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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군 Apr 22. 2019

유언

잊혀진 슬픈 가능성을 상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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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누군가에게 끝내 읽히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그래도 이렇게나마 절 발견해 주고 외로이 버려두지 않아 정말 고맙습니다. 함께 살아 이 지긋지긋한 전쟁의 비극을 끝장내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가는 여정에 힘을 보탰더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끝끝내 그러지 못하고 이런 싸늘한 모습으로 과거에 멈춰 당신을 가슴 아프게 해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한 때 전 늘 방황하고 확신이 없던 무기력한 청년이었습니다. 남들 다 하는 대로 학창 시절 보내고, 공부하고, 어느덧 대학생이 되어 이젠 앞으로 뭐 하며 먹고살아야 하나 하며 막막하기 그지없던 고민을 시작해 볼 찰나 영장이 오더군요. 차라리 다행이려나 하고, 다소 씁쓸한 마음으로 현실에서 도망치듯 입대했었습니다. 그저 적응하고 살아가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으로 타성에 젖어, 또 한편으로는 하나하나가 통제받는 군대 생활에 답답함을 느끼고 언제 전역하나 하며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그렇게 살아 있지만, 진정 살아 있진 않은 듯한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남아 있을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전 오히려 그저 각박하고 답답하다고만 생각했던 군생활에서 나름 많은 것을 배우고 꿈을 찾아갔습니다. 바깥에 있었더라면 학교 다니느라, 알바하느라, 친구들이랑 노느라, 핸드폰 보느라 한 달에 한 권 읽을까 말까 했을 책도 수십 권씩 읽으면서 좁았던 식견을 넓혔습니다. 실내에만 틀어박혀 있느라 생전 하지 않았던 운동이나 작업을 여러분들과 땀 흘려 함께 하면서, 하루의 보람과 뿌듯함도 진심으로 여러 번 깊이 느꼈습니다. 제각기 다른 곳에서 이곳에 와 각자의 고충을 안고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을 보며, 언젠가는 이들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 마음을 치유해 줄 수 있는 작가 겸 심리치료사가 되겠다는 꿈도 함께 키워갔습니다.


그렇게 전역을 70여 일 남겨두고, 예기치 않은 오늘을 맞았습니다.


기껏 이제서나마 꿈을 찾아나가던 한 삶이 이토록 허무하게 멈춰 섰는가, 그리 생각하면서 슬퍼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슬퍼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언제나 방황하던 제가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품었던, 누군가에게 진정 도움이 되고 싶다는 그 꿈을 빨리 이뤄낸 것에 불과하니깐. 살아 있지만 진정 살아가지 못했던 제 삶은, 비로소 꿈을 이룬 뿌듯함으로 모두네의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깐.


함께 있어 주지 못해 거듭 미안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을 지킬 수 있어 마지막까지 행복했습니다.


부디 모두 제 몫까지 행복하게 살아가 주길. 꼭 살아남아 주길.


친애하는 전우들에게,

17-73XXXXXX, 조XX.






이번 주 부대에서 실시하는 집중정신교육 시간에 있었던 "전우에게 쓰는 편지" 활동 중 적어 본 가상 유언장을 옮겨 적어 보았다. 


훗날 이런 식의 유언이 누군가에게 읽힐 확률은 굉장히 희박할 것이다. 69년 전과 같은 전면전이 어지간해선 펼쳐지지도 않을 것이며,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핵전쟁이 되어 이런 하나 건지지 못하게 나의 모든 흔적이미 사라져 있을 테니깐.


하지만 여전히, 일말의 가능성조차 사라진 건 아니다. 


그래서 슬프다. 이젠 잊혀졌으나, 또한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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