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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Jun 17. 2022

내가 살던 고향, 언제까지 남아 있을까?

지방 소멸

‘말(馬)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라는 속담은 망아지는 말의 고장인 제주도에서 길러야 하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 공부해야 성공할 수 있다 ‘는 뜻이다. 이 말이 언제부터 생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조선 시대 많은 유생들이 입신양명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한양으로 몰려들었던 기록들을 생각하면, 조상들은 ’ 교육이나 출세의 문이 곧 한양(서울)에 있다‘고 믿으며 이 속담을 유행시켰던 것은 아닐까 싶다. 꼭 교육이나 출세를 원하지 않더라도 서울에는 지방에서 볼 수 없는 문화와 정보의 공간들이 훨씬 많다. 한마디로, 서울은 더 많은 견문과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그런 서울살이의 좋은 점들과 기회에도 불구하고 예전에는 지방살이를 선택하는 젊은이들이 꽤 많았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우선 딸을 가진 부모들은 연고지가 없는 낯선 곳에 딸을 홀로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젊은이들 역시 지방의 국립대와 서울의 대학들을 비교하며 자발적으로 지방에 머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당시 지방의 젊은이들에게 서울살이는 선택이었다. 좀 더 많은 기회를 누리고 싶으면 서울로, 부모님들의 따뜻한 밥을 먹으며 좀 더 편히 지내고 싶으면 자발적으로 지방에서 직장을 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서울 수도권 살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 듯하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서울 수도권으로 몰려들고 많은 고등학생들은 모두 ‘In 서울 대학'을 희망한다. 지방의 대학들이 온갖 혜택을 앞세우며 학과 정원수를 채우려 하지만 쉽지 않다. 이미 학생들은 마음속에 오직 수도권, 서울 입성만을 품고 있을 뿐이다. 불과 몇 년 만에 벌어진 놀라운 결과이다. 교육계에서도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바람이 불고 있다.


 내가 태어나고 학창 시절을 보낸 곳은 경남의 작은 도시 진주이다. 스스로는 나의 고향이 서부 경남의 중심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수도권에 사는 친구들은 이곳이 항상 어디에 붙어 있는 도시인지 몰라 몇 번이고 되묻곤 했다. 그들은 ‘조선 임진왜란 때 병장을 안고 숨진 논개’의 이야기를 덧붙인 설명을 듣고 나서야 겨우 ‘아, 그곳’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서울이나 다른 대도시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도시이긴 하지만, 나름 ‘교육 도시’, ‘양반 도시’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나였다. 그렇기에 서울과 몇몇 대도시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친구들의 반응이 은근히 상처가 되었다. 속으로 ‘대도시들만 알아주는 큰 도시 우선주의 마인드’라며 툴툴거리곤 했다. 그렇게 친구들 흉보던 내가, 몇십 년 뒤 고향인 진주보다는 이제는 수도권 생활이 더 익숙해졌다.


 며칠 전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부모님은 여전히 내가 어린 시절을 나고 자란 그 주택에서 살고 계신다. 고속버스로 3시간 반에서 4시간, 너무 멀어서 평소에는 자주 내려가지 못하다. 그래서 간간이 부모님과 통화만 하는데 그날따라 왠지 음성이 좀 안 좋아 보였다. 어머니는 연세가 70이 넘고 나니 이런저런 아픈 곳이 생기고 병원 갈 일이 많다 하셨다. 그러면서 “어휴, 자식들이 다 멀리 있으니”라고 덧붙이셨다. 올해 들어 부모님은 자식들이 멀리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아버지는 조금 강경한 어조로, 어머니는 좀 서글픈 어조로 말이다. ‘늙으면 수발드는 자식들이 필요한데, 울 아이들은 모두 멀리 있어 다 쓸모없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자식들을 효용가치로만 대우하는 것 같아 서운하다가도 부모님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주변에는 부모님들과 가까이 사는 친구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나이 드신 부모님과 있었던 불편한 일들을 종종 대화 주제로 삼곤 했다. 친구들은 가뜩이나 수험생 아이들이며 가족들의 일을 챙기느라 바쁜데 부모님이 하루에도 몇 번씩 사소한 잡일로 불러댄다며 푸념을 했다. 이제 자식들이 그럴 나이가 된 것이다. 중년은 시소 중심을 잡는 지지축처럼, 자식들과 부모님들 사이에서 오락가락 움직이며 정신이 없는 나이이다. 그 속에서 어느 곳에 더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시소는 현전하게 기울어진다. 때로는 자식들의 일에 더 무게를 두기도 하고, 때로는 부모님의 일에 더 치중을 하기도 한다. 나이를 슬금슬금 먹다 보니 자식들도 중심을 잡는 연령이 된 것이다.


 멀리서 종종 전화를 드리고 있지만, 해가 갈수록 지방에 계신 부모님이 걱정된다. 지금 잘 계시는 걸까? 새로운 지식들과 정보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현대 사회에서 정보를 처리하고 잘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은 필수적이다. 안타깝게도 나이와 정보처리 능력은 반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도 새로운 기술들이나 정보가 나왔을 때 중고등생인 아이들의 도움을 받거나 교육을 받는 일이 허다했다. 아직 중년이라 할 수 있는 나 역시도 그런데 나이 드신 부모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그렇다고 지금의 생활을 모두 접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기도 두렵다. 고향을 떠나온 지 벌써 몇 년인지 모르겠다. 예전에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까지는 아니어도, 젊은이들의 열기와 열정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양반 도시’라는 이름답게 어른들을 공경하고 하고자 하는 의욕이 넘치던 곳, 바로 내가 살던 고향이었다. 하지만, 명절 때마다 보는 그곳의 모습은 기억과 너무나 달랐다. 눈에 띄게 빈 상가들, 예전의 활기찬 분위기가 조금씩 사라지고 옛 명성만을 기리는 낡은 도시처럼 변해 버렸다. 그곳에서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난번 통화의 끝자리에서 어머니는 갑자기 사위의 정년이 얼마나 남았는지 물었다. 아이들이 대학 가고 회사 정년이 끝나면 굳이 연고지도 아닌 곳에서 살 필요가 있겠냐고 덧붙이셨다. 어머니의 말을 전해 들은 남편은 똑같이 말했다. “난 그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같은 고향 출신 남편의 마음에도 고향은 그립고 정겹지만, 이미 밥벌이를 찾기 어려운 곳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떠나온 지 겨우 몇십 년 만에 바뀌어 버린 고향의 변화는 놀랍다 못해 두렵기까지 하다. 이런 지방의 변화는 좀 더 나은 기회, 교육을 위해 떠나거나 떠나보낸 사람들의 잘못일까? 아니면 지방 인재들을 굳건히 붙들지 못한 지방정부의 어리석음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지역을 균등하게 발전시키지 못하는 중앙정부의 무능 때문일까? 해가 갈수록 쪼그라들고 쇠퇴해지는 나의 고향, 그 속에서 자꾸 부모님의 모습이 비친다. 내가 살던 고향, 영원토록 굳건히 남아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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