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일마다 틀어지고, 바로 잡으려고 해도 오히려 어긋나는 것만 같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그 노력이 나타나기는커녕 허사로 느껴질 때. 심지어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나, 내가 서 있는 곳에 대한 의문마저 가지게 한다. 누군가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라고 말을 한다. 누군가는 잘못이라고 질책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비웃기도 한다. 가뜩이나 작아진 마음이 타인의 말에 더 작아져 버린다. 그런 날은 마실 때마다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던 술마저도 소용이 없어진다. 백약이 무효다.
남편이 공황장애로 회사를 그만둔 지 두 달이 되어간다. 회사에서 벗어나 신부님과의 상담을 하면서 자신에 대한 문제점 분석으로 (사실 분석한다고 지금 당장 눈에 띄게 달라지는 건 없지만 신부님 말에 의하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대한 차이는 엄청나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그나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이런 것이 문제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발전일 것이다.) 남편은 자신을 괴롭혔던, 상처받게 했던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잘 알게 되고 대처하고 다르게 할수 있는 시선을 가지고 되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다른 회사를 찾고, 구직활동을 하고 예전에 회사 다닐 때 만났던 사람들과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게 해서 회사에 바로 들어갈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무언가 자신이 하고 있기에 불안감을 덜 느끼는 듯했다. 되든 안되든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이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남편은 허리에 문제가 생겼고 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이 다 되어간다. 이제야 바닥을 쳐서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날아오르려던 날개가 문제가 생겨서 언제 날수나 있을런지 기약이 없어져 버렸다.
하늘이 무심하다고 생각했다.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데 하고 하늘에 대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졌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으니 쉬어 가는 거지 라는 정도의 생각이 아니라 어떻게 일이 안 풀려도 이렇게 안 풀릴 수가 있을까, 왜 대체 나에게 이련 시련이 오는 것일까, 내가 뭘 잘못했길래 라는 생각에. ( 저보다 더 힘든 일을 지나고 계시는 분들께는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타인의 훨씬 큰 고통보다는 자신발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이니 부디 양해를 구합니다.) 퇴직금은 점점 생활비로 사라져 가고 수입은 제로다. 허리 수술을 하게 된 상황에서 병원에서도 매시간마다 그냥 전화를 했다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지만 생각이 많아져서 그 생각의 방향이 조급하고 매몰되어 가는 것이 눈에 보이니 사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짜증이 났다. 물론, 좋게 이야기하고 바로잡아주려고 이런저런 얘기들로 안심시켜 주지만 어느 한 공간에 물리적 신체적 제약이 있는 사람이 그걸 깨닫고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그게 안되는 걸 알기에 기대하지도 않지만, 상대하는 건 굉장한 에너지 소모를 요구한다.
남편 수술 스케줄 때문에 어린이 집 선생님께 남편의 입원소식을 알렸었는데, 하원 때 선생님께서 안부를 묻는 질문을 하셨다. 시골에 애랑 둘이 있는데, 괜찮으냐고. 남편의 입원과 수술, 치료경과를 신경 쓰고 아이의 무릎뒤에 발생한 농가진으로 병원을 드나들고 시골의 독한 모기로 아이와 나의 다리가 엉망이 된 그런 것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아이를 씻기고 먹이느라, 그 와중에도 책 읽기 마저는 포기할 수 없어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른 채 살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안부차 내게 물었던 그 말에 가슴이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너무 정신없이 살다 보니 나의 안위 따위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 한마디에 내가 어떤 시간을 지나고 있는지 보였다.
나는 남편의 과거 자신 삶의 복기에 대해서 끊임없는 이야기를 들어주고(분석해주고), 공황장애가 심해지지 않도록 신경 쓰며 남편을 잘 먹이고 잘 재우고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게 하기 위해 정신을 쏟으며 살고 있었다. 아이 역시 잘 먹이고 잘 씻기고 잘 재우고 키우기 위해서 부단이 애를 썼다. 그 와중에 내가 쓰러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책을 읽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강하게 하게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지만, 정작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은 하지 않았다. 강해져야만 한다는 생각에, 쓰러지면 안 된다는 생각만으로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았더니 나의 마음이 힘들어 지치고 의지할 곳 없음에 오는 힘듦과 외로움은 저쪽으로 밀어둔 채 시간을 지내다 보니 누군가의 안부에 그제야 나도 외롭고 힘들구나라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그렇게 문득문득 모든 것을 놔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생을 살면서 겪었던 이 지겨운 과정의 반복들. 삶이 나를 놀리나? 내가 바보 같아서 매번 이런 삶의 구라에 당하는 걸까?
요 며칠 동안은 회당 이회영 선생의 구절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젊은 이회영 선생의 "한번뿐인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눈감는 선생이 일생으로 답했다는 그 구절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살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민, 어떠한 목표를 향해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대해서 일생동안 그 목표를 향해 몸소 실천하는 삶으로 답했다는 회당 선생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서 희생하고 평생 가난과 힘듦을 기꺼이 감수하며 산 이회영 선생.
그리고 앞서 읽었던 데이비드 고긴스 역시 자신이 세운 목표가 있기에 대해서 부러진 다리이면서도 마라톤을 할 만큼의 고통을 넘어선 투지가 있었다.
실직도, 병도, 공황장애도, 내가 나아갈 목표가 있다면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다. 그런 것들보다 더한 것들을 겪었을 때에도 이렇게 좌절하지 않았다. 그때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고 당면한 과제만 해결하면 지금만 버티면 좋은 날이 오겠지 라는 생각을 가지며 살고 있었다.
결국, 내게 부재중인 것은 목표와 희망이다.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좋고, 어쩌면 맹목적으로 미치광이처럼 믿을 수 있는 것도 좋다. 지금 이 자리가 아닌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도, 부러진 다리로 마라톤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도, 독립을 위해 전재산을 쏟아부을 수 있는 것도, 그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하는 것은 목표다. 그것이 없으니 삶이 치는 구라에 매일 당하며 휘둘릴 수밖에. 지금도 삶이 나를 속이려 든다.
만만하게 당하지는 않으리라. 잠시 휘청거릴 수는 있겠지만, 주저앉을 수는 있겠지만 늘 그래왔듯 나는 나만의 답을 찾을 것이다. 이 눔의 삶이 속이려는 드는 것에 속지 않고 다시 일어나 나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