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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Sep 23. 2024

<세월> 아니 에르노 지음 (2023,1984 BOOK

세상의 걸음을 수평선으로, 개인의 역사를 수직선으로 교차시키는 책’

‘세상의 걸음을 수평선으로, 개인의 역사를 수직선으로 교차시키는 책’

<세월> 아니 에르노 지음 (2023, 1984 BOOKS)


 아니 에르노가 <세월>(2023, 1984 books)에서 언급한 도로시 태닝의 <생일>은 화가의 자화상이다. 이 그림에서 30세의 태닝은 가슴을 드러낸 채 셰익스피어 풍의 자주색 주름 장식 재킷과 잔가지들이 주렁주렁 달린 스커트를 걸치고 서 있다. 그녀의 발치에는 날개 달린 괴물이 웅크리고 뒤편에는 문들이 끝없이 열려 있다. 무심한 표정의 화가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실재와 허구를 여행하는 여행자처럼 보인다. 아니 에르노는 소설 <세월>을 쓸 때 이 그림의 ‘격자 구조’처럼, ‘기억이 없던 탄생 첫해의 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시간을 ‘지우고 다시 쓰는 감각’으로 쓰이기를 원했다. 자전적인 성격을 담고 있지만, 일반적인 회고록의 서술 방식과 다른 이 소설은 아니 에르노의 대표작이자 출간 직후 〈마그리트 뒤라스상〉을 비롯한 많은 상을 휩쓸었고,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아 2019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최종후보에 오른 작품이다. <세월>은 1941년에서부터 2006년까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된 작가의 삶을 담고 있다.


 아니 에르노는 1940년 프랑스 릴본에서 태어나 노르망디의 이브로에서 자랐다. 루앙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한 후 정식 교원, 현대문학 교수 자격증을 획득한 후 현재는 파리 교외의 세르지에서 프랑스 문학을 가르치 교수 그리고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작가는 자전적 요소와 사회학적 방법론이 결합한, 독특한 글쓰기 스타일로 유명하다. 특히 소설 <세월>은 프랑스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 속에 본인의 자취들을 끼워 넣었다. 작가가 유년 시절을 보낸 시기의 전쟁 이후의 풍경,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 성에 대한 호기심을 느끼던 청소년기, 컴퓨터와 핸드폰이 사용되는 현대를 맞아 혼란함을 느끼던 노년층까지 프랑스 사회가 거쳐온 순차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 작가의 삶들이 스냅사진처럼 박힌다.


 아니 에르노는 이 작품에서 그녀를 “관통한 그 시간, 그녀가 살아 있을 때만 기록할 수 있는 그 세상”(p.272)이 모두 기록되기를 원했다. 작가는 태어나면서부터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지금까지 “분리되고 조화가 깨진 그녀만의 수많은 장면을 서사의 흐름, 자신의 삶의 이야기로 한데 모으고 싶어” 했다. “개인의 것이지만 세대의 변화가 녹아 있는 삶”(p.238), 역사의 시간 흐름과 개인의 삶과 내면이 모두 살아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해 작가가 선택한 방법은 ‘거리 두기’ 방식이다. 에르노는 자서전에서 주로 사용하는 일인칭 시점이 아니라 ‘그녀’와 ‘우리’, 그리고 ‘사람들’로 서술하는 방식을 선택하며 독자들을 한 인물의 삶에 몰입시키기보다는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에 집중하게 했다. 이야기 속 ‘그녀’는 아니 에르노 자신이면서 동시에 사진 속의 인물이요, ‘우리’는 에르노와 함께 살아온 여성들의 모습이며 ‘사람들’은 언급된 시대 속에 함께 살고 있는 군중들이다. <세월>은 1941년부터 2006년까지의 프랑스 사회와 문화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기록물인 동시에, 작가 개인의 삶을 보여주는 복합적인 자서전처럼 읽히기도 한다.


 또한 아니 에르노는 ‘우리’와 ‘사람들’이 화자일 때는 순차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상황과 사건들을 설명하지만, ‘그녀’가 주인공일 때는 사진과 영상 속의 일화와 내용들을 끼워 넣으며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준다. 그런 묘사 방법이 반전되는 부분은 ‘그녀’가 <세월>을 쓰기 위해 고민하는 부분이다. ‘그녀’는 “어떻게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과 사물들, 생각들, 관습들의 변화와 이 여자의 내면의 변화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을까.”(p.239)라고 고민한다. ‘그녀’는 현재에 이르러 “글로서 미래의 자신의 부재를 형태로 만들어” 놓기를 원하고 “20년째 자신의 분신이자 동시에 (...) 아직 미완성인 수천 개의 메모 상태에 불과한 이 책을 시작해야만 한다.”(p.317) 말로 이 소설을 쓴 이유를 밝히고 있다.


 아니 에르노의 <세월>은 긴 세월을 살아온 작가의 에세이처럼 보이지만 소설이다. 에르노는 이 작품에서 “중요한 사건들과 잡다한 사건, 그녀를 오늘날까지 이끌어 온 수천 번의 나날들이 쌓인 이 기억들을”(p.210) 모두 정리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특정한 인물 중심의 사건과 서사나 자전적인 일화를 기대하는 독자들에게는 이 소설을 낯설게 바라볼 여지가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프랑스 사회와 문화를 이끈 세월, 그리고 군중들, 그리고 ‘그녀’이다. 1941년부터 2006년까지 프랑스 전반의 사회 분위기를 알고 싶은 사람들, 회고록과 거리 두기를 한 색다른 방식의 소설을 읽고 싶은 독자들에게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세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심히 흘러간다. 그 세월 속에 어떤 쉼표를 찍으며 살아갈지는 개인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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