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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 Nov 15. 2023

세종은 천민에게도 '성군'이었을까

1432년 3월 15일 노비 종부법 폐지

조선 최고의 성군, 이순신 장군과 함께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인물. 광화문에 서 있는 두 동상 가운데 하나의 주인공. 조선 4대 임금 세종이다. 

우리나라에서 세종은 그냥 임금이 아니다. '대왕'이다. 한글을 창제했고 해시계와 물시계, 천문기구등 과학 발전에 힘을 쓰며 조선 역사상 최대의 전성기를 이룬 주인공이기도 하다. 양반은 물론 평민들에게도 '성군'이라 불릴 만큼 치세를 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 천민들에게 세종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들에게도 세종은 성군이었을까. 

1432년 3월 15일 오늘날로 치면 태스크포스(TF) 격인 '상정소'를 담당하는 맹사성과 권진, 허조, 정초가 편전에 들었다. 세종의 부름 때문이었다. 이유는 이러했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노비에 대한 법은 아직 고친 일이 없다. 다만 공·사비가 양민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녀는 양민으로 처리한다는 법은, 대신들이 그것의 옳지 않음을 말하는 이가 많았으나 내가 듣지 않았는데, 이제 다시 생각하니, 공사 천비가 자주 그 남편을 바꾸어 양민과 천민을 뒤섞기 때문에 어느 남편의 자식인지 분명히 가려내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을 것이다." 노비가 양인과 자주 결혼할 경우 아버지가 누구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패륜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양천의 결혼에 대한 문제는 이미 선친인 태종이 정해놓았다는 점이다. "어떻게 하면 위로 태종께서 이루어 놓은 법에 위배되지 아니하고, 아래로 인륜 바른 길을 파괴하는 일이 없게 할 수 있을 것인지 각기 충분히 의논하여 보고하라"라고 지시한 이유다. 

말이 '의논'이라고 했지만 어느 신하가 임금이 마음먹은 일에 토를 달까. 맹사성 등이 그 의도를 몰랐을까. 원하는 대답이 바로 나왔다. "노비의 자녀가 어미의 신분을 따르게 하는 법은 또한 한 시대의 좋은 법규입니다... 천한 계집이 날마다 그 남편을 바꿔서 행위가 금수(禽獸)와 같으니, 그가 낳은 자식은 다만 어미만 알 뿐 아비는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노비는 어미를 따른다는 법이 생기게 한 까닭입니다. 이제 계집종의 자식이라도 아비가 양민이면 아비를 좇아 양민이 된다고 한 현행법을 폐지하고, 다시 어미를 좇아 천민이 되게 하는 법을 세운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한번 노비는 대대로 노비라는 조선의 계급질서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천민 출신인 장영실이 상의원 정오품 '별좌'와 정사품 무관 '호군'의 벼슬을 얻기는 했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사례였을 뿐이다. 

원래 노비는 대대로 천민이 아니었다. 불과 18년 노비에게도 양인으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이 그렇게 만들었다. 1414년 6월 27일의 일이다. "재상의 자식을 종모법에 따라 역사시키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다." 이 한마디가 천민의 자식도 양인과 결혼할 경우 양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다음 말은 더 의미심장하다. "하늘이 백성을 낼 때에는 본래부터 천민은 없었다." 만인평등사상까지는 아니겠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천민의 신분 상승은 그렇게 가능해졌다. 

태종이 누구인가. 어린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친형제들과도 칼을 겨누었다. 권력을 향한 욕심은 그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보는 이에 따라 왕권 강화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와 함께 권력을 위해서라면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함의 대명사였다. 그런 태종이 천민에게 양인의 길을 열어줬다. 세종이 그것을 막았다. 18년 만에 신분 상승의 길이 막힌 천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과연 누가 성군이라 생각할까. 태종일까 세종일까.

세종이 왜 종부법(從夫法)을 없애고 종모법(從母法)으로 바꿨는지 분명한 의도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분위기로 어림짐작은 해 볼 수 있다. 당시 세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해야 할 것은 많으니 주변에 사람을 모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예나 지금이나 인재를 얻기 위해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 중 하나가 '경제적 보상'이다. 

노비는 조선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조선은 농경사회다.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절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노동력일 수밖에 없다. 양반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재산임이 틀림없다. 조선조 내내 노비를 둘러 산 소유권 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비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조선의 헌법 '경국대전'을 보면 범죄자를 잡을 때 주는 포상의 기준이 나온다. 절도범 1명을 고발하면 면포 10 필, 강도는 관직이나 면포 50 필을 상으로 줬다. 도적때와 같은 무리를 잡는데 공을 세운 이는 관리에게는 3계급 특진이나 면포 100 필, 천민은 면천받을 수 있다. 이에 비추어 보면  천민 1인은 면포 100 필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가장 말단 공무원인 종 9품의 1년 치 봉급과 엇비슷한 수준이다. 현재 9급 공무원 연봉의 중간값이 수당 제외하고 3000만 원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노비의 명목상 가치도 그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실제 노비의 가치는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노비를 늘린다는 것, 양반에게는 재산을 늘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고 종모법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당시 사람들은 세종의 처사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이를 당연히 여겼을지도 모른다. 세종도 잘못됐다는 것을 추후도 생각하지 않았을 터다. 단지 그때 사는 사람들의 시각과 시간이 흘러 흘러 과거를 알고 그 결과를 아는 오늘을 사는 이들의 시각이 다를 뿐이다. 시대에 대한 평가는 역사만이 할 수 있다. 역사가 무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모법은 영조 시대에 이르러 폐지된다. 사회경제적 변화로 양천 간 혼인이 늘면서 천민의 수가 늘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천민은 군역이나 부역을 면제받는다. 천민이 증가했다는 것은 양인이 줄었다는 것과 동일어이며 그만큼 양인 1인당 돌아가는 부담이 커졌다는 의미다. 영조의 종모법 폐지는 백성을 위한 조치가 아니라 국가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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