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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d Sep 01. 2020

살아지는 삶을 산다는 것

♪あいみょん - 朝陽

나는 늦거나 빠르거나, 후회하니까,
뭐든지 좋아. 이젠 뭐든지.
어떻던지 좋아. 이제 어떻든 간에 말이야.
갈기갈기 찢겨 너덜너덜해지면,
어딘가 공원의 구석에라도 버려줘. 


♪Aimyon - 아침햇살


살아진다.

지금 나의 삶을 표현한다면 아무래도 이만한 표현이 없다. '어휴 내가 죽지 못해 살지' 던가 '내가 맘만 먹으면 언제든 퇴사할 수 있다' 같은 패션 우울증이나 분노와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이야기를 하자. 살아지는 삶은, 어감과는 다르게 꽤나 편하다(?). 어차피 내가 가는 길은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냥 흘러가는 대로 보내면 된다. 그렇게 살아짐을 당한다. 이런 삶의 이치를 모른다면, 사라진다. 사라질 것이다.  


처음 흐르듯이 살 때는 많이 아팠다. 

살아가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무미건조해졌다. 

소용없었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런 살아지는 삶에 퍽 익숙해져 다시금 감정 표현도 잘한다. 물론 사람답게 웃을 때도 있지만, 보통은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일본에는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 문화가 있다고 한다. 다테마에는 본심을 숨기고 친절하게 대한다는 일본인들의 사회상을 나타내는데, 나에게는 이러한 부정적 감정마저 다테마에(建前)라고 할 수 있겠다. 살아가고 있다고 숨기는 방법이다. 살아지는 건데. 






"말에는 힘이 있으니까, 굳이 나쁜 말은 하지 마렴."

그래도 가급적이면 가족들에게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써 왔는데도, 어려서부터 어머니는 아들의 이런 정신머리를 알고 계셨는지, 혼냄과 걱정을 섞은 조언을 해주시곤 한다. 그런 가르침을 받고서도 매번 어리석은 기도를 한다. 좋은 마음으로 사람들과, 세상 속에서 함께 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아침에 한다면, 오늘도 부정적인 기운으로 살아감에 대한 참회를 새벽에 하는 것의 반복이다. 언젠가 사형수가 사형 직전에 믿음을 가지면 천국을 간다는 비유에 비웃음을 지었던 것을 후회한다.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 살아지는 삶 속에서, 아직도 정의 내릴 수 없는 '행복'을 되뇌는 것은 어쩌면 부모님의 가르침 덕이다. 물론, 반복하여 뜻도 모를 단어를 부른다고 하여 삶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이 것은 사실이다. 오만가지의 세상이 있다면, 적어도 내 세상은 그래 왔다. 


누군가는 몸을 뉘일 집이 있다는 것에, 평범한 가정이 있다는 것에, 어떤 이는 홀로인 삶이 더 자유롭고 좋다며, 그런 내 삶에 행복이라던가, 만족이라던가 따위의 단어를 붙이고는 한다. 그럴 때마다 의미 없는 웃음과 함께 "그럼 내 지금의 이 것과 너의 그것을 바꿀래?"라고 답하면 대부분은 손사래를 친다. 그들도 어렴풋이 아는 걸 테다. 그래, 농담이라면 그만 했으면 한다. 난 진심인데.  






아무리 행복 같은 것을 이야기해봐야 소용은 없으니, 기분 전환을 하고플 때는 위의 노래처럼 우리나라 언어로 이루어지지 않은, 밝은 곡조에 가라앉는 의미를 담은 노래를 듣고는 한다. 나도 이렇게 살아지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하지 않나. 최대한 멀리서 지켜보기 위해 밝은 음악을 듣고, 뜯어 듣다 보면 이렇게 비극을 써 내려가게 된다. 희망을 바라며, 후회를 이야기하는. 하루하루 반복되어 이루어지는 기도와 닮았다.  아, 이 노래의 말미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사랑받고 싶어 사랑받아 보고 싶어
사랑받으면서 사랑해 보고 싶어
사랑받아보고 싶다는
욕망은 언제나


맞아 나도 그래. 마음이 점점 가라앉고 흘러버리는 것은, 그러니까 이렇게나 살아가고 싶다 바라는데, 그저 살아지기 때문이다. 노래 가사와 같은 사랑 같은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고하자면, 나는 지금의 일터에서부터 방구석까지 마음 편한 곳 없이 살아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직이라던가, 독립이라던가 하는 소리를 주변에 가시 돋은 채 뱉지만 사실은 그런 이유와는 다르다. 그저 답을 모르겠으니까, 지금 있는 공간을 바꾸면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게 될까라는 막연한 반항심 때문일 따름이다. 생각보다 거창한 이유가 아니다. 






사실은 모두를 좋아하고 싶고, 모두에게 좋은 마음을 받고 싶다. 사랑 같은 벅찬 감정은 이제 모르겠지만 적어도 모두와 평안하게 함께 살아가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지독하게 잠 못 드는 새벽을 넘어 아침해가 뜰 즈음에는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물론 나는 살아지는 사람일 따름이라, 이 맺음말을 마치면 또 밤잠 못 이룰 이야기와 함께 후회의 기도를 뱉을 것임을 안다. 하지만 적어도 내 본심(本音)은 모두를 사랑한다. 가면이 불친절하니 사랑을 받지 못하지만. 그렇게 미움받고, 또 후회하고, 또 아침을 맞이하고, 살아진다. 내가 잘못된 탓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 마저 나를 나무라면 안 된다.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흘려보내야만 한다. 그렇기에, 그렇게 살아진다. 사라지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에어컨의 추운 기운과는 다른 한기가 느껴져 순간 오싹해졌다. 잠깐 살아간다는 착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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