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사의 몫 Sep 01. 2020

와인 한 잔이 주는 위로

술이 주는 것은 정말 가짜 위로일까

한국에서 음주는 거의 사회생활과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술을 권하는 것 자체가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동시에 술을 거부하는 것은 어쩐지 무례한 것처럼 인식됩니다. 대리운전이라는 신박한 시스템 덕에 운전을 해야 한다는 건 술을 거부할 핑계가 못 될 테니, 한약을 먹고 있어서, 수술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등 건강상의 거부 사유가 꼭 필요하죠. 그냥 단순히 ‘지금 술을 먹을 기분이 아니라서요.’라는 생각을 하더라도 실제로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정 마시지 않더라도 술잔은 받아서 채우는 게 예의인 것처럼 인식됩니다. 이렇다 보니, 술에 취한 사람에 대해서도 다른 어느 나라보다 관대한 편이지요. 술에 취해버려서, 라는 게 흔한 변명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반면 서양 문화권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술을 억지로 권하거나 혼자 술을 마시는 행위조차 알코올 중독의 초기 증세라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전자는 ‘혼자만 술을 마시는 것이  민망하니까이고, 후자는 ‘정말 보는 사람이 없을  마음껏 마시겠다.’ 인데요. 밖에서는   모금 입에  대다가 집에 와서는 원하는 만큼 질주해 버리는 알코올 중독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술을 과하게 마시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는 문화권이라  그렇겠지요. 원하지 않는 타인에게 술을 권하는  역시 ‘’기껏 권했는데 싫다고 거절하는 사람 아니라 “싫다는데 술을 권하는 사람 예의 없고 이상한 것처럼 간주됩니다.


와인을 공부하기 이전에도, 저는 술이라는 음료와 술자리를 좋아하는 편이었습니다.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자리도 좋지만, 고된 하루를 마치고 돌아와, 혼자 맥주 한 캔을 따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도 좋았지요. 와인에 관심을 두고 나서는, 좋아하는 와인을 골라 안주 없이 천천히 와인 맛만을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이 참 의미 있게 느껴지더라고요. 정말 맛있는 와인 딱 한잔만 하고 싶은데 배는 크게 고프지 않을 때, 나의 온갖 미각을 이 한 잔에 집중하고 싶을 때 말이죠.


혼자 술을 드시면서 와인 한 병을 다 비우시는 분은 아마도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자 내가 이 술을 땄으니 먹고 취해버리겠다!’가 아니라, 한 잔 가득 따라서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서 마시고, 다음을 기약하며 보관할 수 있는 게 와인의 매력 같아요. 특히 오래된 빈티지 와인을 땄을 때는 와인을 막 개봉해서 마시는 한 모금과 약 20-30분 지나서 마시는 한 모금이 또 은근히 다르거든요.

온종일 시끌벅적한 장소에 있다가 외부의 모든 소음이 차단된 집에 돌아왔을 때, 저는 문득 와인 한 잔이 딱! 생각나는 때가 있어요. 그러면 먹고 싶은 와인을 심사숙고해서 고르고, 잔을 깨끗이 닦아 세팅해 둡니다. 와인을 뿅 따서 잔에 쪼르르 따르는 소리까지, 내가 원하는 백색소음만 존재하죠. 음악을 잔잔하게 틀기도 하고, 아예 음악 없이 조용히 하루를 회상하기도 합니다. 이때 텔레비전은 켜지 않아요.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가만히 회상한 뒤, 좋았던 일은 와인의 첫 향과 함께 기분 좋게 음미하고, 아쉬웠던 일도 그다음 모금과 함께 털어 넣어 버립니다. 도저히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있었다면, 그냥 와인의 맛과 향에 집중하기도 하고요. 어느 나라의 어느 와이너리인지, 포도는 어떤 품종인지, 이미 마셔본 와인인지 아닌지. 어쨌든 와인 업계에 종사하고 있으니,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와인 메이커가 빚은 술일 때도 있고요. 그러면 또 와인 메이커와 그분이 평소에 말씀하시던 양조 철학 등을 생각해봅니다. 다른 와인과 어떤 차별점을 두었는지. 안주를 두고 마시지 않으므로, 와인 자체의 맛에 더 집중하게 되는 게 큰 장점이죠. 아로마가 유난히 잘 읽히지 않을 때는, 집에 있는 다른 향신료를 맡아보며 비교해보기도 합니다.


와인이 나쁘진 않은데, 다음에 또 마시고 싶을 정도까지는 아니라면 남은 와인을 욕조에 풀기도 합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반신욕을 즐기는 거죠. 잔에 남은 와인을 마저 홀짝거리면서, 옅은 버건디 색조를 띄며 은은한 향을 풍기는 욕조에 들어가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을 좋아해요. 내일 해야 할 일을 곱씹어보고, 물 온도가 너무 차갑지 않게 식었을 때 몸을 헹구고 나와 피부에 닿는 감촉이 좋은 잠옷을 골라 잠자리에 듭니다. 혼자서 즐길 수 있는, 가성비와 가심비 모두 만족하는 작은 사치죠. 스트레스 해소는 덤이고요.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