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남편과 나누는 대화의 질이 크게 낮아졌다. 대화 자체가 줄어든 데다가 그 내용도 아이들 이야기 아니면 해야만 하는 과업에 대한 이야기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우리가 주인공이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 외의 주제로 대화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쉽지 않았다. 서로 의지를 가지고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것을 혼자 노력한다고 될 리가 없었다.
아마 남편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을 거다. 모르긴 몰라도 그 순간 내가 남편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었을 거다. 누구를 탓하기엔 아이들이 너무 어리고 그날그날 해치워야 할 일들이 우리 눈앞에 높게 쌓여 있었다.
어제였다. 연휴라 다음 날 출근 부담이 없어서인지 남편은 자신이 아이들을 재우겠다고 했다. 아이들과 방으로 들어가며 남편은 나에게 '혼자 바람이라도 쐬러 나갔다 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거실 곳곳에 흩어진 아이들 장난감, 건조기 속에 들어있는 빨래, 싱크대에 쌓여있는 설거지 산. 지금 해치우지 않으면 고스란히 내일의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보통의 나라면 '이게 웬 떡이냐'하고 외출했을 것이다. 집안일이야 늘 있는 거고 소중한 혼자만의 시간을 집안일에 쓴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게 나다웠다. 하지만 어제는 어쩐 일인지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혼자만의 시간'보다 더 의미 있는 이벤트가 일어날 것을 감지했던 걸까.
아이를 재우고 나온 남편과 맥주를 마셨다. 처음에는 마주 보고 앉아있을 뿐 각자 자기 할 일을 했다. 그러다 얼마 전 남편이 회사에서 업무가 바뀔 거라고 한 이야기가 떠올라 가볍게 그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은 담담히 그 일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귀 기울여 들었다. 그러다가 친구들 이야기로 넘어갔고, 놀랍게도 나와 남편의 깊은 마음속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정말 우연히, 자연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남편과의 대화가 편안하고 재미있었다. 우리는 자주 웃음을 터뜨렸고 상대방의 말에 대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평소의 우리는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말에 다음의 세 가지 종류의 반응만을 보였다는 것을. 방어적으로 대꾸하거나, 공격적으로 대꾸하거나, 아예 무반응이거나.
나는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하나씩 꺼냈다.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말들이 남편에게 전달되었다. 정말 별 거 아니었는데 그 말들을 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렇지만 시간의 문제는 아니었다. 진짜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묵히는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라 대화를 하려는 '마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화를 하는 중간중간 나의 깊은 속마음이 계속해서 튀어나와 '이건 마치 창고 대방출 같다'며 웃었다. 상대방에게 가 닿지 못한 말들을 한구석에 처박아두면서 내 마음은 그야말로 안 쓰는 물건들이 모인 창고 같았다. 그런데 어젯밤의 대방출을 통해 케케묵은 것들이 빠져나고 비로소 신선한 공기가 통하는 기분이었다. 한 마디로 속이 시원했다.
어젯밤은 타이밍이 좋았다. 보통 아이들 재우는 것은 내 담당이고, 재우면서 나도 같이 잠들어버리기 일쑤인데 그 날은 특별히 남편이 아이들을 재웠다. 나 역시 바깥에 나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나와 남편 모두 대화하려는 마음이 있었고 서로에게 집중했다. 어제는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특별한 날이었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은 아니었다. 몇 월 몇 일로 정해진 날도 아니었다. 그것은 '남편과 대화가 통한 날'이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평소처럼 거의 대화하지 않고, 해야 하는 일과 아이들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고 있다. 그렇지만 집 안의 공기는 한층 부드러워진 것을 느낀다.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연결이 더 강해진 듯하다. 어젯밤 같은 대화의 시간을 자주 가진다면 우리 두 사람은 얼마나 큰 시너지를 발휘할까? 그러면 우리 두 사람의 인생은 얼마나 멋진 곳으로 나아가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