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7월 14일 현재 일본 도쿄해양대학의 전신인 수산강습소 해양조사부 소속 조사선 '텐지마루(天鷗丸)'가 동해로 탐사활동을 나갔다. 탐사원들이 일본에서 서북쪽 공해상에서 이르렀을 때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깊은 바닷속에서 갑자기 얕은 수심의 언덕 지형이 감지된 것이다. 당시 측량한 깊이는 수심 307m. 엿새 뒤에도 수심 366m, 472m 정도의 지형이 탐지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정설이었던 '동해는 깊은 바다로만 이뤄졌다'는 주장이 틀렸다는 게 증명된 셈이다.
일본의 측량선 야마토(大和)호. 대화퇴는 이 측량선의 이름을 따 붙였다. /자료=일본 미카사기념박물관
이 소식은 즉각 일본 정부에 보고됐고, 2년 뒤 일본 해군이 직접 탐사에 뛰어들었다. 선두에 선 것은 해군수로부의 측량함 '야마토(大和)호'. 야마토호가 정밀 조사를 해보니 해당 지역의 가장 얕은 수심은 236m 밖에 안 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름도 결정됐다. 이곳을 정밀 측량한 '야마코호'의 이름을 딴 '대화퇴(大和堆)'였다. 한 때 세계 3대 어장인 태평양 북서부어장의 핵심 어장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1931년에는 대화퇴의 북서쪽 방향에 이와 비슷한 곳이 또 발견돼 '북대화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퇴(堆)'의 가장 큰 특징은 풍부한 어족자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해류와 조류가 퇴라는 언덕을 만나면 위로 올라오며 주위를 빙빙 돌게 된다. 이 과정에서 부유생물들이 따라 올라오며 선회를 하게 되고 이를 먹이로 하는 각종 어류들이 모이게 된다. 특히 대화퇴는 우리나라 강원도와 비슷한 106만㎢의 면적에 차가운 리만 한류와 따뜻한 쿠로시오 해류가 교차하는 탓에 명태 등 한류성 어종과 꽁치 같은 난류성 어종이 넘쳐난다. 특히 오징어는 한때 우리나라 어획량의 60%를 감당할 정도였다.
대화퇴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언급된 것은 1940년 7월. 당시 일제가 운영하던 수산시험장에서 대화퇴의 일부 어장이 우리 해역에도 일부 속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1940년 5월 14일 자 조선일보는 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수산시험장의 손으로 발견한 것은 그 규모가 일본의 대화퇴나 북대화퇴에보다 크지는 않으나 조선 측으로 보면 동해안의 가까운 것이 어장으로서의 유용한 가치가 높은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식민지 어민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자칫 우리 어민들이 일본이 개척한 황금어장을 넘볼 경우 자국 어민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이었을 터이다.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대화퇴가 다시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1967년 8월 국립수산진흥원의 조사선 '태백호'가 독도 동북쪽 200마일 해상에서 대규모 오징어 어장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배고픔에 시달렸던 시절. 우리 어민들이 어선을 끌고 대거 대화퇴를 향해 달려갔음은 물론이다.
대화퇴는 동경 134도부터 136도 사이에 분포돼 있다. 울릉도에서 어선을 타고 가면 30시간이나 가야 한다. 강릉~울릉도보다 두 배나 더 먼 거리다. 위치상으로는 한일 양국 사이에 존재하지만 한국 보다는 일본에 더 가까운 곳이다. 양국 어민들이 황금어장을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일 수 있다는 의미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한국과 일본을 뜨겁게 달궜던 신한일어업협정 협상이었다.
일본은 1997년 1월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선언하면서 한일 어업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1년 뒤인 1998년 1월 1668년 맺었던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울릉도와 일본 오키 섬의 중간 부분을 EEZ 경계로 발표하고 독도를 우리 측 수역에 포함시킨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맞대응에 나섰다.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유명한 일화가 등장한 것도 이때다. 파국을 막기 위한 협상이 진행됐다.
협상 과정에서 독도 문제 다음으로 가장 첨예한 이슈가 된 게 대화퇴의 처리였다. 우리 정부는 대화퇴의 중간수역의 동쪽 한계선을 동경 136도로 제시한 반면, 일본은 동경 134도를 고집했다. 단 1도라도 빼앗기면 황금어장의 대부분을 빼앗길 수 있는 상황. 물러설 수 없는 대치가 계속됐다. 이때 돌발변수가 등장했다. 한국이 1997년 말 외환위기에 빠지며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로 들어간 것이다. 외환 위기 극복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게 된 정부와 경제 강국 정부와의 협상에서 힘의 균형은 이루어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중간수역은 동경 135도 30분으로 결정됐다. 대화퇴 어장의 55%를 일본 측에 넘겨주고 45%에서만 그것도 일본과 공동으로 할 수 있게 된 우리 어민들에겐 득 보다 실이 많은 협상이었다.
황금어장 대화퇴는 우리 어민들에게 눈물의 바다이기도 하다. 1976년 10월 말 한국 어선 448척이 오징어 잡이를 위해 대화퇴에서 한창 조업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하늘이 서서히 시커멓게 변했다. 강우와 강풍 주의보가 발령되기는 했지만 이미 돌아가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판단 착오도 있었다. 선장들은 폭풍이 서서히 몰려올 줄 알았다. 조업을 빨리 끝내고 돌아가면 피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상황은 심상치 않게 변했다. 금방 우박이 쏟아지고 강풍과 폭우가 쏟아졌다. 20m 앞도 볼 수가 없었다. 더구나 바람의 방향도 동풍에서 서풍으로, 남풍에서 북풍으로 수시로 바뀌었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초속 15~17m의 강풍은 어민들에게는 죽음의 물결이라고 불리는 삼각파도를 만들어냈다. 바다는 금세 아비규환으로 뀌었다. 구사일생으로 구조된 한 선장의 증언에 따르면 무전기에는 '살려달라' '침몰한다'는 비명 소리만 가득했다. 선장과 선원들은 장장 하루에 걸쳐 생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침몰 7척, 실종 10척. 사망자 65명에 실종자는 그 4배에 달하는 260명. 총 희생자 수는 325명이나 됐다. 전년인 1975년 해난 사고로 숨진 전체 피해자 208명보다 100명 이상 많은 희생자다. 서해훼리호 때의 292명,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세월호 때의 304명도 훨씬 웃돈다. 말 그대로 사상 최악의 참사였다.
'동해 참사'가 발생하자 정부는 그 원인이 어선의 소형화에 있다고 보고 30톤 미만의 원해조업을 전면 금지시켰다. 소형 어선 한 척에 목을 매고 있었던 10만여 동해 어민들에게는 청천별력과 같은 재난이었다. 그럼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서슬 퍼렇던 유신정권 시절 한마디의 불만은 자칫 독이 돼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입을 닫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어민들의 희로애락을 담던 대화퇴는 요즘 또 다른 의미의 슬픔으로 다가온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술을 고도화하면서 대화퇴가 화력시범의 대상지가 되고 있는 탓이다. 북한이 발사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 떨어진 곳도 이곳이다. 황금어장을 둘러싼 갈등이 이제는 어업을 넘어 군사로까지 번지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