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들소(American Bison, 일명 ‘버펄로’) 한 마리가 대평원에서 백인 사냥꾼과 마주쳤다. 총을 든 사냥꾼을 본 들소는 스스로 가죽을 벗으며 간곡히 호소한다. “친구여, 쏘지 마시오. 여기 내 가죽을 가져가고 탄약을 아끼고 나를 평화롭게 보내주시오.”
1874년 6월 6일 미국의 정치주간지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에서 아메리카들소 대량학살을 특집으로 다루며 실었던 만평 '마지막 버펄로(The Last Buffalo)'의 내용이다. 이 만평은 미국에서 아메리카들소들이 미국인들에 의해 얼마나 잔혹하게 학살됐는지 그리고 왜 그런 비극이 일어나야 했는지를 극단적으로 설명한다.
미국인들이 북아메리카에 정착한 후 서부 개척에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아메리카들소는 서부 대평원 전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존재였다. 미국의 동물학자 윌리엄 T. 호나데이에 따라면 이들의 서식지는 대서양 연안부터 서쪽으로는 로키산맥과 뉴멕시코, 아이다호까지, 남쪽으로는 텍사스를 거쳐 멕시코 북동부까지, 북쪽으로는 그레이트 슬레이브 호스까지 퍼져 있었다. 무려 북미 대륙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개체 수도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각종 통계를 봤을 때 북아메리카 대평원에서 서식하던 들소의 수는 적어도 3000만 마리 이상은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각에서는 최대 6000만~2억 마리까지 존재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8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아메리카들소의 수를 세는 것이 숲의 나뭇잎 수는 세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미국에 정착한 유럽인들은 이 엄청난 수의 동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수많은 들소들이 무리를 지어 이동할 때는 지축을 흔들며 천둥과 같은 소리를 내 이들을 ‘평원의 천둥(Thunder of the plains)’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마차를 끌고 이동할 때도 들소 무리와 마주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개척민들은 이들이 완전히 지나가기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멸종의 길을 걷다
아메리카들소에 대한 인간의 사냥은 사실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인디언들은 들소 고기를 통해 가족이 살아가야 할 양식을 구했다. 들소 가죽은 그들에게 추위를 피하고 야생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만들 재료로 사용됐다. 기름은 겨울철 이들을 따뜻하게 보호해 줄 연료의 역할을 했다. 아메리카들소들은 원주민인 인디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던 것이다. 사냥방법은 단순했다. 인디언의 손에 총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활과 창이 사냥 도구의 전부였다. 이들은 들소를 둘러싸고 창과 활을 쏘거나 이들을 벼랑으로 밀어내는 방법을 썼다. 총이 등장했어도 대량 학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아메리카들소들의 씨가 마르기 전까지 자신들에게 필요한 수량 이상은 사냥하지 않았고 어린 들소들도 건드리지 않았다. 아메리카들소들이 인디언의 사냥에도 멸종하지 않고 수천만 마리나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다.
아메리카들소에게 악몽이 시작된 것은 1870년대. 미국에서 철도가 놓이기 시작하면서 철도 노동자들이 급격하게 늘어났고 이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들소 고기는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공급원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사냥꾼들이 모여든 것은 당연했다. 벌이도 쏠쏠했다. 들소 한 마리를 잡으면 약 25kg(55파운드)의 가공육과 20kg의 말린 고기를 얻을 수 있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4.5달러. 여기에 뼈와 뿔, 발굽, 혀 등을 포함하면 약 5달러 정도를 얻을 수 있었다. 당시 1달러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40달러 정도 되니 아메리카들소 한 마리를 잡으면 약 200달러(약 26만 원) 정도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사방 천지에 들소들이 널려 있으니 총알만 있으면 하루에 수백만 원씩 버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사냥꾼들의 들소 사냥이 대량 학살로 이어지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버펄로 빌(Buffalo Bill)'이라 불리는 사냥꾼 W. F. 코디눈 노동자들에게 고기를 공급하기 위해 500달러의 월급을 받으며 4,280마리나 살육했다.
비료 또는 연료용으로 쓰기 위해 디트로이트의 한 공장 하적장에 쌓여 있는 아메리카들소 해골들. 아래에는 사냥꾼으로 보이는 한 인물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무기와 운송수단의 발전 역시 들소들에게 치명적이었다. 1962년 세계 최초의 기관총이 등장했다. 이름하여 '게틀링건'. 한 발씩 쏘는 소총이 아니라 분당 수천 발을 쏘는 최신식무기 앞에 들소 떼는 속절없이 쓰러져갔다. 게다가 미국 횡단 열차가 완성되면서 특별열차를 타고 들소 떼와 나란히 달리면서 총을 쏘는 일도 흔해졌다. 들소 학살은 이제 단순한 사냥이 아니라 스포츠가 됐다.
대규모 학살이 거의 종지부를 찍었을 무렵인 1879년 북미 지역에서 살아남은 들소의 수는 1091마리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인디언 보호구역을 제외하고 순수 야생으로 남은 개체수는 456마리뿐이었다. 캔자스 군 주둔지의 도지 대령은 이렇게 표현했다. "수많은 들소들이 돌아다니던 곳에 시체들만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대기에는 메스꺼운 냄새가 코를 찔렀고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동물들로 가득했던 광대한 평원은 생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적막하고 악취 나는 불모지가 됐다." 북미의 평원은 더 이상 들소의 울음소리가 울리지 않는 죽음의 땅으로 바뀌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이렇게 단언했다. "아메리카들소는 멸종했다."
인디언 전쟁의 종식
아메리카들소의 멸종은 인디언에게 치명상을 안겼다. 들소가 차지했던 평원은 이제 소떼가 차지했다. 들소 고기를 주식량으로 했던 인디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이제 단 두 가지뿐이었다. 앉아서 죽거나 미국인들이 제시한 보호구역으로 들어가거나. 들소가 사라진 평원에서 그들은 극심한 식량난에 처했다. 어린이와 여자들은 도처에서 죽어갔다. 그동안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미국인들과 처절하게 싸웄던 인디언 부족들은 들소의 소멸과 더불어 굶주림과 추위에 떨어야 했다. 이제 미국과의 싸움보다 생존 그 자체와 싸워야 했다. 그토록 용맹했던 인디언 부족들이 1870년대 이후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자신들을 자신들의 땅을 지킬 수 있는 여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가뜩이나 인디언을 몰아내는데 혈안이었던 미국정부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미국 정부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아메리카들소의 멸종은 결국 미국과 인디언 간 전쟁의 종지부를 찍었고 원주민들은 보호구역으로 밀려났다. "아메리카들소 사냥꾼들은 골치 아픈 인디언 문제를 해결하는데 지난 30여 년 동안 전체 정규군이 거둔 성과보다 더 많은 기여를 했다"는 평가는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미국 정부는 힘을 잃은 인디언들을 하나하나 무릎 꿇렸다. 한때 1000만 명을 훌쩍 넘었던 인디언들은 불과 수십만 명만 남았다. 인디언 전쟁은 공식적으로는 1890년대 끝이 났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20년 전에 사실상 결판이 났다. 아메리카들소와 인디언의 처참한 패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