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이 더 좋아졌다 (1)
이 책의 당초 가제는 <어쩌다 오사카>였다. 어쩌다 내 인생에 찾아온 오사카에서의 한 달 동안 생기는 크고 작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담고 싶은 생각에 지었던 제목이다. '어쩌다'라는 단어가 의미하듯 이번 한 달 살기에는 그다지 계획이 없었다. 일정과 머무를 곳만 정하고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떠나온 여정이었다. 프롤로그에서 밝혔듯 유일한 한 가지 계획이라면 '최대한 현지인처럼' 보내는 것이었다.
계획 없이 한 달을 살아간다는 것은 명암이 뚜렷했다. 우선 좋은 점부터. 무언가 해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하나였다. 기록하는 것. 글을 쓰기 위해 그때그때의 정보와 감정들을 메모했고, 그 장소들을 사진으로 남겼다. 오로지 이것뿐이었다. 나머지는 그저 자유롭게 움직였다. 발길이 닿는 대로 움직였고 멈추고 싶은 곳이 생기면 마음껏 오래 멈췄다. 정해진 대로만 사는 것이 편한 나였는데, 그 과정에서 처음으로 나와 대화하는 일이 많아졌다. "넌 이걸 좋아했구나. 아, 저건 너랑 맞지 않구나. 너 저번에 그거 좋아하더니 이건 어떤 것 같아?"와 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나에게 던지고 또 스스로 대답했다. 발길이 닿는 대로 움직이고 하고 싶은 대로 하니, 사소한 산책조차도, 자연을 바라보는 것조차도, 멍하니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조차도 전부 다 만족스러웠다.
자유에는 필연 책임이 따른다.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다 보니 때로는 아쉬운 결정을 하기도 했다. 갑자기 들어간 음식점이 영 별로였다든지, 기대하고 갔던 여행지가 생각보다 너무 별 볼 일 없다던지. 예전 같았으면 이런 상황에서 무언가 탓을 해야 했다. 그 정보를 잘못 준 대상을 탓하거나, 아니면 그 선택을 잘못한 나를 탓하며 자책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선택에 대해 나 스스로 이전보다 책임을 질 수 있게 된 것도 달라진 점이다. 나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 것. 선택의 결과가 때로는 좋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내 기대에 못 미칠 수도 있는 것.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크게 실망하거나 자책하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 다음엔 또 좋은 게 나오겠지."라며 여유를 가질 줄 아는 것. 이것은 자유를 추구하며 얻게 된 소중한 변화다.
계획 없이 다닌 여행에서는 무엇보다도 전혀 예상치 못한 귀중한 순간들을 만나기도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히메지 재즈 페스티벌이다. 히메지 여행을 넣을지 뺄지 여행 며칠 전까지 고민했지만 성 하나 보겠다고 일정에 넣었던 히메지였다. 습관처럼 구글 지도를 켜서 주변을 살피는데 근처에서 마침 동네 주민들의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을 줄은 상상이나 했을까. 그리고 그 공연이 나의 한 달의 오사카 생활에서 손에 꼽는 기억에 남는 순간이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이외에도 구라시키로 가는 길에 갑자기 내린 오카야마에서 우연히 일본 최고의 붓카케 우동을 만나기도 했고, 무작정 안 가본 동네로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떠난 '반파쿠기넨코엔'에서는 오사카 한 달 살기의 의미를 깨달은 터닝 포인트가 되기도 했다. 별생각 없이 친구네 회사 대표님을 만났다가 다음 날 대표님과 교토에 벚꽃을 보러 가는 출장에 종일 동행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나의 한 달이 촘촘하게 계획되어 있었다면 이런 우연한 기회가 들어 올 공간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계획을 무조건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무계획은 더 높은 확률의 실패가 많이 따른다. 우선 매일 같이 어딜 갈지 찾아보는 데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 현지에 도착해서도 아는 정보가 없기 때문에 길을 찾고 갈만한 곳을 찾는 데에 계속해서 시간을 쓴다. 시간으로도, 동선으로도 상당히 비효율적이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직장에서 늘 계획하는 습관이 들었던 나는 잠시 정신을 놓고 보면 막 이것저것 비교해 가며 철저하게 그 안에서 계획을 세우려는 나 자신을 문득 발견하기도 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다시 나를 무계획으로 최대한 내던졌다. 물론 누군가가 보기에는 여전히 그 속에서 계획적인 나로 비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나름대로는 계획 없이 즉흥적인 결정을 내리는 훈련이었다.
무계획은 실제로 수없이 실패했다. '반파쿠기넨코엔'에 다녀온 뒤로 갑작스러운 목적지 결정에 자신감이 붙었던 나는, 바다 근처에 있는 '아시아태평양 트레이드센터'라는 곳을 구글 지도에서 찾고는 무작정 찾아가기도 했다. 별다른 정보가 없었지만, 그래도 트레이드센터이니 우리 코엑스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상상하며 찾아간 곳이다. 심지어 바다 쪽이라 숙소에서 전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1시간 정도나 걸려 간 곳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볼 것도 없고 사람도 없고 썰렁한 분위기에 허무했던 기억이 난다. 그 외에도 나름 기대를 안고 갔던 '꽃박람회기념공원'도 생각보다 그냥 그렇기도 했다. 먹을 것은 또 어떠했나. 나는 특히 오사카 태생의 음식인 '타코야끼'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보이는 족족 자주 사 먹었다. 그런데 아무리 일본이지만 타코야끼도 자주 먹다 보니 맛없는 곳은 참 맛이 없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사 먹은 타코야끼 중에는 실패한 타코야끼도 많다.
그러나 실패는 실패고, 결론적으로 무계획 한 달 살기에 만족했다. 내 인생에 계획 없이 찾아온 '한 달의 오사카'라는 이 기회에 걸맞은 여행 방식이라 생각했다. 내 삶에 우연히 찾아온 이 기회를 물 흐르듯 즐기고 싶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도 되었다. 이 책조차도 말이다. 그냥 그 시간을 유유자적 보낸 나 자신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늘 '효율'과 '가성비'를 추구했던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비효율'과 '낭만', '여유'를 찾는 여행을 했다. 그리고 나의 변신은 꽤나 성공적이었다고 나 스스로 평가한다. 나는 이전보다 초조하지 않게 되었으며 덜 팍팍해졌다. 생전 없던 '아니면 말고' 식의 마인드도 가지게 되었다. '이게 좋지만 저것도 괜찮아'라는 포용력도 이전보다 생겼다. 이것들은 결코 한 달 살기를 하는 동안 내가 가지려고 노력했던 것들도 아니다. 아니,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달 살기를 다 하고 돌아온 지금, 문득 내 삶이 이렇게 바뀌었구나 하고 깨닫는다.
누구에게나 한 달 살기를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무계획 여행은 더욱 그렇다. 바쁜 와중에 짧은 시간을 내어 여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어느 정도 계획적인 여행은 필수다. 한 달 살기 또한 그렇다. 내 방식이 좋았으니 남에게 추천하는 것을 절대 금물이다. 내 방식은 내 상황 속에서만 좋았을 뿐 다른 사람의 상황에서는 어떻게 작용할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혹시 이 책을 읽는 이 중에 자신이 대한민국 공교육의 전형적인 산물로 살아왔다면, 대학 입시, 스펙, 취업, 결혼 등이라는 전형적인 삶의 루트대로 사는 것 외에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나 역시 그랬다고 꼭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 삶의 궤도를 벗어나면 마치 큰일이 날 것 같고 내 인생이 망할 것 같고 그렇지만, 결코 그렇지 않음을 말해주고 싶다. 계획 없이 보낸 한 달 살기에서 나는 계획으로는 감히 생각도 하지 못했을 소중한 순간들을 만났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삶에 그대로 확장된다는 것을 알았다. 지나친 계획 속에 내 삶을 몰아넣고 있었다면 잠시 그 계획으로부터 벗어나 흐르는 대로 몸을 맡겨 보자. 이것이 내가 내린 무계획 한 달 살기의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