 50명. 과거 시험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부정에 연루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과거 부정 관계자는 조선시대 내내 대부분 한 명 또는 많아도 10명을 거의 넘지 않았다. 그만큼 1699년 과거는 그 규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그만큼 충격도 컸다. 전례 없이 과거 급제자 전원의 합격을 취소(파방, 罷榜)한 것은 그 결과였다. 

  비리 연루자에 대한 처벌도 전에 없이 강했다. 주동자는 관의 노비로 삼아 외딴섬에 보내졌고, 나머지도 변방 등으로 쫓겨나거나 군대에 들어가도록 했다. 일부는 가족 전체가 변방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답안지 한 장 값이 은 50냥... 평생 먹고살 수 있었다


  부정은 아무나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단 돈이 많이 들었다. 당시 영의정 서문중이 심문했던 내용을 보자. 입시관들은 김서윤이라는 이를 합격시키기 위해 급제한 답안지 1장을 권 씨 성을 가진 서리에게 빼내 달라고 했지만 그는 "사대부가 할 짓이 아니다"라며 거부했다. 그러자 "입격한 시권 1장을 빼내어 주면 당장 김서윤에게 바치고 은 50냥을 마땅히 주겠다"라고 했다. 결국 거래는 성사됐다. 이외에도 '은을 싼 봉투 한 덩이' 또는 '당시 답안지 1장을 바꿔치기하려면 이 정도의 값을 치러야 했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던 듯하다. 

  은자 50냥이면 어느 정도 가치일까. 정확한 가격 비교를 하기는 힘들지만 대략 추정은 가능하다. 일부에서는 당시 은 1냥이면 서민층의 연간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은자 50냥은 일반 백성 1 가구가 평생 먹고살 만큼의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과거 부정은 들키지만 않는다면 가장 확실한 급제 방법이었지만 대신 위험이 너무 컸다. 잡히면 응시자는 물론 매수자까지 감옥에 가거나 귀향이 보내졌다. 위험을 피하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거벽(巨擘)'과 '사수(寫手)'였다. 거벽은 원래 거장이라는 뜻이지만 이때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을 칭하고 사수는 글을 대신 써주는 사람을 말한다. 주로 돈을 받고 사대부나 지방 부자들의 집에서 숙식을 하는 가난한 선비들이 그 대상이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조선 말기 서울 사대부들은 평소에는 글을 읽지 않고 가난한 선비를 집에 데려다 놓고 돈을 주고 밥을 먹이는 등 양육하다가 과거가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소리를 쳐댔다. "거벽과 사수는 어디 있느냐."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조선 후기 과거 시험의 문란이었다. 정조 시기 지평 박사기가 올린 상소에 그 내용이 자세히 나와있다. "오늘날 폐단 중에서 과거의 폐단이 더욱 심한데 그 대략을 논하자면 선비들이 글을 읽지 않는 것이 첫째이고, 시험관이 빨리 낸 답안지 만을 취하는 것이 둘째이고, 과거 시험장이 난잡한 것이 셋째이고, 세력 있는 자들이 차작(시험을 대신 치게 하는 것 하는 것)이 넷째입니다." 응시자는 원래 과거장에 혼자 들어가야 했지만 조선 후기에는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 종이나 다른 사람을 고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응시자의 신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아 대리 시험을 쳐도 잡아내는 일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이러니 부잣집 자제의 경우 글 잘 쓰는 가난한 선비를 돈을 받고 고용해 대신 시험을 치게 하는 일이 잦았다. "부자들은 글자 한자 읽지 않아도 모든 답안지가 훌륭했다"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었다. 채점을 제 아무리 공평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급제자는 모두 부잣집 도령일 수밖에 없다. 신분 상승과 취업의 사다리는 저 멀리 걷어차였다. 좋은 대학 또는 의대를 보내기 위해 어려서부터 매달 수백만 원씩 들여 대치동 학원가에 아들 딸을 보내는 지금과 조선시대의 과거가 과연 다를까. 

   시간이 지날수록 부잣집들은 거벽과 사수들을 잡는데 혈안이 됐다. 수요는 인플레를 몰고 온다. 시험 합격의 대가는 천정부지로 뛰었다.  <매천야룍>에 따르면 초시를 처음 매매할 때 가격은 200냥이나 300냥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1000냥, 5000냥으로 늘더니 나중에는 만 냥까지 치솟았다. 과거 답안지 한 장은 곧 로또였다. 


정쟁이 된 과거 비리


   증광시 부정사건은 크게 두 방향으로 진행됐다. 첫 번째는 답안지 바꿔치기. 과거를 볼 때 응시자들은 시험지 첫 번째 면에 자신의 성명과 나이, 본관, 거주지 등을 적어 풀로 봉한 후 '근봉(謹封)'이라는 표시를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봉투와 시험지는 별도의 숫자로 표시돼 별도의 상자에 따로 보관됐고 채점이 끝난 후 해당 시험지 봉투와 맞춰 합격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했다. 응시자가 누구인지 채점자가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블라인드 테스트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상자를 관리하는 사람이 부정에 관여를 하면 이것도 소용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증광시에서는 등록관 오석하와 역서서리 문차성이 돈을 받고 이미 낙제한 박필 위(朴弼謂)·이성휘(李聖輝)·이수철(李秀哲), 심익창의 답안지를 합격자의 답안지를 담은 봉투와 바꿔치기했다. 하지만 힘 있는 자들의 자제들은 이러한 비리도 피해 갔다. 이 과정에 있었던 해프닝 하나가 대표적이다. 당시 뇌물을 받은 시험 감독관들이 답안지를 바꿔치기하기 위해 합격자의 봉투 하나를 꺼냈는데 당시 병조판서 윤이제의 아들 윤기경의 것이었다. 이를 보고 화들짝 놀란 시험관 민시준은 "재상 자제의 피봉이니 결코 훔쳐낼 수 없다"라며 도로 집어넣었다. 이번 과거에서 장원 급제한 이제의 답안지도 나왔다. 이것 역시 바꿀 수 없었다. 장원급제자의 답안지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두장의 봉투를 피봉 궤짝에 넣고 다른 두장을 따로 뽑아 4장을 맞췄다. 이렇게 해서 박필위, 이성휘, 이수철, 심창익 4명은 합격자 명단에 올라가고 이들에게 답안지를 바꿔치기당한 풍기의 김생과 이생, 건청동의 윤생, 평양 출신의 이두최는 억울하게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됐다. 무엇보다 공정했어야 할 과거에도 힘없고 백(back) 없는 이들만 피해를 본 셈이다. 

  눈여겨볼 것은 이번 사태의 주범이 누구냐를 놓고 당파 간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시험을 공정하게 진행해야 할 시관(試官)이 비리를 직접 저질렀다는 것은 과거의 근간을 흔들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당시 시험 감독관으로 참여한 이 중 비리 관여자로 거론된 이는 소론이었던 채점관이었던 부교리 조대수와 시험 감독관 오도일. 부교리 조대수의 경우 응시자 유세기의 답안지 번호를 받아 높은 점수를 줬다는 혐의를 받았고, 오도일은 답안지 바꿔치기에 직접 관여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물론 둘 다 펄쩍 뛰었다. 조대수는 "답안지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곧바로 꾸짖고 찢어버렸다"며 혐의를 극구 부인했다. 오도일 역시 풍문으로만 돌았을 뿐 결정적인 증거를 잡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노론은 오도일과 조대수가 부정에 깊이 관여했다며 전면적인 공격에 나섰다. 당시 정국은 격동의 시기였다. 희빈 장 씨(장옥정)가 왕비로 등극한 기사사화로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한 소론은 1694년 인현왕후의 복귀가 이뤄진 갑술환국으로 힘을 잃어갔다. 오도일은 소론을 이끄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를 비리의 주역으로 몰아간다면 소론의 몰락을 좀 더 빨리 촉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버틴 오도일의 입은 열리지 않았고 결국 증광시 시행 4년 후 그는 귀향 간 곳에서 숨을 거두게 됐다. 오도일의 죽음과 장희빈의 몰락은 더 이상 소론이 노론의 적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노론이 증광시 비리 사건을 더 이상 끌지 않고 1703년 마무리 지은 이유다. 어쩐지 낯설지 않은 모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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