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라이프
붉은 신호등이 초록에서 다시 빨간색으로 바뀌는 동안 꼼짝하지 않는 자동차 뒤에서 정체된 차들의 클랙슨이 요란하게 울려댄다.
“눈이 안 보여요. 눈 안에서 하얀 게 흘러내려요.”
운전석에 앉은 동양인은 몰려든 사람들을 향해 앞이 보이지 않는다며 고통을 호소한다. 한 남자가 하얀 늪에 빠진 그에게 다가와 집으로 데려다주겠다며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하지만 구세주를 자청하던 사내는 우윳빛 바닷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장님의 자동차를 훔쳐 달아나 버린다.
딩혹감으로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일본인 아내는 외출에서 돌아온 뒤 남편을 데리고 병원으로 향한다. 안과의사는 수정체나 망막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내린다.
“전등이 하얗게 켜져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안과 의사는 삽시간에 하얀 어둠에 빠져 버린 남자의 형용모순을 해결해 줄 방법을 찾지 못한다. 그는 속수무책인 환자를 돌려보낸 채 진료를 계속한다. 결막염에 걸려 선글라스를 낀 여인, 한쪽 안대를 한 노인, 근시의 아이를 차례로 진료하던 의사는 퇴근한 뒤 아내와 저녁을 먹는다.
“인지불능처럼 신경성일 거야. 항상 보던 걸 못 알아보는 증상.”
의사는 백색의 어둠에 갇힌 환자의 얘기를 꺼낸다.
"불가지론 같은 거?"
아내는 불가지론의 어원적 갈래를 들먹이며 '무지'나 '확신결여'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하지만 어떤 학설과도 무관한 짐작일 뿐이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에야 안과 의사는 비로소 자신이 전날 진료했던 환자의 상태를 인지하기 시작한다. 그도 백색의 바다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의 심각성을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에 알린다. 앰뷸런스가 그를 데리러 오고 아내는 자신도 눈이 멀었다며 남편을 따라 이송차에 오른다.
이후 도시 곳곳에서는 백색 질병에 감염된 환자들이 속출한다. 정부는 연쇄 감염을 막기 위해 환자들을 격리 수용하는 방침을 세운다.
처음 눈이 먼 일본인, 차를 훔쳐 달아난 도둑, 호텔 콜걸로 이제 막 분주하게 거사를 치른 선글라스를 낀 여자, 근시의 아이가 벽을 더듬거리며 수용소에 도착한다. 처음 눈이 먼 일본인과 그의 차를 훔쳐 달아났던 도둑이 뒤엉켜 싸우자 안과의사는 그들을 말리려 하지만 허공에 팔을 휘젓는 것 말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인다. 그나마 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것은 눈이 멀지 않은 의사 부인뿐이다.
의사 부인은 소변이 마렵다는 아이와 일행을 줄지어 세우고 화장실로 향한다. 선글라스를 낀 여자는 뒤에서 몸을 더듬는 도둑의 정강이를 하이힐 뒤축으로 걷어찬다. 뾰족한 굽에 다리를 다쳐 피를 흘리던 도둑은 고통을 호소하지만 수용소에는 그를 치료할 수 있는 구급약 따위가 없다. 의사는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는 보초병들을 향해 항생제를 부탁한다. 하지만 안질에 감염될 것을 두려워한 감시자들 역시 겁에 질린 채 돌아가라며 위협을 가할 뿐이다.
뒤이어 도둑을 이송하던 경관, 처음 눈먼 자를 태운 택시기사, 선글라스를 낀 여자에게 처방을 해준 약국 직원, 호텔 객실청소부, 안과 접수대 직원, 처음 눈이 먼 자의 일본인 아내가 차례로 들어선다.
저는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2024년 12월 3일, 밤 10시가 넘은 시각 대한민국에는 계엄이 선포되었다. 몇 달 전부터 돌던 소문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인터넷망을 통해 개인방송을 하고 있던 유튜버들은 분개한 채 육두문자를 날리기 시작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불법적 위헌적 반국민적인 계엄선포, 국민 여러분 국회로 와 주십시오. 무너지는 민주주의를 여러분이 함께 나서 지켜 주십시오.”
거대 야당의 대표 역시 자신의 개인방송을 통해 시민들에게 국회로 모여줄 것을 간곡히 호소했다. 광분하던 유튜버들은 자신들의 방송을 접은 채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다시 계엄이라고?
1980년, 광주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던 나로서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내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40여년이 흘렀건만 광주의 기억은 다시 머릿속 혈관의 피를 달구고 있었다. 하지만 한밤중 발이 묶인 채 밤새 유튜브를 통해 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국회의장은 국회의원들에게 본회의장으로 모여달라는 공지를 내렸다. 계엄을 해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 국회 표결을 위해서였다. 계엄을 해제하려면 재적의원 과반 150명 이상의 국회의원이 참석해야만 했다. 야당의 국회의원들은 신속히 국회의 담장을 넘어 회의장으로 향해 갔다.
그 와중에도 용감한 시민들은 국회를 향해 몰려들었고, 의원실의 보좌관들과 뒤섞인 채 헬기에서 내려 국회로 진입하는 계엄군을 막아서고 있었다. 완전무장을 한 특전사 대원들은 자신들과 대치하고 있는 대상이 적군이 아닌 일반 시민들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한 듯 과격한 행동을 삼간 채 미온적 태도로 대응했다.
내게 시간은 슬로우 모션으로 흐르는 듯했고, 선뜻 표결에 들어가지 않는 국회의장의 태도에 피가 말랐다. 하지만 그러한 대처가 조금이라도 절차에 어긋나 내란 세력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으려 함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었다.
2024년 12월 4일 오전 1시, 마침내 국회는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190명 찬성으로 통과시켰고, 수세에 몰린 대통령은 뒤늦게 계엄령을 해제했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한 채 날밤을 까고 말았다.
“혹시 남는 침대 있어요? 저한텐 라디오 있어요. 새 소식이 궁금하면 전할게요.”
안대를 한 흑인 노인은 침상을 차지하지 못한 채 화장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그는 수백만이 실명된 채 백색 바다를 헤매고 있으며, 연일 안과학과 신경의학 전문가들이 세미나를 열었지만 백색의 어둠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며 암울한 소식을 전한다. 버스 충돌과 여객기 추락 등으로 사상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속출하고, 덕분에 도로는 뻥 뚫린 채 정체가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노인이 들고 있는 라디오에서는 루이즈 봉파Luiz Bonfá의 <삼볼레로Sambolero>가 흘러나온다. 그 순간 어둠에 갇혀 있던 병자들은 영혼을 위로하는 듯한 허밍에 귀를 기울이며 가슴을 연다. 그곳은 마치 눈먼 자들의 왕국처럼 순간의 평온이 찾아온다.
그러나 끊임없이 수용소로 몰려드는 신규환자들은 앞을 볼 수 없기에 공포에 질린 채 고통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친다. 수용소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구역을 이탈하려는 자는 물리적으로 가르치겠습니다.”
그들을 감시하고 있던 군인들 역시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성을 잃은 채 뜨거운 불길을 토해내듯 삼키고 있던 겁을 총구에 실어 발사한다.
안과 의사는 난장이 되어버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제3병동을 찾아간다. 병동마다 대표를 중심으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힘을 합쳐보려 하지만 그들은 조롱의 태도를 보일 뿐이다.
의사는 무력한 자신의 상태에 절망하지만 그곳에서 유일하게 정상인인 아내는 병자들을 위해 헌신하느라 남편에게 위로가 되어주지 못한다.
하이힐에 다리를 다친 도둑의 다리는 썩어들어가고 아무도 자신을 대변해 줄 수 없기에 그는 직접 감시자들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러 간다. 하지만 그를 향한 것은 구세주의 손길이 아니라 여전히 겁을 집어먹은 사병들의 탄환뿐이다.
계엄령이 해제되었지만 제2의 계엄으로 또다시 혼돈에 빠져들 것을 우려한 시민들은 연일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더 이상 국가는 국민을 지켜 주는 보호막이 될 수 없었다. 힘없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거리로 나가 탄핵을 외치는 것뿐이었다.
법의 심판자는 국가를 위험에 빠트린 죄를 물어 통수권자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하지만 내란의 우두머리는 국가 원수라는 최고의 막강한 지위를 이용해 국가의 경호처를 사사로이 앞세운 채 쉽게 꼬리를 내리지 않았다. 공수처의 1차 체포 작전은 대통령 경호처의 공무집행방해로 6시간 동안 대치 이후 후퇴했다.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고, 거리로 몰려나오는 시민들의 숫자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2,30대 여성들은 아이돌의 팬이었던 10대 시절 들었던 응원봉을 들고 나와 탄핵을 외쳤다. 그들은 엄숙한 비상시국을 축제로 만들었고, 그 에너지는 기성세대마저 뒤흔들어 놓았다. 갖가지 깃발이 퍼레이드를 펼치듯 펄럭이고 시위대는 그 아래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혼자였다. 게다가 주말 저녁 아르바이트를 가야 했던 나로서는 집회가 끝나면 거리행진에 합류하지 못한 채 꽉 메운 인파를 헤치고 그곳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그렇게 밤새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전철에서 휴대폰의 검색엔진을 통해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은박지를 몸에 두르고 오롯이 눈을 맞고 있던 ‘키세스 군단’의 전사들이었다.
전농민회총연맹과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 지방에서 트랙터를 몰고 오다 남태령역에서 경찰측과 대치를 이루던 상황, 젊은 여성들이 주축이 된 시민들이 SNS를 통해 그 사실을 알렸다. 집회를 하고 있던 시민들은 응원봉을 든 채 그곳으로 몰려갔고, 경찰은 인파가 늘어나자 하는 수 없이 차벽을 풀었다. 농민들은 트랙터를 몰고 무사히 서울로 입성할 수 있었다.
기세가 오른 시위대는 다시 내란의 우두머리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을 촉구하며 대통령실 관저 인근에서 밤새 시위를 이어갔다. 차가운 냉기가 아스팔트를 타고 올라왔을 법한데 그들은 은박지를 둘러쓴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꽃이 밤새 그들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고, 어둠을 뚫고 새날을 맞이한 그들은 키세스 초콜릿을 닮은 ‘키세스 군단’으로 탄생했다.
야간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 나는 전철에서 새로운 세대의 탄생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음 주말 집회에 나갔을 때는 확연히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연단에 오른 젊은 여성들이나 성소수자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늘어나 있었고, 그들은 한결같이 힘없는 자들의 연대를 외치고 있었다. 우리 때와는 달리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나 그들이 대항할 수 있는 입지가 달라져 있다고 여겨왔던 내게 그들 역시 여성으로 태어나 대한민국을 살아낸다는 고충의 항변은 가히 신선하기까지 했다.
“주목하라. 나는 3병동의 왕으로 여길 접수한다.”
불한당들은 수용에 들어올 때 숨겨온 권총으로 공포를 유발한다. 그들은 배식으로 나오는 식료품을 독식하고 금품을 바쳐야 먹을 것을 주겠다며 다른 병동을 겁박한다. 어둠에 갇힌 병자들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던 귀중품을 모아 상납한다.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던 자가 손끝의 감각으로 물품의 가치를 가늠하고 두목의 명령에 따라 알량한 식량을 보급한다.
하지만 며칠 내로 몸에 두르고 있던 금붙이가 바닥나자 악당들은 다시 금품 대신 여자를 요구한다.
“이건 최악이야. 더럽고 역겨워.”
처음 눈이 멀었던 남자가 자신의 아내를 보내지 않겠다며 완강히 거부한다. 당신은 이제부터 먹지 마! 아내는 이기적인 남편에 대해 단호히 맞선다. 먹기 위해, 살기 위해서는 누구도 도덕이나 윤리 따위를 입에 올릴 수가 없다.
어둠이 몰려오자 여자들은 줄을 선 채 제3병동으로 향한다.
“여자들이 떴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의 시간이 지나면서 몸이 좋지 않았던 여자 하나가 죽은 생선처럼 팔딱거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타를 당하다 목숨을 잃는다. 밤새 만신창이가 된 여자들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사지를 맞들고 병실로 운반해 고인의 침대에 누인다. 그녀들은 말없이 피로 얼룩진 시신의 몸을 닦는다.
모두가 눈이 멀어서 항거조차 할 수 없는 상황, 유일하게 눈을 뜨고 있던 의사의 아내는 금붙이를 수거할 때 누군가의 소지품에서 꺼내둔 미용가위를 들고 제3병동으로 향한다. 다른 병동의 여자들이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있는 현장에서 그녀는 악당들의 우두머리를 찾아내 목에 가위를 찔러넣는다. 어둠 속 광분한 자들의 고함이 들리고 총을 겨누는 사내를 향해 그녀는 악다구니를 질러 댄다.
“먹을 것을 안 줄 때마다 한놈씩 사라질 거야.”
무법지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직 상대를 쓰러뜨려야만 한다.
여자 하나가 조용히 병동을 나가 라이터로 제3병동에 불을 지른다. 의사의 아내는 같은 병동 사람들을 데리고 불길에 휩싸인 수용소를 빠져나온다. 감시하고 있던 군인들 역시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채 그들을 구속하고 있던 수용소의 문이 허망하게 열린다.
우린 자유에요.
체포영장이 재발부되고 경호처마저 두 손을 들어버린 상황에서 1차 때와는 달리 내란의 우두머리는 쉽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내란을 옹호하던 세력들은 더 극렬하게 시위를 이어갔다. 광분한 극우 세력은 체포영장을 발부한 법원으로 향했다. 누군가 신호를 하자 몰려간 시위대 일부가 유리창을 깨부수고 사법부가 칩거하는 수뇌부로 진입해 들어갔다. 기세등등한 시위대 중 일부의 손에는 카메라가 쥐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우리는, 급기야 그들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팔짱을 낀 채 목도할 수 있었다. 우리가 무엇을 어찌해서가 아니라 저들이 자신들의 맹신으로 인해 그들의 민낯을 온 천하에 까발렸다. 그들은 국가의 도덕을 규정하며 악을 통제하는 기관의 정수리를 깨부수고 들어가 국민의 세금으로 사들인 기물을 부수고, 심판자의 이름을 부르며 색출작업을 이어갔다. 자신들을 영웅이라 여기며 카메라에 본인의 표상을 찍어내기 바빴다. 그리하면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던 애국세력들이 자신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줄 것이었다. 내란의 우두머리는 영웅들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터였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그러한 무리를 일컬어 ‘폭도’라 명명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들은 법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름으로 한밤중의 어둠 속에서 탄생했다.
자유의 품이라 믿었던 세상은 온통 지옥으로 변해 있다. 모두가 눈이 멀어 버린 도시는 눈먼 부랑자들로 가득 차고, 식료품 가게들은 그들이 닥치는 대로 털고 간 잔해들로 폐허가 되어 있다.
의사 부인은 동료들을 한곳에 모아놓은 채 먹을 것을 찾아 나선다. 마트의 지하 저장고는 눈먼 이들이 발견할 수 없는 터라 식품들이 온전히 남아 있다. 그녀는 먹음직스럽게 걸려 있던 소시지를 베어 물며 허기를 채운다. 쇼핑백에는 끼니를 이을 식료품들을 가득 채워 그곳을 빠져나온다. 냄새를 맡은 걸신들이 달려들자 밖에서 기다리던 남편이 허둥지둥 달려와 그들을 막아선다.
간신히 몸을 피해 계단에 주저앉자 피폐해진 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쓰레기로 뒤덮인 거리에는 기진맥진한 맹인들이 널브러져 있고, 개들은 게걸스레 굶어 죽은 시체를 물어뜯고 있다.
빗방울이 들리자 비를 피해 들어간 성당에서는 성상들이 모두 헝겊으로 눈을 가린 채다. 과연 신은 그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눈을 멀게 한 것일까.
그토록 처참한 거리에 단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몸에 걸쳐진 누더기를 벗어 던지고 더러워진 몸을 씻기 시작한다. 입을 벌리자 촉촉한 수분이 그들의 혀끝에 와 닿는다. 그들은 모두가 이 순간에 도취 되어 악몽 같은 자신들의 상황을 잊은 듯 순간의 기쁨을 만끽한다.
악은 강하다. 그들을 둘러싼 힘은 거대한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만큼 보이지 않는 뿌리를 단단하게 내리고 있었다. 내란을 일으켰던 우두머리를 한순간에 자유의 세상으로 토해놓은 것은 그러한 무리들의 힘이었다.
그동안에도 끊임없이 정쟁은 이어졌고, 아직 우리가 쓰고 있는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누가 옳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몇 달에 걸쳐 내가 본 것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시작했다.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와 버젓이 저지르면 안 되는 국가 최고의 범죄를 저지르며 국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을 보았고, 성녀처럼 오롯이 눈발 위에서 폭력이 아닌 평화로 자신의 정체를 숭고하게 드러내던 키세스 군단을 보았고, 우리가 정쟁을 일삼으면서도 신성한 영역으로 남겨두었던 법원을 감히 때려부수는 폭도들을 보았다.
비록 내가 무지할 수는 있을 지언정 장님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교도소는 파놉티콘Panopticon의 구조로 형성돼 있었다.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는 ‘opticon’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는 <감시와 처벌 Discipline and Punish>에서 컴퓨터 통신망과 데이터베이스가 죄수들을 감시하는 ‘판옵티콘’처럼 개인의 행동을 감시하며 통제하고 있다고 했다. 병원이나 공장 같은 곳의 구조도 이와 흡사하다. 우리가 끊임없이 감시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게 현대의 복잡한 구조와 맞물리면서 재밌는 일이 생겨버리게 된 것 같다. 개인이 혼자서 방송을 할 수 있게 되기도 하고, 그 방송을 누군가는 선별해 볼 수 있게 되면서 우리는 통제 받는 자들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권력자들을 감시할 수도 있는 시스템으로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시놉티콘Synopticon은 파놉티콘과 반대로 감시를 받던 대중이 역으로 권력자를 감시하게 되는 것을 일컫는 표현이다. 점점 더 복잡한 세상의 구조 속에서 우리가 좀 더 눈을 부릅뜨고 살아남는 방식이 점점 진화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이번 사건으로 똑똑히 목도했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 유일하게 눈을 뜬 의사 부인 덕에 집을 찾아 나선 그들은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되돌아 올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처음 눈이 멀었던 남자가 다시 시력을 되찾으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처음 눈이 멀었던 이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은 모든 이들이 차례로 시력을 되찾게 될 것을 암시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의 신선한 충격으로 소설을 읽게 되었고, 그 섬세한 내면의 무게가 나를 다시 한 번 압도하던 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그 후속으로 집필된 소설이 <눈 뜬 자들의 도시>이다. 눈 먼 자들의 도시만큼 탁월한 작품은 아니지만 그들이 다시 눈을 뜨게 되면서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고 이들은 모두 부끄러웠던 과거를 묵인하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선거를 치르면서 정치인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누구도 선동하지 않았음에도 70퍼센트 이상이 백지투표를 하게 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정부는 다시 태세를 바꿔 ‘죽은 자들, 사라진 자들, 폐허, 화재, 쓰레기, 부패를 이야기하게 하자. 상처를 묶으려 했던 헝겊 조각을 찢어버리자. 눈먼 상태의 텅 빈 시야와 텅 빈 투표용지를 맹목적으로 던지는 사태의 유사성을 보게 하자.’며 시민들의 상처를 들쑤신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두가 눈이 멀어 버린 세상에서 눈이 멀지 않았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선동자로 지목하게 된다. 바로 의사의 아내이다. 그녀는 뒤쪽 발코니에서 쇠난간을 잡고 있다 두 발의 총구가 겨눠지고 죽어 바닥에 드러눕는다.
내란의 구덩이에 파묻히기 직전 내란의 우두머리를 파면한 대한민국은 선거를 통해 새로운 지도자를 뽑았다. 그를 환영하는 이들도 있고, 그를 불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가 잘하면 잘하는 대로, 잘못하면 잘못하는 대로 바라볼 수 있는 커다란 창이 우리에게 장착되어 있다는 사실말이다. 감시는 저들이 우리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저들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도구로 이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계엄에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온 순간만을 만끽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적대적이었던 감정의 앙금을 가라앉히고 크게 라디오를 켜놓아야만 할 것이다.
영화 속 고통 때문에 감정이 격해져 있던 이들을 무장해제 시키던 음악은 루이즈 봉파Luiz Bonfá의 <삼볼레로Sambolero>라는 곡이다. 아프리카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장르로 서아프리카의 노예무역을 통해 건너간 흑인 노예들이 전파한 브라질의 삼바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에서 유래한 춤곡인 볼레로라는 단어가 결합되었다고 한다. 약탈에서 비롯된 이질적인 문화를 한 공간에서 융합을 이루게 하려 했던 감독의 의도를 짐작케 하는 곡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뒤섞인 멜로디, 음악을 듣던 이들의 모습은 마치 눈먼 자들의 왕국과도 같았다.
음악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영혼과 활짝 뜬 눈과 눈물, 그것은 기쁨의 눈물일까? 슬픔의 눈물일까? 기쁨과 슬픔은 물과 기름이 아니어서 공존한다.