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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 Nov 28. 2023

링컨 보다 윌버포스

1789년 5월 12일 런던 하원 노예무역 폐지 연설

1789년 5월 12일 영국 하원에서 한 의원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하원 입성 9년 차 의원인 윌리엄 윌버포스였다. "제가 오늘 하게 될 얘기는 이나와 유럽만이 아니라 전 세계, 그리고 후대가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입니다." 하원 단상에 오른 주제는 당시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국가라면 누구나 뛰어들었던 노예무역. 그는 열정적이고 격정적으로 외쳤다. "이 끔찍한 무역에 대해 우리 모두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 넘기지 말고 (노예무역을 하는) 우리 자신을 용서하지 말아야 합니다."

동료의원들의 동의를 구하듯 주위를 돌아본 후 이번에는 노예무역선의 실상을 고발했다. "구역질 나고 역겨운 냄새 속에 병들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노예들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쇠사슬로 묶여 있는 600~700명을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그들의 오른쪽 무릎은 족쇄로 다른 사람의 왼쪽 무릎과 같이 묶여 있습니다. 서로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 발 디딜 틈이 없고 악취가 너무 심해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연설 말미 그는 결심한 듯 말했다. "저는 노예 무역선이 너무 끔찍해 결심했습니다. 완전히 폐지하기로. 부당하게 이뤄진 무역은 폐지돼야 합니다. 저는 이를 위해 절대로 쉬지 않겠습니다. "

노예무역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밝히며 비인간적인 제도의 폐지를 이끌었던 윌포비스의 첫걸음은 이렇게 시작했다. 격정적인 그의 첫 폐지 연설에 동료 의원들은 감동을 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1791년 표결에 부쳐진 노예폐지법안은 163대 88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됐다. 이후 거의 매년 폐지법안을 발의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예무역의 참상이 영국 전역에 알려지며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커졌다. 그가 의회에서 첫 연설을 한 18년 후인 1807년 2월 23일 노예무역 폐지법안이 드디어 의회에서 통과됐다. 283대 16. 압도적 찬성이었다. 윌리엄 헤이그는 '위대한 노예무역 폐지 운동가의 삶'이라는 저서를 통해 당시 윌퍼포스가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27년이 지난 1834년 영국에서 노예제는 최소한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미국에서 에이브라함 링컨 당시 대통령에 의해 법적으로 노예 해방이 이뤄지기 31년 전이다. 

윌버포스는 링컨과 달랐다. 링컨은 흑인에 대한 백인의 우월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가 주장한 것은 백인보다는 열등하지만 그럼에도 흑인이 누릴 수 있는 권리는 마땅히 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윌버포스는 노예무역에서 발생하는 비극을 막는데 초점을 두면서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부각했다. 링컨에게서 보이는 우열의 개념은 최소한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종호의 학살 장면을 묘사한 유화 '노예선'. 자료=보스턴미술관

물론 노예무역 폐지를 윌버포스 혼자의 힘으로 이룬 성과로 보기는 힘들다. 1780년대는 유독 노예무역의 참상을 알리는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1781년 9월 노예무역선 종(Zong)호는  442명의 노예를 태우고 영국 리버풀에서 자메이카로 출발했다. 보통 노예무역선 한 척에 190여 명 정도 태운다는 것을 감안하면 탑승인원이 정원의 두 배를 넘는다. 항해 도중 악재가 겹쳤다. 항로를 잘못 잡아 식수와 식량을 공급받기로 한 항구는 구경도 못하고 지나갔다. 게다가 종착지인 자메이카를 그냥 지나치는 치명적인 실수까지 범했다. 항해가 길어지면서 식수와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자 선장은 최악의 선택을 했다. 사흘에 걸쳐 마치 133명의 노예를 바다에 던져 익사시킨 것. 경악할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선주는 선장이 노예를 익사시킨 게 배를 구하기 위해 '화물'을 버린 것에 해당한다며 노예 1인당 30파운드를 지급해 달라는 청구를 보험사에 냈다. 하지만 보험사가 이를 거부하며 재판으로 비화했고 이 과정에서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 이것이 그 유명한 '종호 학살사건'이다.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노예는 그 수가 얼마나 되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많은 유럽인들이 충격을 받았다. 영국 국왕의 자문기관인 추밀원이 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7년 후인 1788년에는 한 장의 도면이 세상에 등장했다. 한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게 무엇인가가 빼곡하게 차 있는 모습. 얼핏 보면 마치 참외 속 씨들을 보는 것 같다. 씨처럼 보이던 것들의 정체는 노예들. 도면은 아프리카인들을 잡아 식민지로 나르는 영국 노예 무역선 '브룩스호'의 짐칸 구조였다. 

1788 노예무역선 '브룩스'호의 짐칸 구조를 보여주는 도면. 사진=위키미디어 

노예들의 공간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앞쪽부터 성인 남성, 남자아이, 성인 여성, 여자 아이들로 구분돼 있다. 이들에게 허락된 공간은 성인과 남자아이의 경우 세로 183cm 가로 43cm, 여자 아이는 세로 122cm 가로 36cm에 불과하다. 높이도 겨우 95cm밖에 안 됐다. 그마저도 2층 구조로 돼 있어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도면에 사람이 무릎을 껴안고 고개를 숙인 채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동이 거의 불가능하니 용변도 누워서 해결해야 했다. 

뿐만 아니다. 이들의 손과 발에는 쇠로 만든 족쇄가 항상 함께 했다. 혼자 묶인 게 아니었다. 도망가지 못하게 2인 1조로 묶여 있었다. 여기에 쇠사슬과 목에 거는 조임쇠까지, 그야말로 소 돼지와 같은 취급이었다. 무려 292명이 이런 상태로 적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 동안 아프리카 북중부 해안에서 카리브 해안 또는 미국까지 항해를 해야 했다. 

불과 1년 뒤인 1789년 리버풀의 노예무역상인 로버트 노리스가 한 권의 책을 냈다. '기니 내륙 국가 다호미의 왕 보사 아하디의 통치에 대한 회고록. 수도인 아보메(Abomey)로의 여정 추가. 런던의 아프리카 노예무역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라는 다소 긴 제목의 이 책에는 당시 노예무역의 규모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흑인들이 죽어갔는지를 생생하게 전해줬다. 이 책에 따르면 1771년 한 해 노예무역에 동원된 배는 190여 척에 달하고 수송된 인원은 4만 7000여 명이나 됐다. 배 밑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최소 6개월 이상 이동하는 탓에 항해 중 사망자가 적게는 16% 많게는 30%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노예무역의 참상을 전해 들은 영국민들의 충격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영국에서 노예무역폐지협회가 생기는 등 사회적으로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던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이미 익숙해진 사회구조를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 총대를 메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역사는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굴러가지만 그 속도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인간일 수밖에 없다. 윌버포스를 통해 구조 속에 개인이 매몰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또 한 번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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