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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글로 Oct 13. 2024

[연재소설] 저 너머의 하늘 #42.

서로 분리돼 있었던 공간에 균열이 생기고 연결되기 전.

시간을 돌려, 조금 전 휘영 측 상황.


현우가 먼저 자리를 떠난 후, 휘영과 지홍은 한동안 같은 곳에 머물고 있었다. 딱히 현우가 시켰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둠 속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던 휘영은 문득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지홍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여긴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이제 여유 좀 생긴 것 같은데 한 번 풀어놔보시죠."

"아… 그게 말이죠."


어디서부터였더라… 지홍은 기억을 되짚어본다. 

백현으로부터 특별 케이스 관련 조사를 그만두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 그 시작점이다. 즉, 근원계에서 휘영을 강제 송환 대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시점이다. 물론 좀 더 정확히는… 송환조차 제쳐두고 아예 제거하려는 입장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하지만 이건 당연히 보안상 이야기해서도 안 되고… 설령 말할 수 있는 내용이라 해도 꺼내서는 안 되는 내용이지.'


상식적으로 '널 없애려고 한다'라는 말을 듣고 정신이 멀쩡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문제는… 그뿐만 아니라, 백현이 잠시나마 이곳에 와 있는 동안 나눴던 이야기들 중 무엇 하나 털어놓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 

아니, 더 정확히는 백현이라는 존재가 경계를 넘어와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빼야 한다는 쪽이 맞다. 


그렇다면 생각해 본다. 백현과 관련된 부분을 통째로 들어낸 채 얼개를 그려봤을 때, 가장 어색하지 않을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그 이야기는 어떤 도입부로 시작해야 하지? 길게 이어질 수 있는 고민이었다. 하지만 지홍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그리 어렵지 않게 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왜, 일전에 제게 먼저 전화 주셨던 적이 있잖습니까. 뭐랄까, 그때 목소리가 참 심상치 않게 들려서 말이죠. 이것저것 조사하느라 몹시 바빠서 별생각 없이 넘겼는데, 바쁜 일들이 얼추 정리가 된 뒤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마음에 걸리지 뭡니까."

"제 목소리가 뭐 어땠는데요?"

"글쎄요. 이걸 뭐라 표현해야 할까요. 잔뜩 긴장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뭔가 일이 있긴 있는데 애써 숨기려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콕 집어서 말하기는 어려운데… 아무튼 계속 신경이 쓰여서 견딜 수가 있어야 말이죠."


휘영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대체 언제를 말하는 거지… 그리 오래 전이 아니다. 다만, 최근 겪었던 일들이 워낙 스케일이 큰 탓에, 불과 며칠 전 일도 엄청나게 오래 지난 일처럼 느껴진다.


"흐음… 아~ 생각났다. 전화했더니 그 낮술하고 있었던 날 말이죠?"

"네, 그날이요. 뭔가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못 하신 게 아닌가 싶었거든요."

"그러니까… 결국은 딱히 명확한 이유 없이 그냥 촉이라는 거네요?"

"어… 그렇게 되나요…?"

"나 참… 언제는 저더러 촉으로 수사하냐고 면박 주시더니?"

"……요즘 부쩍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한다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은 경위님 덕분에요."

"깨닫고 있으시다니 저도 보람을 느끼네요. 아무튼, 그다음은요?"

"통화가 안 되기에 집에 먼저 찾아갔다가, 안 계셔서 경찰서 찾아갔다가… 음… 흐음… 어찌어찌하다 보니 여기까지 찾아오게 됐습니다."


실제로는 집에 먼저 찾아갔다가 인기척이 없어 통화를 시도했었지만, 지홍은 순서를 바꿔서 말했다. 무작정 찾아갔다…라고 했을 때 눈앞의 이 예리한 여자가 뭐라고 공격(?)해올지 뻔했으니까. 실제로 집을 나섰을 때는 그렇게 할 계획이었다. 백현과 만나는 바람에 순서가 꼬여서 그렇게 됐을 뿐. 


어쨌든 전화를 걸었던 것도 사실이니 별 상관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백현과 함께 행동했던 대목을 빼고 이야기하자니 말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점. 결국 중간을 '어찌어찌'라는 몹시 수상한 말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보통 사람이 듣기에도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하필이면 상대는 형사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지금 그거 '나 굉장히 수상하니까 의심해 주세요'라는 말로 들리는 건 알고 계시겠죠? 요약이 너무 과하신데? 제 성격에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하신 건 아닐 테고."

"하하하하하, 과정이 뭐 중요하겠습니까? 적.절.한. 타이밍에 제가 여기 나타났다는 게 중요한 거죠. 안 그래요? 그리고 잊으신 거 같은데, 은 경위님이 어디에 계시든 저는 찾을 능력이 있거든요. 힘이 꽤 들어가야 하는 능력이라 평소에는 잘 안 써서 그렇지."

"흐음…… 지홍씨, 요즘 성격 꽤 변한 거 알고 있어요?"

"제가 말입니까? 어느 부분이요?"

"처음에는 완벽주의 나르시시즘을 바닥에 깔아 두고, 그 위에 차가움과 까칠함까지 탑재한 재수 없는 캐릭터였는데… 지금 보니 완전 허당에 친근함마저 느껴질 정도거든요. 알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너무 극단적으로 변한 게 아닌가 싶네요. 아! 대놓고 얼버무리시는 걸 보니 뻔뻔한 것만큼은 초심을 잃어버리지 않으신 듯? 그 부분은 인정."


대놓고 놀리는 말투에도 지홍은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듣는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허술한 설명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허당에 친근함이라니… 그 정도인가? 하긴… 처음 만났던 시점부터 생각해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휘영을 매우 편하게 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마치 백현을 사적으로 대할 때의 모습처럼.


"그래요. 뭐, 신기한 능력 보여주신 거야 한두 번도 아니고… 어쨌든 필요한 시기에 나타나셨고 도움을 받은 것도 맞으니… 그 정도로 넘어가기로 하죠."

"…하하하…"

"그럼 다음 질문. 좀 전에 그 셀프 자랑질에 도가 튼 분이랑은 어떻게 같이 오신 거죠? 원래 서로 아는 사이였나요?"

"아뇨, 요 앞에서 만난 건데요. 절대로! 완전히! 초면입니다."

"……"


스스로 강조까지 해 가며 딱 잘라 말하는 지홍. 그 오버스러운 대답에 휘영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딱히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홍은 그 표정으로부터 ‘이건 또 무슨 참신한 개소리인가?’라는 의미를 읽어낼 수 있었다. 

애써 모른 척하며 고개를 돌리려 하니,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시선이 계속 따라온다. 다만, 눈빛에 담긴 메시지가 바뀌었다. '어서 그 설명충 본능을 발휘하지 못할까?'라고. 그래 뭐,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다고 생각은 했었다. 지홍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추적 능력을 써서 야산 입구 즈음까지 찾아왔는데, 그 사람이 어디선가 갑자기 툭 튀어나오더군요. 그런 식으로 이동하는 능력이야 근원계에서는 흔한 거지만… 아시다시피 여기가 상당히 외진 곳이지 않습니까? 뜬금없이 그 타이밍에 거기서 튀어나왔다는 데서 경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좀 투닥거리긴 했는데… 더 이야기하다 보니 여러 모로 말이 꽤 통하는 양반이더라고요. 솔직히 오랜만에 능력 쓰느라 좀 지치기도 했고, 기껏 따라왔더니 은 경위님 흔적이 갑자기 흐릿해져서 찾으려면 고생 깨나하겠다 싶어 난감한 상황이었는데… 가만 보니 꽤 도움이 될 듯해서 같이 다닌 겁니다. 굳이 말하자면 한시적 협력 관계 정도랄까요."

"으흠… 그러셨구나… 근원계라는 곳에서는 말이 꽤 통하면 모르는 사람이어도 막 따라가고 같이 다니고 그래도 된다고 가르치나 보죠?"

"제… 제가 뭐 어린앱니까? 그 정도 판단은 할 수 있거든요?"


쉽게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수세에 몰리던 지홍은 문득 반격 포인트를 찾아냈다.


"아니 잠깐, 그러고 보니 이상한데요."

"어허, 어디서 얼렁뚱땅 넘어가시려고."

"아니, 잠시만요. 은 경위님이야말로 그 작자랑 이미 알고 있었던 눈치던데, 아닙니까?"

"네? 어, 아…" 

"대체 언제부터입니까? 저한테는 말한 적도 없으시고?"

"아… 그, 그, 그게 말이죠."

"아니, 됐습니다. 어차피 들어봐야 변명일 텐데요. 생각해 보니 뻔하긴 하군요. 보아하니 저번에 병원 입원하신 동안, 아니면 최근 서류 뒤적이느라 바빠서 연락 못했던 며칠 사이 둘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지홍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굴려봤다. 그동안 겪어왔던 일들이 워낙 복잡다난했던 탓에, 이 정도 상황을 짚어내는 건 사칙연산 수준처럼 쉬운 느낌이었다.


"대화 나누는 말투만 봐도 상당히 친해 보이는 게 한두 번 만난 느낌이 아니던데… 은 경위님 팀이 다 함께 여기까지 오신 것, 그리고 그 인간이 찾아온 것까지 한데 놓고 생각해 보면… 그 '제보'라는 걸 그쪽에서 제공해 줬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군요."


휘영은 할 말을 잃었다. 머리가 꽤 잘 돌아간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이쯤 되면 CCTV를 달아놓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좀 더 하면 돗자리 펴도 되겠네' 싶은 기분이랄까. 하긴, 변수가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은 추측이었을지도.


"분명히 제가 낯선 사람 찾아온 적 없냐고 물어봤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땐 시치미 뚝 떼더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어? 저거…"

"아, 말 돌리지 마십쇼. 솔직히 배신감 쩔거든요? 뒤통수도 엄청 아프고."

"아니, 일단 좀 보라니까요."


주도권을 빼앗은 지홍이 기세를 몰아 한바탕 잔소리 열변을 토하려던 찰나, 휘영의 눈에 이상이 포착됐다. 급한 대로 양손으로 지홍의 얼굴을 잡아 시선을 홱 돌린다.

한없이 컴컴하던 공간이 어느새 조금 밝아졌다 싶더니, 두 사람이 바라보는 곳에서 새어 나온 자그마한 빛이 주위에 깔린 진득한 어둠을 조금씩 지워가고 있었다. 정황상 신현우가 말했던 '틈'이 분명해 보였다.


"저건…"

"뭘 감탄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어요. 나가요, 어서."


얼떨떨한 채 굳어있는 지홍을 지나쳐, 휘영은 빛이 새어드는 틈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뒤따르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곧장 따라올 줄 알았는데… 뒤를 돌아보니 갑작스레 솟아난 검은 덩굴 같은 것이 지홍의 발목을 휘감고 있다.


"지홍씨!!!"

"괜찮습니다. 별 거 아니에요. 금방 따라갈 테니 먼저 가세요. 어느 위치로 떨어질지 모르니 조심하시구요."


빛이 온몸을 감싸는 기분. 어두운 곳으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느낌이 곧 반전된다. 욕조 배수구로 소용돌이치며 물이 빠지듯, 어둠이 한 지점으로 몰려든다.  빠져나온 너머로 보이는 지홍의 모습이 점점 작아진다.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비치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이런 곳에서… 그런 표정 짓는다고 안심이 될 리가 없잖아요…"


지홍에 대한 걱정도 걱정이지만, 이곳에 온 이후로 이런저런 상황을 겪으면서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이 상태로 돌발상황을 혼자 헤쳐갈 수 있을까?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휘영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떠올리며 마음을 다스렸다.


어둠이 모두 빠져나간 뒤 고개를 돌리자, 반대편에 다른 통로가 보였다. 영태, 진우. 익숙한 모습들이 보인다. 그리고… 머리부터 발 끝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치장한 사내. 휘영은 이를 악물고 통로 너머로 다시 몸을 날렸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막막하기만 하던 공간을 빠져나온 후. 검은 옷의 사내가 보였을 때 긴장감이 온몸을 치고 올라오긴 했지만, 현실로 돌아온 이상 뭐라도 해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휘영은 지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을 목도한 채 사고회로가 정지해 있었다. 


영태.

통로를 빠져나오며 갑자기 하얗게 밝아졌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영태는 휘영의 앞을 가로막으며 달려들고 있었다. '안 돼-!'라는 외마디 외침이 먼저 귓가에 닿았고, 그다음 공포에 물든, 그러면서도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얽힌 눈빛…이 보였다. 고통, 걱정, 안심, 슬픔, 좌절……


품으로 달려들듯 몸을 던진 영태를 얼싸안듯 부축해 봤지만, 정신을 잃은 듯 힘없이 축 늘어진다. 급한 대로 근처에 있는 나무처럼 여겨지는 무언가에 기대어 앉도록 했다. 등에 닿았던 손에서 섬찟한 축축함이 느껴진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손바닥을 적시고 있다. 이 정도의 출혈이라니… 뭐지? 대체 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상처를 만든 무언가가 '날아왔을 거라' 추정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다. 


진우.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체형과 옷차림 등으로 보아 진우임을 확신한다. 무릎을 꿇고 앉은 그는 움직임이… 없다. 한쪽 손은 다른 한쪽 어깨를 움켜쥐었고, 그 어깨 아래…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건 또 뭐지? 대체 무슨 상황이야…?


"…휘…영아… 괜…찮냐…? 안… 다쳤어?"


혼란스러운 와중에 힘겹게 밀어내는 목소리가 들린다. 정신이 돌아왔는지, 영태가 간신히 눈을 뜨고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고 있었다.


"짜식… 괜찮아…보이네. 저 새끼… 대체 뭐냐… 무슨 말도 안 되는… 아… 진우… 진우는 어떻게… 하… 내 새끼들… 챙겨야 되는데… 도무지 힘이 없네. 너무… 졸려."

"팀장님…?"

"미…안하다. 미안해… 지금… 너무 졸려서… 조금만… 진짜 조금만 잘게."


영태가 다시 눈을 감는다. 고개를 떨구긴 했지만 다행히 나무에 기댄 자세에서 쓰러지지는 않았다. 휘영은 뭘 해야 할지도 모른 채,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을 따름이었다. 


생각. 멈췄던 생각을 간신히 돌려본다. 뭘까, 이 거지 같은 상황은. 혹시 그 어두컴컴한 공간을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던 걸까? 아직 그 공간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걸까? 사방이 깜깜한 공간에서 꼼짝도 못한 채 동료들이 해코지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조금 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다소 어두운 편이긴 하지만 주위 풍경이 어느 정도 보인다. 무엇보다 이 생생한 감각… 근거는 없지만 이곳이 현실세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느리게 돌던 머리가 점점 정상 속도로 사고를 시작한다. 동시에 핑그르르- 하는 찌릿한 통증이 머리 한편을 날카롭게 때린다. 병원에서 하얀 천 아래 얼굴을 확인하던 순간 찾아왔던 바로 그 느낌이다.


그와 함께…… 주위를 떠다니는 핏빛 아지랑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싹한 느낌이 전신을 훑고 지나간다. 곧이어 잔뜩 겁에 질린 온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듯 욱신거린다.

가늘게 이어진 핏빛 줄기들이 어느 한 방향을 향해 점차 짙어지고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돌리자, 온통 검은색으로 덮인 놈이 보인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아… 아아… 으아아…" 


떨린다. 턱이 덜덜 떨리며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으아아… 아아아아아악!!"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흘러나오는 비명은 점점 커진다. 있는 힘껏 소리를 내질러봤지만, 자신이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비이이- 하는 둔탁한 이명이 귀로 전해지는 모든 소리를 차단한 탓이다. 초점이 흐려진다.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단 하나, 검은 옷의 사내만이 휘영의 시야를 채운다. 패닉에 잠식돼 가는 휘영의 모습을 지켜보던 사내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휘유~ 적절한 타이밍에 주연이 등장하셨군. 시나리오가 좀 꼬이긴 했지만… 이 정도면 그럭저럭 봐줄 만한 수준이니 넘어가도록 하지.]

"아… 아아…"


비명이 잦아들자 휘영은 상대를 더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저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초점 없는 신음을 흘린다. 어느새 다가온 사내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려 넋이 나간 표정을 바라보았다.


[일전의 방해꾼은 처리해 뒀고… 정신도 완전히 나간 듯하니 준비도 끝났어. 이번에야말로 집어삼킬 수 있을 것 같군. 하… 정말 오래 걸렸어. 왜 자꾸 일이 꼬이던지… 짜증이 날 정도였거든.]

"일이 자꾸 꼬인다는 건 하지 말라는 하늘의 뜻 아니겠냐? 이 잡종 새끼야."


승리감에 취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순간, 뜻밖의 목소리가 사내의 시간에 끼어들었다. 그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끈질기게 발목을 잡는 덩굴을 마지막으로 끊어내며 공간의 틈을 빠져나오는 지홍의 모습이 보였다.


[하… 불청객이 있었나. 어쩐지 뭔가 찜찜하더라니.]

"…너, 말로 할 때 그 손 놔라. 네놈이 남겨둔 지저분한 것들과 싸우느라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거든."


공간을 빠져나온 지홍은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심각하게 다친 듯 보이는 두 사람. 그리고 공포로 넋이 나가버린 휘영. 상황을 파악한 그에게서 스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사내는 순순히 손을 놓고 한 발자국 물러섰다. 언뜻 보면 기세에 밀린 듯하지만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이다.


[뭐야. 해보겠다는 건가? 그런 단순한 트랩도 금방 해결하지 못해 이제야 빠져나온 주제에?]

"고작 그런 이유로 길고 짧음을 판단하는 걸 보니… 너, 명줄이 그리 길진 않겠구나."

[글쎄. 아무리 봐도 네까짓 게 날 어쩔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내가 지홍의 앞으로 이동한다. 영태와 진우를 타격할 때와 같은 패턴. 하지만 지홍은 당황하기는커녕 눈을 부릅뜨며 사내의 면상에 더욱 가까이 들이댄다.


"근본도 없는 잡종 새끼가 뭘 믿고 까부나 했더니… 고작 이런 걸로 기선제압이 될 거라 생각한 거냐?"

[이 새끼…!! 그따위로 날 부르지 마!!!]


시종일관 여유롭던 사내가 갑작스레 고함을 지른다. 동시에 내뻗은 손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때린다. 조금 전까지 그 자리에 있던 지홍이 어느새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이제 사내의 표정에서 여유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자리는 분노가 채워가고 있다.


"네가 굉장히 빠르다고 생각했겠지? 뭐, 그럴 수 있어. 원래 우물 안에 앉아있으면 딱 그만큼만 보이는 거니까."

[이 새끼… 전투에 특화된 놈이었나?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맘대로 생각하시고… 이제 네놈을 어떻게 할까 고민인데… 그냥 다져줄까? 아니면 곱게 갈거나 썰어야 하나? 있잖아, 내가 요즘 이것저것 스트레스 쌓일 일이 자꾸 생겨서 미칠 지경이었거든?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모든 원인이 너인 것 같단 말이지. 고로 엄한 데 화풀이하는 것도 아니니까 억울할 것도 없겠다, 그치?"

[크윽…!]


지홍과 손을 섞어본 사내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 일대는 내가 장악하고 있으니 완전히 당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이 정도로 스케일이 커졌다면 놈들에게 노출됐을 터. 그렇다면… 이제 시간은 내 편이 아니라는 건데…'


빠르게 생각을 굴렸다. 일단 이 자리를 피할 수 있다면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고생해서 짜놓은 판에서 아무런 소득 없이 빠질 수는 없다.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도 모르고… 거기까지 계산한 사내는 망설임 없이 휘영 쪽으로 몸을 날렸다.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다.


"뭐하냐?"

[......]


어느새 휘영의 앞을 가로막고 선 지홍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본다.


"왜, 저 분만 확보해서 튀면 일단 지는 건 아니니까-라고 생각했냐? 이 자식이 날 완전히 빙다리 핫바지로 보네?"

[......]

"하여간에 본능에만 충실하면 이렇게 사고회로가 정직하다니까. 야, 어깨 위에 달린 그거, 안 쓸 거면 나 줘라. 갖다 팔게. 아, 안 팔리려나?"

[크… 약삭빠른…]

"뭐래는 거야. 너보다 앞서나가면 약삭빠른 거냐? 이거 자의식 과잉도 심각한 수준인데. 안 그래? 잡종."

[크아아아악!!!]


별생각 없이 내뱉은 ‘잡종’이라는 단어로 도발이 아주 잘 먹히는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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