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마마’라 불렸던 천연두. 치명률이 한때 최고 90% 이상에 달할 만큼 당시에는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이런 천연두에 의원들이 특효약으로 처방하는 약이 있었다. ‘회천감로음(回天甘露飮)’. 만드는 법은 간단했다. 찹쌀로 만든 나미차에 설탕을 넣는 것이다. 금이나 은으로 만든 가락지 등을 삼켰을 때는 묵은 보리를 볶아 갈아서 가루를 만든 후 여기에 황설탕을 넣고 밥과 함께 먹는 방법을 처방했다. 이렇게 만든 혼합물을 매회 1잔씩 하루 2회를 먹으면 사나흘 후 내려간다고 했다. 도자기를 만들었던 공인 지규식이 쓴 ‘하재일기’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두 처방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재료가 있다. 설탕이다. 설탕 하면 케이크나 과자, 아이스크림 같은 달달한 디저트를 떠올리고 비만, 고혈압, 당뇨 등 성인병의 주원인으로 여기는 현대인과는 사뭇 다른 시각이다. 최근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제로 음료’만 찾는 청년들의 눈으로도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접근이다.
흰머리도 검게 해 주는 '신묘한 영약'
현재는 설탕을 죄악의 산물처럼 취급하지만 불과 100~2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설탕은 많은 병증을 치료하는 특효약으로 쓰였다. 실제로 승정원일기에는 1805년 2월 23일 순조가 회로감로음을 마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하재일기 1896년 3월 8일 자에도 설탕으로 약재가 쓰였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선 선조 때 양예수가 역대 의학자들의 전기를 담아 편찬한 ‘의림촬요’에는 ‘비전삼선고(秘傳三仙糕)’라는 약이 등장한다. 인삼, 사약, 연자옥, 백복령, 감실이라는 5가지 약재에 멥쌀과 찹쌀을 더해 곱게 갈고 그 위에 설탕과 백밀 각 1되를 녹인 것 위에 넣은 후 쌀을 넣고 익혀 만드는데 그 약효가 “신묘함을 다 서술할 수 없디”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의림촬요에서는 ‘이 약을 100일간 복용하면 치아가 튼튼해지고 흰머리가 검어지며 음양의 기를 북돋고 신장의 물기운을 보약 하며 비위의 기운을 길러준다’ 고도했다. 한마디로 만고의 보약이라는 뜻이다.
비장을 보호하고 열을 내리는 데는 ‘사탕원(砂糖圓)’이 쓰였다. 사탕 2냥을 칼로 긁어 넣고 사인 가루 1돈을 넣어 꿀을 약간 섞어 반죽하여 환을 만들었다. 이외에도 ‘봉수단(鳳髓丹)’ ‘백설고(白雪糕 백설기)’ 등 설탕으로 만든 약들은 무수히 많았다.
이렇듯 신묘한 약효를 지녔으니 허준이 지은 조선 최고의 의학서 '동의보감'에 설탕이 빠질 리 없다. "파두독(巴豆毒-파두라는 약제에 의한 중독)은 사람으로 하여금 크게 토사(吐瀉)케 하고, 번갈(煩渴, 가슴이 답답해 갈증이 드는 것)이 들며, 신열(身熱, 몸에 열이 나는 현상)이 나게 한다. 급히 황련(黃連)ㆍ황백(黃柏) 전탕(煎湯)을 식혀 먹이거나, 또는 창포(菖蒲)ㆍ갈근(葛根)을 짓찧어 즙을 내어 먹이고 다시 냉수에 수족을 담가준다... 또 남근(藍根)ㆍ사탕(砂糖)을 문드러지게 갈아서 물에 타 먹이거나 흑두(黑豆)를 달여 즙을 짜서 먹이며..."
조선에서만 설탕이 약재로 쓰인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는 설탕이 14세기 이전까지 거의 식용으로 쓰이지 않았다. 물론 왕실이나 귀족, 성직자중 극히 일부는 케이크 등으로 즐기기는 했다. 우리에게 '아라비안나이트'로 알려진 '천일야화'에는 왕비와 공주 등이 설탕으로 만든 셔벗과 성 모양의 케이크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인과는 다른 '별 세상'에서 이루어질 일일뿐, 대부분은 부분 의약적 용도로만 사용됐다. 지금의 튀르키예와 남유럽 지역에 해당하는 비잔틴 제국과 인도 등에서는 오히려 조선보다 더 일찍, 더 많이 쓰였다. 실제로 서양 의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비잔틴 제국의 시메온 메스(Symeon Seth)는 설탕 예찬론자였다. 그는 11세기 초 발표한 ‘식료품 능력에 대한 논문’에서 “환자가 갈증을 느끼지 않고 소화하기 쉽기 때문에 꿀보다 더 낫다”라고까지 표현했다. 게다가 설탕과 차가운 물을 섞는 간단한 방법으로 몸을 식히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유를 넣은 쌀과 함께 먹으면 건강한 육체를 유지할 수 있는 영양식이라고까지 말했다. 한마디로 그에게 설탕은 ‘만병통치약’이었던 셈이다. 그보다 1000년 전인 1세기 경에는 로마의 식물학자인 페다니우스 디오스코리데스(Pedanius Dioscorides)가 ‘약물지(De Materia medica)’를 통해 “(설탕은)물에 녹여 장과 위를 위해 마시면 좋으며, 방광과 신장염을 완화하는데 도움이 된다. 설탕을 물에 녹여 눈에 문지르면 시야를 밝게 할 수 있다”라고 적었다. 오늘날 약국이나 편의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시럽 형태의 물약이 탄생한 것도 이즈음으로 추정된다.
14세기 이후에도 설탕은 유용한 약재로 쓰였다. 특히 페스트와 같은 전염병이 창궐했던 시기에는 열을 내리는데 주로 사용됐다. 실제로 1700년대 독일 함부르크 의사들은 땀을 흘리는 환자들의 체질을 강화하기 위해 설탕을 넣은 레몬 잎 주스를 처방했다.
kg당 60만 원... 왕조차 구하지 못했다
설탕이 약으로 쓰일 수 있었던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먹을 것이 많지 않았던 시절 많은 백성들은 극심한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사람이 하루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열량은 대략 1600~2800 칼로리 정도. 하지만 14세기까지만 해도 상당수 노예와 농민들은 하루 필요 칼로리 이하만 섭취한 채 일을 해야 했다. 물론 중세 시대 농민들이 충분한 열량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지적도 있지만 흉년과 기아는 시시때때로 일어났다. 시대적 조건이 영양실조를 피할 수 없게 만들었던 셈이다. 구루병, 괴혈병, 빈혈 등 과거 백성들이 흔히 겪어야 했던 질병들은 대부분 영양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배고픔에 허덕이던 사람들에게 고칼로리의 설탕은 말 그대로 기적의 약이었다. 고칼로리를 제공하는 설탕은 일시적으로 기운을 차릴 수 있게 했다. 일본의 역사학자 가와기타 미노루는 ‘설탕의 세계사’에서 만성적인 영양실조가 설탕을 만병통치약으로 만들었다고 지적한 이유다.
중국 하이난성의 사탕수수 밭
하지만 설탕은 일반 백성이 접하기에 너무 먼 곳에 있었다. 우선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설탕의 원료가 되는 사탕수수는 10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인도와 뉴기니, 중국 남부 등에서만 재배됐지만 11세기 이후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으로 확대됐고 이후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와 이집트로까지 퍼져 나갔다. 나머지 지역에서는 교역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었다. 13세기 이후 이슬람 문화권과 유럽에도 설탕이 돌기는 했지만 그 수량은 극히 적었다. '설탕 마니아'로 평가받는 영국의 헨리 3세는 1226년 윈체스터 영주에게 알렉산드리아산 고급 설탕 3파운드를 보내라고 명령했고, 만약 구할 수 없다면 부자들이 갖고 있는 설탕 1파운드를 자신에게 보내라고 했다. 천국의 조미료는 영국 국왕조차 구하기 힘든 희소재였던 것이다.
우리라고 달랐을까. 고려 명종 때 문인 이인로가 쓴 '파한집'에는 승려 혜소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왕자 출신이자 대각국사 의천의 대제자인 그는 임금 앞에서 화엄경을 강의한 후 받은 수많은 은(銀)을 설탕 백 덩이와 맞바꾸었고 자신이 사는 곳 안팎에 늘어놓았다. “내 평소 좋아하던 것인데 내년 봄 장삿배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구하겠느냐”는 게 이유였다. 설탕 구하기가 그만큼 힘들었다는 의미다.
조선이 들어서도 사정이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문종의 일이다. 어머니인 어머니 소헌왕후 심 씨가 병으로 세상을 뜨기 전 사탕을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던 모양이다. 문제는 사탕이 쉽게 구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소헌왕후는 결국 사망할 때까지 사탕을 먹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후 사탕을 구해 올린 사람이 등장했다. 1452년 5월 14일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적었다. "임금이 이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면서 휘덕전(소헌왕후의 혼백을 모신 곳)에 바치었다." 임금도 못 구하는 것을 어디 일반 백성이 구경이나 했을까.
값도 너무 비쌌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288년 영국 왕실은 2700kg의 설탕을 사기 위해 6만 파운드(2011년 기준)를 지불했다. kg당 22파운드(약 4만 원)씩 주고 설탕을 사 왔던 셈이다. 하지만 12년 후인 1300년 런던에서의 설탕 가격은 15배 이상 껑충 뛴 kg당 350파운드(약 60만 원)에 달했다. 이후 가격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1319년에도 여전히 kg당 12만 원 안팎을 넘나들었다. 국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연간 설탕 섭취량은 31.8kg. 우리니라 국민들이 아직도 중세 시기에 살고 있었다면 한 해에 370만 원 이상을 설탕 사는데만 써야 한다. 이는 1인당 국민소득(3859만 원)의 약 10분의 1에 달하는 수치다.
조선에서도 설탕이 비싸기는 마찬가지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이 쓴 '담헌서'를 보면 중국에서는 손바닥만 한 사탕 한 덩어리가 '은전 한 푼' 정도에 거래됐다. 현재 시세로 약 1300원가량이다. 그러면서 홍대용은 "사탕의 원료인 사탕수수가 남방에서 얼마나 많이 생산되는 것인가 하는 것을 가히 알 수 있다"며 부러워했다. 조선에서의 설탕 가격이 얼마나 비쌌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성직자나 왕실, 심지어 왕도 구하기 힘든 설탕을 과연 일반 백성들이 한 번이나 볼 수는 있었을까. 약재로 쓰였다고는 하지만 그 귀한 것을 처방할 의원이 얼마나 됐을까. 가마가 나타나면 엎드려 고개조차 들 수 없었던 이들에게 설탕은 그림의 떡 보다도 더 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재료. 일반 백성들에게 설탕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만병통치약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